CAFE

책 속의 길

어우야담, 계서야담을 읽으면서

작성자청풍명월|작성시간26.06.12|조회수65 목록 댓글 0

☪ 《어우야담, 계서야담

 

제목으로 봐서는 야담모음집같다. 그러나 제목이 생소하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면 설명하고 있는데, 於于野談은 어우당 柳夢寅(15591623)이 수집해 엮은 것이라고 하고, 유몽인의 호 於于堂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의 자는 應文, 본관은 興陽, 황해도 관찰사, 좌승지, 도승지를 역임하고, 예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지냈다. 선조와 광해군 연간에 벼슬을 했다. 원래는 10권으로 방대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다른 문집과 함께 흩어졌다가 다행히 후손들이 일부를 모아서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溪西野談李羲俊(1775?)이 수집하여 순조 33(1833)에 편찬한 책이다. 이희준은 자신의 선조인 牧隱 李穡으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家系의 이야기와 다른 여러 인물들의 일화를 모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희준의 호는 溪西, 본관은 韓山, 대사헌을 지냈으며, 歌謠俗樂府를 잘했으며 옛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어우야담, 계서야담에는 실린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 모두 옮기기에는 버겁다. 孝烈, 忠義, 婚姻妻妾, 誣罔災殃, 諧謔까지 그 대상이 다양하고 여러가지다. 가만히 보면 여기 실린 이야기들을 그냥 야담으로만 취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정확한 역사기록이 없는 것이라면, 여기 이야기들을 역사로도 충분히 그것을 차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우야담

 

論介(? ~ 1593)는 진주 官妓였다. 계사년에 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이리하여 그 둘은 모두 죽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貞烈이라고 칭할 수도 없었으니 어찌하랴, 그러니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聖化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임진년에 왜병이 쳐들어오자 郭再祐는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을 쳤다. 왜적들은 감히 강을 건너 서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영남의 왼쪽 지대는 곽재우가 지켜 아주 튼튼했다. 이로 인해 전라도까지는 왜적이 침입하지 못했는데, 이는 모두 곽재우의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조정에서는 그를 특별히 대우하여 경상도 兵使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취임할 뜻을 갖지 않았다. 조정에 의견이 분분하다가 다시 상의한 끝에 병사의 벼슬은 주지 않고, 監司로서 불렀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가지려는 기색이 없이 곡식을 멀리하고, 솔잎과 송진을 씹어 먹을 뿐이었다.

 

그는 산속에 亭子를 짓고 강 언덕을 마주 보고 살았는데, 종일 사람과 만나는 일이 없고 더구나 부녀자와 가까이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운명은 숨이 끊어진 사람 같아 보였다. 사람이 일을 다스림에 있어 양식을 멀리할 수 없는 법이라. 이렇게 무리한 식사를 계속하기 며칠째 되는 날 드디어 비바람이 쏟아지고 번개가 치더니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친 것과 때를 맟추어 그는 逝去했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신선의 도를 배울 수 없구나. 郭公 같은 사람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느니

 

‘10만 양병설로 잘 알려진 李栗谷은 과거에 아홉 번 장원급제하고, 그 답안지들이 지금 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어디서 보았다. 그가 양병설을 주장할 때, 당시에는 소심하고 비루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그가 병사를 해체하지 말자고 한지 불과 78년 뒤의 일이었다. 당시 의정부에서 근무하던 西厓 柳成龍이 말했다. “후세에 나는 소인이라는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평소에 叔獻10만의 병력을 준비하고자 청원했지만, 나의 뜻은 그와 달랐다. 이제 와서 크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숙헌은 실로 높은 식견이 있었으니 우리 무리는 죽어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리라. 애석하다. 당시 나는 경연에서 그의 말에 찬동하지 않았으니 .”

 

李山海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경주 안강 玉山書院에 가면 그가 쓴 옥산서원편액도 있다. 지금 서원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따로 보관되어 있다. 김산해와 어우야담을 지은 유몽인은 친구였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과 李之蕃은 서로 교분이 두터워서 산해는 늘 나더러 우리는 세속적인 교우라고 말했다.”그러면서 이산해에 대해서 이지번의 아들 상국 산해는 한때의 명류로서 당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친구의 권고를 받은 끝에 지번이 丹陽留守가 되어 부임했다. 강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두 언덕에 산봉우리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기에 飛仙놀음을 해 볼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백성들이 송사를 청해오자, 재판에 진 사람에게 칡으로 꼰 동아줄을 바치게 하여, 그것을 두 산봉우리 사이에 매어 걸어 놓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학 같은 모양을 만들어 그것을 동아줄에 매달고는 그 위에 사람을 앉혔다. 그리하여 동아줄 양쪽을 왔다 갔다 하게 하니, 백성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신선같이 여겼다.

