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선수들(14)...31경기 연속안타의 기록 빛났던
이원녕씨와 부인 정종숙씨
이원녕
그때 그 선수들 열네번째 주인공은 이원녕입니다. 이원녕선수는 70년대의 10대 가수였던 정종숙과 결혼해 스포츠스타와 연예인의 커플로도 유명했던 선수였습니다. 물론 실력까지 빼어나 31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했던 선수였습니다. 후일 프로야구의 박종호선수가 그 기록을 깼지만요. 스포츠스타 연예인 커플의 원조라 할만한 이원녕선수의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투타겸장의 천재
고교야구에서 그 팀의 가장 잘하는 선수가 에이스 투수에 클린업트리오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럽습니다. 야구 센스가 있는 선수가 주로 투수를 맡게 되니까요. 우리가 기억하는 강타자였던 임신근 김봉연이나 이광은 그리고 김재박 김성한 등은 고교시절 모두 팀의 에이스였습니다. 게다가 클린업트리오를 맡아 타선을 이끌기도 했구요. 물론 이승엽이나 이대호들도 마찬가지로 고교시절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투수였지요. 오늘의 주인공인 이원녕 역시도 고교시절엔 강타자에 명투수를 맡았던 양수겸장의 야구천재였습니다.
중앙고등학교 재학시절 이원녕은 고교야구 연맹전에서 장충고등학교와 대결합니다. 9회까지 4-4로 팽팽히 맞섰던 대결이었는데 그날 심판은 9회초 장충고등학교 공격에서 이원녕에게 거푸 보크를 선언하면서 6-4로 경기가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자 중앙고등학교는 심판의 판정에 항의 하면서 경기를 포기해버립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섰던 이원녕은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서 야무진 방망이질과 장래가 기대되는 투수로 이미 야구전문가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있긴 했었습니다. 이듬해 고2가 되는 이원녕은 대통령배 서울예선에서 성동고등학교를 6-0으로 셧아웃 시키며 본선 티켓을 손에 쥐게 됩니다. 당시 강팀으로 꼽히고 있었던 팀들을 살펴보면 초고교급 허구연, 김성관 등을 주축으로 한 경남고와 고교 최강이었던 경북고는 남우식, 양창의, 손상대, 배대웅, 정현발 등의 초호화멤버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린상고, 배명고 등이그 뒤를 따르는 형국이었기에 첫 출전이었던 중앙고등학교가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 이원녕이 고교 재학시절 전국대회에서 단 한차례도 결승에 진출하진 못하지만 이원녕의 실력은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고3 9월에 벌어진 서울시 고교야구 연맹창립기념대회에서 이원녕이 이끈 중앙고는 이원녕의 투타에 걸친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마지막 대회인 황금사자기 고교야구에서는 선린상고가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 대회에서 투타에 걸쳐 활약한 이원녕은 대회 감투상을 차지하면서 고교시절을 끝내게 됩니다.
실업야구의 별로
이원녕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상업은행으로 스카웃이 됩니다. 고교에서와 달리 투수를 그만 두고 방망이질에 집중하게 됩니다. 고교야구에서는 단 한차례도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이원녕은 실업야구 무대에서는 훨훨 납니다. 데뷔 첫 해 부터 무려 10년간을 올스타에 선정되는 실력을 과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데뷔 첫 해에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우승팀인 롯데 오리온스 팀과의 한일 야구대회에도 실업대표 26명중에 선발되기도 합니다. 육군 복무시절엔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의 대표로 선발되는 등 이원녕의 실력은 여전히 빛났습니다.
