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두문불출(杜門不出)과 황희정승(黃喜政丞)

작성자온 하|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두문불출(杜門不出)과 황희정승(黃喜政丞) 

 

고려말 최영장군은 상소를 올렸다,요동(遼東)은 고구려때부터 우리의 고유 영토인데

명나라가 이곳을 침탈하기위해 철령위를 설치하려하니 이를 정벌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정벌불가 외치는 온건파 대신이있었지만 도당(都堂)은 중론을 걸쳐 요동정벌에

나섰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威化島) 에 당도하자 압록강이

장마로 물이불어 고려의 5만 대군이 강을건널수가 없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으나

장마는 계속되었고 병사들에겐 전염병이 돌기가 시작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소위 ‘4대불가(四大不可)론' 을 내세우며 상소를 올렸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않은 일이며

둘째, 긴 장마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적당하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에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넷째, 날씨가 무덥고 비가 많이오면 화살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수없을 뿐만아니라

병사들은 많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고려왕실은, 이성계의 상소를 묵살하고 계속 진군을 명하였으나 참다 못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고려왕실과 맞섰다,결국 최영장군을

유배시키고 왕을 폐위시켰으며 정도전, 남은 배금련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끌어

들인 사람이 바로, 정도전(鄭道傳) 이었다 그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고려를 폐하고

유교사상을 통치이념으로한 새로운 왕조를 계획한것이다 결국 고려왕조는 무너지고

새로운 이씨조선이 건국되었다.

 

이때 고려의 많은유생들은 이신벌군(以臣伐君)'신하가 임금을 치다'에 분개하고 불사

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길수는없다’는 정절을 내세우며 고향을 등졌다

이들이 모인곳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를한 두문동(杜門洞) 이었다

이들은 동네 동쪽과서쪽에 문을세워서 걸어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가지않고 백이

(伯夷)와 숙제(叔齊)처럼 산나물을 캐어 먹으며 살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들을 회유

하기 위해서 많은 대신들을 보냈으나 끝내는 나오지않자 산에 불을 지르고 두문동을

불태워버렸다, 이때 불에타 숨진유생들이 72명이라하여 "두문동72현"이란말이 생겨

났다.

 

다시말해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멸망 직후에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지킨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자 가어와 사기는 공자의 승당제자를 72명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를 본받아

두문동 유신을 72현으로 부르게되었다, 그래서 동국 18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리

학자들이며 두문동72현은 근대화이전 우리나라대표적 절개(節槪)와 충(忠)의 표상이

되었다.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다하고 지조를지키기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서 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일명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역조(易朝) 즉,새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는

이들의 학식이 아까워서 회유하고 설득을 하였지만 끝내 따르지않자 은거지를 위협을

하였으나 끝내는 지조(志操)를 버리지않고 오히려 고려 충신 72인이 불에타 숨졌다고

전해지고는 있으나 72인은 공자의 제자 숫자이며 실제 불에타서 숨진유생의 숫자는

불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후 정조때인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徐有防)이 두문동 72인 중의생

(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孟)씨(이름이 전해지지않음) 세명을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할것을 상소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그후 개성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어 있다.

 

두문동에관한 기록은 두문동72현의 한사람인 성사제의후손인 성석주(成碩周1649~

1695)가 그의조상에 관한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가문에 전해지고

있는데 고종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成大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

속록(杜門洞實記(幷)續錄)"을 편찬하여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선비들은 불사이군의 선비정신을부르짖으며 은거함에따라 '두문동'이라는

이름은 은거의 상징이 되었고 이를본받아 두문동이라 칭하는곳이 나라안 여러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이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였으며 그 어원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원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은 '문을닫고 나가지 않는다' 는 뜻으로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 권 68 상군열전

'공자건 두문불출 이팔년의(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 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후 이성계는 모든 정성을 다해 회유를하고 설득하였으나 끝까지 두문불출한 개성

유생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향후100년간 개성유생들은 과거를 보지못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개성유생들은 생계를위해 장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들이 훗날 그 유명한 

"개성상인"이되었다 이때 황희(黃喜)라는유생도 고려가멸망하자 처음에는 두문동에

은둔하며 지냈는데 두문동 동료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문동에서 나왔다고 한다.