 

이런 줄타기 놀이가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을 알겠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백성의 고혈을 짜는 놀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南溟 曺植은 선비로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터였다. 영남에 은둔하면서 높은 벼슬자리 보기를 길가의 흙덩이 보듯 했다. 일찍이 서울에 와서 蕩春臺, 武溪洞 등 노닐지 않은 곳이 없었다. 礪城尉는 신분이 駙馬였지만, 신비들을 끔찍이 여겨 조식의 풍모를 사모해왔다. 그래서 산수가 갖추어진 산간에서 꼭 한 번 술잔을 올리겠다고 생각했다. 藏義門 송림 속에 장막을 치고 길게 읍을 하고 서서 남명이 지나기를 고대하며 아랫사람을 시켜 남명의 행차를 기다리라고 일렀다. 그러나 남명은 그 사람이 귀인의 심부름꾼인 것을 알아보고는 말에서 내리기가 싫어 일부러 취한 척하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지나쳤다.

 

長者를 내가 맞을 수 없지.”

 

여성위가 남명이 지나치는 길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바라보니, 남명의 모습은 천 길 멀리 날아가는 봉황새처럼 자취가 아득할 뿐이었다.

 

冠紅粧은 장안의 名技였다. 용모가 뛰어나 名樂院 敎坊(기생학교)에 속해 있었는데, 韓澍議政府 舍人이 되어 그녀를 첩으로 맞아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己卯士禍가 일어나고, 한주는 탄핵을 받고 멀리 귀양가게 되었다. 관홍장이 혼자 수절하며 살게 되니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그녀를 서로 차지하려고 야단이었다. 이렇게 여러 해를 보냈으나, 한주가 풀려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태는 점점 불리해져 집안의 늙은 한주의 어머니마저 굶기게 될 형편이라 가난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천군이 중매장이를 보내 그녀를 유혹했다. 이에 관홍장이 말했다.

 

내 비록 창기 집에서 난 계집이지만, 이미 한 사인(韓 舍人)에게 몸을 허락했으니, 다른 데로 시집간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집에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끼니를 끊기가 어려워 잠시 그대의 말을 따르노라. 만일 한 사인이 돌아오면 내 비록 공에게서 사내아이 아홉을 낫는다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겠다. 이 약속을 맺은 후에 따르리라.”고 했다.

 

이천군은 약속대로 하리라 했다.
그리하여 이천군의 집에서 20년을 살았다. 그동안 자녀 여섯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주가 용서받고 귀양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는 한주가 입을 옷 등을 마련하여 딸을 시켜 마중하게 하고, 그동안 이천군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전후 사정을 소상히 아뢰게 했다. 딸은 어머니 분부대로 교외에 나가 아버지를 맞이했다. 한주는 눈물을 흘리고 서 있는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네가 이처럼 자란 모습을 볼 줄은 몰랐구나.”딸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이천군을 따르게 된 까닭을 먼저 고했다.

 

한주는 웃으며 말했다.
네 어미가 늙어 망녕이 났나 보구나. 내가 어찌 감히 이천군 공자의 아내를 빼앗는단 말이냐. 더 말할 것이 없다. 비록 내게 온다고 할지라도 내가 쫓을 것이다. 옷가지를 도로 갖다주어라.”

 

그럼 전 어머니께 돌아가 뭐라고 말해야 옳습니까? 제발 그러지 마세요.”그러나 한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딸이 어머니께 돌아가 한주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자, 관홍장은 放聲大哭을 했다. 이천군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꾸짖을 수가 없었다.

