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리목월문학관(경주시 진현동 550-1. 054-779-6090
◇ 한국 문학의 두 거장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 선생의 넋을 기리는 “동리목월문학관”은 한국 전통의 기와집 형태로 우리의 전통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건물은 크게 2개의 건물로 나눠지는데 크기가 더 큰 건물이 문학관이다.
문학관 본관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는 동리문학관, 오른쪽은 목월문학관으로 꾸며져 있다.
지하에는 두 사람의 문학적 업적과 생애, 그리고 문학사적 위치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상관, 동리 목월 문예 창작대학,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위치하고 있다.
◇ 동리문학관으로 들어서면 동리의 흉상이 있고 그 뒤의 유리판에 “동리 문학은 마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마귀이다”라는 이어령의 함축적 예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김동리의 생애, 실제 썼던 물건들 그리고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해 두었음.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녀도>, <역마>, <황토기> 등이 있는데 실제 학창 시절 우리가 한 번쯤은 접해 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 목월문학관 역시 안으로 들어서면 목월 선생의 흉상이 있고, 그 뒤의 유리판에 그의 유명한 시구인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새겨져 있다.
* 박목월의 생애, 실제 썼던 물건들, 초판본 그리고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청노루>, <나그네>, <산도화> 등이 있다.
□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 1913-1995
본관은 선산. 호적 명이 김창귀(金昌貴), 족보명은 김태창(金太昌), 아명은 창봉(昌鳳). 자는 시종(始鍾), 호는 동리(東里).
*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 출생. 생가는 현재 경주시 성건동 284번지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집터에는 김동리의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만이 있다.
무당촌으로도 불렸던 성건동 일대에 떠도는 무당 이야기를 소재로 김동리는 <무녀도>를 썼음. 김동리의 또 다른 대표작 <바위> 역시 이곳이 배경이다.
*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의 17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임수(金壬守). 동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큰형은 동양 철학자 범부(凡父) 김기봉(金基鳳)이며, ‘동리’라는 호는 그가 지어준 것이다.
* 김동리는 그 뜻을 ‘해가 돋는 곳, 동쪽 마을에 살기로 한다. 그저 햇빛이 좋다’라고 풀이한 바 있다.
*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동리는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던 관계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만 수학하였음. 어린 시절 부친의 술주정에 김동리의 모친은 기독교 신자의 집으로 자주 몸을 피했음. 그때마다 부친은 그 이웃과 종교적 말다툼을 벌였음. 그러던 어느 날 어린 김동리가 술찌끼에 맛을 들여 취하고, 이것이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친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 그렇듯 김동리는 모친의 입교와 부친의 술주정에서 비롯된 잦은 분란과 무관심으로 점철된 어두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음. 그 과정에서 김동리는 모친으로 상징되는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거니와, 이는 형 김범부의 사상적 가르침과 함께 후일 김동리의 성격은 물론 정신세계를 떠받치는 두 축이 된다.
*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대결로 압축되는 김동리의 대표작 <무녀도>의 서사적 갈등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대결로 압축되는 김동리의 대표작 <무녀도>의 서사적 갈등은 바로 이러한 가정사가 투영된 결과이기도 했음. <무녀도>에서 주인공 ‘모화’의 정신세계는 곧 부친을 상징하며, 전도 부인과 부흥목사는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모친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1902년 김동리의 생가가 있는 성건동 마을에는 초가를 얹은 ‘경주읍교회’가 생겼음. 현재 경주제일교회의 전신이다. 이 교회는 1909년 경주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인 ‘계남학교’를 설립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모친의 손에 이끌려 김동리는 이 학교를 6년간 다녔다.
* 김동리가 이후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연이어 진학하게 된 것은 모친의 영향 때문이다.
경주 제일교회 소속의 계남소학교와 대구의 계성중학교 및 서울로 편입한 경신중학교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다. 하지만 그의 학창 생활은 17세 되던 1929년 경신중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 큰형의 제자였던 서정주와 교우 관계를 맺으면서, 그와 함께 한국 문학사에 있어 순수문학의 전통을 수립하게 됨.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한국문인협회 회장·예술원 회장·한국소설가협회 회장·한일문화교류협회장 등 주요 문예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발한 문단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 1968년『월간문학』을 창간하였으며, 1973년 『한국문학』을 창간하였다.
1934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백로(白鷺)」가 입선되면서 등단하였고, 이듬해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는 단편소설「화랑의 후예(後裔)」가 당선됨으로써 소설가로서 창작 활동을 펼침. 이어서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단편 「산화(山火)」가 또다시 당선되었다.
* 그리하여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단편 「무녀도(巫女圖)」(중앙, 1936.5)· 「바위」(신동아, 1936.5)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1930년대 후반 가장 주목받는 신세대 작가로 부각되었음. 특히, 유진오로 크게 나뉘는 구세대의 문학과 이른바 세대 논쟁을 벌이면서 1930년대 후반 신세대 문학의 기수가 된 그는 서정주와 함께『시인부락』(1937)을 결성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하였다.