 

야인 생활을하던 황희유생은 동료들의 숭고한뜻을 기리기위해 마음을다잡고 벼슬길

에 올랐는데 태종때부터 세종, 문종까지 3대에걸쳐 왕들을보좌했던 명재상이되었다

 

조선초기 60여년을 관직에있었고 영의정(領議政)을18년이나 지낸 황희정승(政丞)은

동시대의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청백리의귀감으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황희 정승에게는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황희정승이 들길을지나다가 밭을가는 농부를보고“어느소가 일을잘 하느냐?”

고 큰 소리로 묻자 갑자기 농부가 밭 갈기를 멈추고 황희에게 와서 귓속말로 답하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황희정승이 "어찌하여 귓속말로 답하는가?" 그러자 “아무리 짐승

이라도 잘못한다는 말을들으면 좋아할리가있느냐”고 하는말을 들은후로는 평생동안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두 계집종이 다투다가 황희에게 와서 이에 시비를 가려줄것을 청하자 자초지경을

다 듣고난후 각자에게 “네 말이 옳다.” 또 “네 말도 옳다.” 고 하였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있던 조카가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그른 법이지 어찌 둘다 옳을수가 있느냐?”고

하자 “응~ 네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일에 관대했을뿐 중요한 국사에 임하여서는 시비곡직을 분명히

하여 양영대군의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등 태종과 세종의신임을 두텁게 받으

면서도 그의 관직생활 중에는 좌천이 2번, 파직이 3번, 귀양살이가 7년이나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종서가 병조판서 시절 의정부 회의에 참석했는데 자세가 바르지 못했던지 회의가 끝

난 후 영의정이던 황희가 큰소리로 “여봐라 병판대감의자 한쪽다리가 짧은가보다 빨리

고쳐드려라”라고 호통을치자 깜짝놀란 김종서가 의자에서 황망히내려와서 무릎을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민망하게 이를본 좌의정 맹사성이 퇴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신 대감

께서 유독 김종서에게는 왜 그리도 엄하게 하시오” 했더니 “우리는 늙었고 장차 김종서가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니 그를 바르게 키워야 하지 않겠소?” 했다고 한다.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30세(1392) 되던 해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72현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

갔던 황희는 “젊은자네는 나가서 불쌍한 백성들을위해 일하라”는 선배들의간곡한 권유로

두문동에서 나와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였다.

 

황희는 반대인사였다는 질시속에 빛을보지 못하고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로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펼치기

시작 했다

 

그러나 1418년에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교하 지방에 유배되었는데

교하가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져 5년간 더 유배 되었지요

그런데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의 이치에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어요

황희는 60살에 세종대왕에 의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지요

 

황희는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년, 그 동안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경세육전>,<국조오례>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수 있게 하였지요

 

세종 31년(1449) 87세 되던 해에

60여 년간의 관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3년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지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종대왕이 문병차 찾아 갔는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세 노인이 초가삼칸집 멍석자리 위에 누워 있었어요

 

이를 본 세종대왕이 깜짝 놀라 이럴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늙은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청백리(淸白吏)로 살아온 황희정승은 많은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어요

 

그러나 

요즘 공직자들은 어떠한가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는 몇채의 주택을 소유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불법적인 땅 투기도 서슴치 않고 있지요

공직자들은 그 누구 보다도 도덕과 윤리 그리고 첨렴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저버린지 오래됐지요

공직자가 지켜야 할 ‘최소’를 버리면 나라가 '타락'한다 했어요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했는데

청백리로 살았던 옛선인들의 숭고한 뜻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나라의 앞날이 암울하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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