 

한주의 딸은 부제학 洪仁度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천군의 집에서는 혼숫감을 마련하는 등 마치 자기 딸처럼 여겼다. 이천군에게서 난 자식들도 모두 벼슬하여 의 수령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들 조상의 묘 앞에 돌사람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모두 공양하여 바치는 음식에 도깨비나 귀신이 달라붙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무인석과 무인석을 세우는 이유가 과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사유가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명종 때) 普雨妖僧이다. 여러 經書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시와 서 등에도 능했다. 춘천 淸平山에 거처를 정하니 멀리 있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불도들이 모두 존숭하여 마지않았다. 嘉靖 연간에 奉先, 奉恩 두 절의 無遮大會를 봉선사에서 열었는데, 먹을 양식 수백 석을 내어 중들을 먹이고, 장식하며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여기에 모인 중들이 수천을 헤아렸다. 보우는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가사를 입고 수만 명의 중들이 옹위하는 가운데 상좌에 올랐다.

 

이때 한 노승이 나타나 말석에 이르는데, 몸에는 백 번도 더 기운 남루한 가사를 걸치고, 비쩍 마른 몰골에 겨우 禪杖에 의지하고 있었다. 상좌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보우가 이 중을 보는 순간 금방 안색이 변하면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 절을 했다. 머리를 땅에 붙이고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중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니, 보우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방울져 땅에 떨어졌다. 노승은 선장에 의지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아아, 나는 네가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이 한마디 남기고 노승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보우는 쓸쓸한 한숨만 쉬면서 며칠을 보냈다. 여러 중이 이상하게 여겨서 떠나는 노승의 道號를 물으니, 智行이라고 했다. 보우는 고승 一先에게도 도를 구하고자 후한 예물을 받쳐들고 맞이하러 갔으나 일선 또한 한마디 말도 없이 크게 글을 써서 던져 줄 뿐이었다.

 

雲橫奏嶺家何在(운횡주영가하재)
雪橫藍關馬不前(설횡람관마불전)
구름이 고개를 가로질러 덮고 있으니 집은 어디 있느뇨
눈이 쏟아져 앞을 가리니 말은 나가지 못하는구나

 

그 뒤 일이 실패하자(문정왕후의 실각) 백성의 원성이 들끓으니 보우는 寒溪寺의 암굴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발각되어 제주도로 귀양를 갔다. 제주 목사가 손님을 맞는 객사의 소제부로 일을 시켰는데, 날마다 힘깨나 쓰는 무사 40명으로 하여금 돌아가며 한 대씩 주먹질을 하게 하니 마침내 맞아 죽고 말았다.

 

壬辰, 癸巳年 사이에 統制使 李舜臣(1545~1598)閑山島에 군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셋째 아들 의 죽음을 통보받았는데도 아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亂中日記에도 소상히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어우야담그 아들 역시 종군하여 충청도에 이르러 왜적과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단숨에 서너 놈의 왜적의 목을 베고, 이어 적을 쫓아 말을 달리던 중 한 무리의 의적들이 초가집에 잠복해 있다가 불시에 습격했다. 순신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순신은 이러한 소식을 알 까닭이 없었다. 뒤에 충청도 防禦使가 왜적 열세 명을 잡아 산채로 한산도로 보냈다. 그날 밤 순신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곧이어서 부음이 날아들었다. 순신은 잡혀 온 왜적을 끌어내어 물었다. ‘어느 날쯤에 너희들은 충청도 어느 곳에서 붉고 흰 준마를 탄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 너희들이 그 사람을 죽이고 말을 빼앗았을 터인즉 말은 어디 있느냐? 말을 찾고자 한다.’

 