* 이후 그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대립과 혼란 속에 좌익계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 대항하여 우익계 단체인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초대 회장이 됨.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또다시 순수문학 논쟁을 벌이다.「순수문학의 진의(眞義)」(서울신문, 1946.9.14.)를 계기로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며 김병규(金秉逵) · 김동석(金東錫) 등의 좌파 이론가와 맞서서 논쟁을 벌이다. 한편, 소설 작품에서도 우파의 정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투영시키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 좌파 이론가와 논쟁을 벌인 그는 ‘본격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좌파 계급주의 민족 문학론에 대항하여 인간주의 문학론을 제창함. 그가 제창하는 인간주의 문학론은 그 스스로 ‘본령 정계의 문학’으로 명명한 것인바, 「순수문학의 진의」에서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것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 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 문학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계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바로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으로 규정을 내림. 즉, 그는 문학의 사회 참여와 공리성을 부정하는 문학적 입장에 서 있다.
* 그리하여 그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무녀도」·「황토기(黃土記)」(문장,1939.5)·「실존무(實存舞)」(문학과 예술,1955.6)와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현대문학, 1955.11.∼1957.4)·「을화(乙火)」(문학사상, 1978.4) 등을 통해 역사와 현실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여 들어감. 그것은 인간과 생명의 원형질적 정수를 탐구하는 것이다.
* ‘본격 문학=순수 문학=민족 문학’이란 문학적 이념 아래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한국 소설사에서 토착적이고 민족적인 소재를 ‘생의 구경적(究竟的) 탐구’로써 형상화하여 민족 문학의 전통을 정립하고 확대한 작가이다.
* 주요 작품으로 「역마」(1948) · 「등신불」(1961) · 「까치 소리」(1966) 등의 단편소설이 있고, 단편집으로 『무녀도』(1947) · 『황토기』(1949) · 『실존무』(1955) · 『등신불』(1963) · 『바위』(1973) · 『밀다원시대』(1975) 등과,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 · 『소설 작법』(공저, 1965) · 『고독과 인생』(1977) · 『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시집으로 『바위』(1973)와 유고 시집 『김동리가 남긴 시』(1988),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1977) · 『사색과 인생』(1973) 등을 남겼다.
* 아세아 자유문학상, 예술원 문학 부문 작품상, 3·1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 서울시 문화상 문학부만 본상, 5.16 민족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또한 국민훈장 동백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다.
□ 시인 박목월(朴木月) : <생가 :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666. 054-772-3077>
*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1915-1978)
1935년 대구의 계성보통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함.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연세대학교 · 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 운동에 가담, 문총 상임위원 · 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 ·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총무 · 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 수행했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과 창조사(創造社)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 잡지 『아동』(1946) · 『동화』(1947) · 『여학생』(1949) · 『시문학(詩文學)』(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였다.
* 처음은 동시를 썼는데 1933년 『어린이』지에 동시 「통 딱딱 통 딱딱」이 특선 되었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지에 동요 「제비 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 본격 시인으로는 1939년 9월 『문장(文章)』지에서 정지용에 의하여 「길처럼」 · 「그것은 연륜이다」 등으로 추천받았고, 이어서 「산그늘」(1939.12) · 「가을 으스름」(1940.9) · 「연륜」(1940. 9)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 1946년 조지훈·박두진 등과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여 해방 시단에 큰 수확을 안겨 주었다.
* 1930년대 말에 출발하는 그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 서정에 민요적 율조가 가미된 짤막한 서정시들로 독특한 전통적 시풍을 이룸. 그의 향토적 서정은 시인과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특유의 것이면서도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을 아울러 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청록집』 · 『산도화』 등에서 잘 나타남. 6·25전쟁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적 경향도 변하기 시작하여 1959년에 간행된 『난(蘭)·기타』와 1964년의『청담』에 이르면 현실에 대한 관심들이 시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으며, 주로 시의 소재를 가족이나 생활 주변에서 택하여, 담담하고 소박하게 생활사상을 읊고 있다. 1967년에 간행된 장시집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찬미를 노래한 것으로 시인의 기독교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있다.
1968년의 『경상도의 가랑잎』부터는 현실인 식이 더 많이 심화해 소재가 생활 주변에서 역사적·사회적 현실로 확대되었으며,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사념적 관념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1973년의『사력질(砂礫質)』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해명되면서도 냉철한 통찰 때문에 사물의 본질 해명에 내재하여 있는 근원적인 한계성과 비극성이 천명되고 있다. 그것은 지상적인 삶이나 존재의 일반적인 한계성과 통하고 있다.
* 수필 분야에서도 일가의 경지를 이루어,『구름의 서정』(1956),『토요일의 밤하늘』(1958), 『행복의 얼굴』(1964) 등이 있으며, 『보랏빛 소묘(素描)』(1959)는 자작시 해설로서 그의 시작 방법과 시 세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사적(詩史的)인 면에서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향토적 서정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애국적인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5년 첫 시집 『산도화(山桃花)』(1954)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8년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 문예상 본상을, 1969년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1968)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