그렇게 실업야구의 주역으로 활약하던 그에게 최고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78년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금융단과 실업단으로 구분하는 정도였지만 포항제철, 롯데, 한국화장품 등이 실업야구로 뛰어들면서 세미프로야구를 지향했던 실업야구는 전 팀이 더블리그를 펼치며 110경기의 리그전을 펼칩니다. 이 대회에서 이원녕은 158타수 61안타로 3할 8푼 6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당시 연속경기 안타는 당시 한국화장품 소속의 정구왕(경북고 출신, 프로팀 삼성라이온스, 삼미 슈퍼스타즈)이 가진 29게임이었습니다. 이 리그전의 마지막 경기에서 이원녕은 24게임 연속안타를 기록합니다. 이듬해로 넘어가면서 이원녕의 연속게임 안타 기록은 이어집니다. 결국 31경기까지 이어진 연속안타 기록은 79년 6월 포항제철과의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면서 멈추게 됩니다. 이 기록은 1999년 롯데 자이언츠의 박정태가 기록한 31경기 연속안타 기록과 타이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4년이 더 지나 박종호선수가 이 기록을 훌쩍 넘어서 3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게 되면서 이원녕의 연속안타 기록은 과거사로 묻히게 됩니다.
물론 이원녕과 박종호의 기록은 두 시즌에 걸친 기록이었고 박정태의 기록은 단일시즌에 기록한 연속안타라는 점에서 그 평가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앙고 감독시절의 이원녕(사진 오른쪽 두번째). 장명부의 지도를 받는 모습
프로무대를 외면하다
이원녕의 막바지 피크는 이듬해에도 이어집니다. 시즌 전 약한 전력으로 분류되었던 상업은행은 에이스 하기룡과 타격 1위 이원녕, 그리고 신인인 1루수 신경식(나중 OB베어스소속)의 화끈한 타격을 앞세워 팀 타율이 3할을 넘어서는 맹활약으로 예상을 뒤엎는 선전을 이어갑니다. 상업은은 결국 실업야구 4차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해 코리언 시리즈 진출권을 따냅니다. 상업은은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결승 리그 최종일 경기에서 성무를 3-1로 격파, 3전 전승으로 75년 추계 리그 이래 4년 만에 패권을 차지한 것이죠. 4차 리그 최우수상은 상업은의 구영석이 차지했으며 지난해 리딩히터인 이원녕(상업은)은 타율 5할8푼3리로 또 다시 타격상을 받게됩니다. 이렇게 실업야구의 별로 활약하던 이원녕에게 프로야구 탄생이란 소식이 들려옵니다.
당연히 MBC청룡과 OB베어스는 서울 출신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쓸만한 선수들을 리스트업하게 됩니다. 이원녕의 이름도 당연히 있었지요.
그러나 이원녕은 이미 자신의 실력이 실업야구 시절 한창일 때와 다름을 알고 프로야구 진출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로야구가 시작되던 해인 82년 3월 이원녕은 당시 톱가수인 정종숙씨와 극장식식당 월드컵에서 약혼 1년2개월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들 둘은 가수 장미화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사랑을 키워갔다고 합니다. 이들은 OB베어스의 김우열과 탤런트 김정하씨의 결혼에 이은 두번째 야구선수와 연예인의 결혼으로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원녕은 은퇴 후 모교인 중앙고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으나 이후 야구판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업에 뛰어든 이원녕은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서 가요계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수 정종숙씨가 1994년 동료가수 20여명의 곗돈을 갖고 미국으로 도주한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 칠레 미국 등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만 현재는 미국 시애틀의 린우드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좋지 못한 소식이 말미에 붙어서 좀 거시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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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벽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09 한야사에선 이원녕은 알겠는데 정종숙은 글씨요...가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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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카카c 작성시간 14.09.09 박정태선수 기록을 박종호선수가 갈아치웠다 정도만 알고있었는데..
이원녕선수까지 알기에는 너무 멀어요 ㅠㅠ
벽천님이 연재해주시는 그때 그 선수들 읽을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짧은 역사라고 하는데 모르는게 너무 많네요 ㅎ
매번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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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벽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0 이원녕의 연속안타는 아마추어 실업리그에서 작성된 것이고 박정태와 박종호는 프로에서 만들어진 기록이지요. 그러니 비교하기가 좀 그렇긴해요. 그리고 연속안타 기록도 단일시즌에 기록된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자세힌 몰라도 메이저리그의 연속안타 기록도 단일시즌 기록만 인정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