순신이 이렇게 타이르자 그 가운데 한 놈이 어떤 날 한 소년이 붉고 흰 얼룩말을 타고 우리를 추격하였습죠. 소년이 아군 서너 명을 죽였으므로 우리는 초가집에 잠복해 있다가 불시에 소년을 습격했고, 말은 빼앗아 우리 장수에게 바쳤습니다.’다른 왜적 놈들에게 물어도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다. 순신은 애통해 마지않았다. 왜놈들을 옥에서 끌어내 참수하고, 招魂祭를 올려 아들에게 이 일을 말해 주었다.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중국에 들어온 마테오 리치로 부터 다. 조선 정조 때 李承薰(17561801)1783년부터 천주교 교본을 가져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전에 광해군 때 李睟光이 중국에서 聖物을 들여와 천주교의 존재가 알려졌다고 배운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후를 살았던 유몽인 때도 西敎에 대해 꽤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天竺 서쪽에 歐羅巴가 있고, 그곳에 하늘을 섬기는 가 하나 있다. 그 교는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닌 별난 이다. 모든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이기지 말라고 하고 天尊을 만들어 놓고 받들어 모신다. 석가와 노자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유교를 원수처럼 여긴다. 도를 많이 인용하여 말하면서도 큰 근본에서는 현격히 다르다.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군자를 뽑아서 敎皇이라고 이름한다. 교황은 천주의 가르침을 퍼뜨리며, 세습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들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자를 택하여 세운다. 그는 사사로운 가정의 생활 없이 오로지 그 몸을 공무에만 맡기는 것이다. 자식은 물론 없고, 억조창생을 모두 자식이라고 한다. 그 무리 가운데 天文성상에 정통한 마테오 리치라는 자가 있다. 그는 태어나기는 구파파에서 났으며, 서역 8만 리를 周遊하며 10년간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가 그것을 다 버리고 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經書를 모두 섭렵하고 성현의 글도 읽고 하여 癸卯年에 이르러 책을 쓰니, 상하권으로 여덟 편이 되었다. 천주교의 가르침인데 그 끝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라 哀帝 元壽 2, 冬至가 지난 사흘 뒤에 그 나라에 동정녀가 강림하여 남자와 교접 없이 아이를 배고 낳으니 사내아이라 이름은 예수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을 구제하면서 몸소 서역의 神人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신을 파견했더니, 사신은 반도 채 못 가서 인도로부터 佛經을 얻어 가지고 와서 그것이 聖敎라고 잘못 알려진 사실도 있다.”

 

어쨌든 마테오 리치란 자는 異人이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천하의 지도를 그렸고, 여러 나라의 말을 알았고, 중국에 와서는 포교를 했다. 그 포교의 행각은 동남 여러 오랑캐 나라에도 미치어 尊信하는 바가 되었다. 전자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이 도를 운위했고, 許筠이 중국에 들어가서 그 지도와 교지 12장을 갖고 돌아왔으나, 모두 惑世誣民의 죄임을 면치 못했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교류한 역사는 깊고 또 깊다. 서로 이웃 국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한 文士가 중국에 갔을 때 일이다. 아름다운 아가씨 하나가 나귀가 끄는 수레에 타고 지나가는데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적어 하인에게 주어 전하게 했다.

 

心遂紅粧去 마음은 미인을 좇아가고
身空獨陭門 몸은 부질없이 홀로 문에 기댔네

 

하인이 시구를 전해주자 그 아가씨 수레를 세우고는 잠시 읽어보더니, 對句를 적어서 보냈다.

 

驢嗔車載重 수레 무거워졌다고 화를 내니
添却一人魂 그것은 한 사람이 더 실린 까닭일세

 

마음에 있다는 건지 없다는 것인지 내 한자 실력으로는 잘 모르겠으나 수레에 따라는 말 같아 보이기는 한다. 牧隱 이색은 수제였다.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그 명성이 중국에도 떨쳤는데, 그가 어느 절에 이르자 중이 나와 예로서 맞이하며 말했다.

 

듣자하니 당신이 동방의 대문장으로 이곳에서 과거에 장원급제했다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
이색이 중과 함께 앉자, 한 사람이 곧 떡을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중이 아래의 글귀를 보여주면서 대구를 채워보라고 한다.

 

僧笑小來僧笑小 승소가 적으니 중의 웃음도 적다.

 

그러면서 승소는 떡의 별명이라고 말해 준다. 이색은 얼른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후일을 기약하면서 언젠가 대구를 적어와서 글 빚을 갚겠다고 하고 절을 떠났다. 그 후에 어느 날 한 객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병을 들고 들어오자 그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주인은 객담이라고 하고 객담은 술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라고 했다. 이색은 드디어 중으로부터 받은 글귀의 대구를 짓기 시작했다.

 

客談多至客談多 객담이 많이 오니 손의 말이 많구나.

 

반년이 지나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절에 들러 전날 만난 중을 만나서 이번에 대구를 지었다며, 지은 글을 들려주니 중이 무릎을 탁치고 기뻐했다고 한다.

 

홍명희 소설 임꺽정에는 李長坤이 나온다. 그는 홍문관 교리시절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잡으러 오자 옷도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창녕으로 도망쳤다. 도중에 피로하여 길가에 쓰러져 잠시 잠들었을 때 좇아온 나졸들이 그를 발견했으나 짚신이 큰 것을 이상히 여기고 발이 큰 것을 보면 이장곤 같은데, 옷차림이 아닌 것 같다.’면서 그대로 지나쳤다. 장곤은 기갈로 더 이상은 가지 못하고 반쯤 쉰 보리밥을 주워 먹으면서 겨우 기운을 차려 민가로 기어들어가 백정집의 사위가 되었는데, 거기가 내 고향 창녕이라고 한다. 백정은 사위가 맨날 밥만 축내고 빈둥빈둥 노는 꼴에 천불이 났다. 그래서 잔소리가 많아졌으나 그 뒤에 연산군이 쫓겨나자 장곤은 관복을 구해 입고 고을 원님에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백정 사위가 겁도 없이 원님을 만나려 하니 곤장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원님이 이장곤의 명함을 보자 허겁지겁 달려와 맞이하고 객관으로 모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별일 다 본다며 수근거렸다. 장곤은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상까지 지냈다.

 

엊그제 일본에 사는 딸아이가 일본 후쿠시마현 구모모토성과 아쇼산을 여행하고 왔다면서 사진을 보냈다. 사진을 보며 생각난 것이 구마코토성 성주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라는 것과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달리 돌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도 榮華長壽까지 누리며 살았다는 것과 나고야성을 쌓는 책임자였기도 했다는 것이다. 가토는 휘하의 장졸들을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는데, 그런 까닭에 휘하 중 한 사람이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출전하기 전 순식간에 칼을 빼어 가토의 등덜미를 내려쳤다. 하지만 가토가 급히 피하면서 칼을 뽑아 이를 막았고 손가락만 가볍게 다쳤다. 휘하 장수들이 자객을 잡아 당장 목을 칠 기세였으나 가토는 황급히 제지하며 말했다.

 

내 바야흐로 진을 치고 싸움에 임하려는 마당에 보잘 것 없는 하나의 필부가 감히 대장군을 해치려 하였으니, 그 용기라면 능히 적의 장수라도 감당할 만하다. 그를 용서하여 크게 써 보리라.”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를 偏將으로 삼았다. ‘가토의 사람됨이 활달하고, 호걸스럽고 도량 또한 이렇게 크니 그를 대장군으로 삼은 히데요시 또한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겠다.’라고 저자는 말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衣食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임진왜란 때 중국 군사 10만 명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했는데, 그들은 조선의 풍속이 저들과 다른 것을 곧잘 비웃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를 잘 먹는 것을 보고는 더럽다며 모두 침을 뺃었다. 논어에도 회를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했고, 에도 짐승과 물고기의 날고기를 썰어서 회를 만들었다.’라고 했으므로, “공자께서도 일찍이 좋아한 것인데 어찌 그대의 말이 그렇게 지나친가?”하자, 중국인이 대답했다.
소의 밥통이나 천렵 같은 것은 모두 더러운 것을 싼 것이다. 이것을 회를 쳐서 먹는다니 어찌 뱃속이 편안하겠는가?”

 

또 고기를 꿰어 구워 먹으면서 그 피를 빨아먹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빼앗아 땅바닥에 동댕이치면서 중국인은 잘 익은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고기에 피가 그대로 붙어 있다면 이것은 오랑캐의 음식이다.”고 욕을 했다. 이에 文士는 또 대답해 주었다.
회나 구운 음식은 모두 古人들이 좋아하던 것이다. 고서에도 많이 보이니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羅州 牧使에게 백발홍안의 한 노인이 찾아왔다. 둘은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므로, 목사는 객관에 들이고 敎坊에서 나이 어리고 예쁜 기생 하나를 들여서 侍寢하게 했다. 노인은 보름쯤 하고 갔다. 떠날 때 기생은 남편을 보내는 아녀자처럼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서러워했다. 그 꼴을 보고 다른 기생들이 조롱했다.
이별한 남자가 한두 사람이어서 그렇게 슬퍼한단 말이냐? 더구나 늙고 쭈그러진 영감을 가지고.”

 

목사가 소문을 듣고는 괴이하여 기생을 불러 물었다.
손님은 나이가 70이 된 노인인데, 네 어찌 그렇게 이별을 슬퍼한단 말이냐?”기생이 말했다.
비록 나이 70이라고 하오나 진지를 드시는 것이나, 다른 행동이 젊은 사람과 다름이 없었나이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노인이 매일 산삼이라도 먹는단 말이냐?”
다른 것은 특별히 드시는 것이 없고, 다만 허리춤에서 푸른 주머니를 꺼내 노인께서 저녁에 그것을 물에 담가두었다가 아침에 그 물을 마시곤 하였지요. 아이들 주먹만 한 그것이 무엇인지 소녀는 알지 못합니다. 하루도 그르는 일이 없고, 기운도 젊은이 못지않았습니다.”
기생의 말을 듣고도 목사는 고개를 가웃거렸다.

 

고대에도 근대, 아니 현대에도 불로장생 영약에 대한 꿈을 꾼다. 쇠로 그릇을 만들어 잠자기 전에 물에 담가주었다가 새벽에 그것을 마셨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철분이었고, 풍부한 철분이 젊음을 연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相國을 지낸 韓應寅信川땅으로 내려가 가솔들과 농사나 지을 생각을 했다. 당시는 온 나라 안에 왜적이 들끓어서 세도가의 집안도 편안치가 않았다. 가솔들에게 농사일을 알게 하기 위해 밭 메고 모 심는 일을 권장했다. 하루는 김을 맨 논에 곡식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려고, 직접 논에 나가 지팡이를 끌고 이랑을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우리 집사람들이 김을 메니 온 논이 퍼렇게 곡식이 자라니 이 얼마나 대견한 일이냐?”

 

그로부터 45일 뒤 마을의 한 늙은 농부가 상국의 논을 지나는데 보니 퍼렇게 자라는 것은 벼가 아니라, 가라지뿐이었다. 작게 자란 벼를 모두 뽑아버린 것이었다. 농부는 하품을 하면서 돌아섰다. 집안 하인, 시비들 모두 서울서 나고 자랐으므로 풀과 곡식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옷 짓고 거문고 타고, 노래 부르는 것이나 배웠지 곡식이 어떻게 자라는지 몰랐던 것이다. 신천 사람들은 이 일을 풍자해 무슨 일이 잘못되면 으례 한 상국의 농사라고 했으며, 말세에는 사람 등용하는 일도 이와 같았다고 한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조상의 蔭德이 내게 미치기를 빈다. 내가 보건데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예수님이나 마흐메트를 믿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의 음덕이나 나의 음덕을 믿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선 선조 때 鄭協은 어려서 장가들어 새로 지은 옷을 입고 栗谷書院을 다녔다. 하루는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서 떨고 있는 거지 아이를 보고 자기가 입고 있던 두루마리를 벗어 주고는 家童을 시켜 집에 데려가 키우게 했다. 아이는 크면서 주인에게 충성스럽고 또한 힘이 장사였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터져 왜적을 피해 나루를 건너 피난하게 되었는데, 나룻배는 한 척 뿐이고, 건너갈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르러 도저히 무사히 건널 수가 없었음에도 여러 사람이 허둥지둥 배에 탔다. 배가 강 중간에 이르자 그만 뒤집혀 배에 탄 사람들이 몰살당였다. 그런데 유독 정협의 가족만은 그가 길러 준 거지 아이가 얕은 여울을 찾아 업고 건네주어서 무사히 중에 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林悌는 호협한 선비로 젊었을 때 친구와 같이 어느 골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골목이 막다른 곳에 제상의 집이 있었고, 마침 잔치를 베풀고 있었으므로 임제는 그집 주인을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에게 내 이 집 주인과 교분이 있으니 자네는 나를 따라 이 집 연회에 참석하지 않겠나고 물었고, 친구는 그의 말을 믿고 그러겠다고 하였다. 임제는 친구를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말석에 앉았다. 주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하여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이군하며 주인과 손님이 다 같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임제는 여러분이 지금 이 사람을 보고 웃는데, 그것은 아직 약과요. 내 말을 듣고 나면 가소로워서 배꼽이 빠질지도 모르오.”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또 무슨 소린가?”임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문밖에는 내 입만 바라보면서 술과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소이다.”하고 농담을 던졌다. 이 말에 진짜로 주인과 손님들이 모두 웃을을 터뜨렸다. 그들은 마침내 임제의 호쾌한 성품을 알게 되고, 드디어 밖에서 기다리는 친구를 하인을 시켜 불렀다. 친구가 들어와 임제가 여러 선비들과 어울려 환담하는 것을 보고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임제가 개경을 지나다가 길가에 이름 없이 묻혀 있던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지었다는 시가 생각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계서야담
 
西厓 柳成龍安東 사람이다.
 
(이하 따로 붙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