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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윤제술

작성자한풀|작성시간04.03.03|조회수874 목록 댓글 0
윤제술




선생은 1904년(甲辰) 음력 1월 29일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앙청마을에서 파평 尹씨 가문 아버지 永三, 어머니 나주 羅씨의 3남 3녀 6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는 구한말 망국의 기운이 감돌던 격동기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조작 국권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며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들어오고, 노일전쟁이 터졌던 것이 모두 그가 태어나던 해에 일어난 국제정세였다.
7살 때 동네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는데 다른 아이들은 한 달 걸릴것을 열흘쯤에 힘 안 들이고 떼었다고 하며 이어서 사자소학, 동몽선습을 배우는데 이것 역시 한 열흘정도에 끝을 내니 마을에서는 신동이나왔다고 했다 한다.
동네 서당에서 글씨를 배웠는데 이 또한 신필이라고 소문이 높았으며 5살 때는 전주로 나가 심농 조기석(心農 趙뚠錫) 선생에게서 2년동안 글을 읽지 않고 오로지 글씨만을 전공했다.
이 때 성가한 운필은 달인의 경지에 이르러 됫날 멀리 대만, 일본 등지에서까지 드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14살 때 이웃 요교리 여산 宋씨 가문의 17살 난 송이순(宋二順)규수와 결혼했는데, 나이가 3살 위인 신부였다. 그의 처가는 전북이 낳은 서예대가 강암 송성용(剛庵 宋成鏞) 선생의 손위 종매(從妹)가 되니 강암은 제술의 4촌 처남이 된다. 결혼 후 그의 선친은 그를 처가로 보내서 공부를 하게 했다. 이른바 요교리는 문촌(文村)이었고 그의 처숙이자 강암의 선고장인 유재 송군장(유재 宋君章) 선생이 문필가로 이름난 큰 선비였기에 그 문하에서 글을 읽게 하셨다고 한다. 이 때에 비로소 유재 선생으로 부터 운재(芸齋)라는 아호를 지어 받았다.
처가에서의 생활 1년을 마치고 다시 본가로 돌아온 운재에게 일생의 전기(轉機)가 될 당대의 거유 전간재(巨懦 圈艮齋) 선생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재는 나이 15살 때 당시 계화도(界火島 : 지금의 부안군 계화면)에 칩거하고 있던 간재 선생의 문하에 들어 소학(小學)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뒤 2년 반쯤 되었을 때 3 · 1운동의 만세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온 뒤로 개화의 물결은 서해의 파도를 넘써 이 외딴 섬에도 더욱세차게 밀어 닥쳤다.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운재는 계화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82살의 노스승과 17살의 새파란 소년과의 작별이었고, 운재의 입장에서는 구학문(舊學文)과의 작별이기도 했다.
됫날 신학문을 하여 호남의 명문인 이리 남성고등학교(南星高等學校)의 초대 교장이었던 그는 교단에서는 해학과 기지로 현역 정치인 시절엔 비정에 대한 질책과 독재아 대한 독고어린 질타로 일관했으며 정계 은퇴 후에는 노절난(老節難) (사람이 늙어 절개를 지키지 못하면 어려움과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이란 좌우명대로 지조와 기골로 깨끗하게 일생을 마친 원로 정치인이었다.
4, 5, 6, 7, 8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뤘고, 민주당 정권시절에는 문교위원장을, 7대 국회에서는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일이관지, 유성(一以貫之, 惟誠) 등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처럼 6선의 오랜 의정활동에서도 문교 문공위원으로만 일관했고, 철저히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몰두해 온 골수 야당인이기도 했던 운재 윤제술(芸齋 尹濟述)의. 족적을 대강 기술해 본다.
2. 신학문(新學問)과의 만남
신학문을 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다. 갈 곳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가면 어떤 친구가 있겠지 하는 막연찬 기대속의 상경이었다. 1년여를 보내고 나서 이듬해 중동학교(中東學校)에 들어가기로 하고 입학시험 전날 상투를 잘랐다.
14살 때 장가들면서 틀어 올린 상투를 21살에 잘랐으니 8년간이나 머리 위에 畿고 다닌 상투였기 때문인지 상투가 툭 떨어지니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당시의 중동학교는 보통학교 과져올 이수한 학생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 과정인데, 서당 물림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중동학교 3년 수학 후 자격시험을 치러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제도 때문에 1년을 독학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운재는 됫날 「내 일생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이라 했고 「공부답게 공부한 시절」이라고도 했다.
1925년 운재의 나이 22살 때 현해탄을 건너가 당시 일본 학생들도 들어가기가 어려워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동경고등사법학교를 지망하여 입학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운재가 동경친사(東京高師)에 입학하여 영문과를 택했는데 그것은 세상 나온 보람을 찾아보자는 뜻이 었다고 한다. 한문에 대해서는 간재 선생 문하에서 2년 반을 배워 한문에 상대될만한 것은 영문학이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 동양을 대표할 만한 학문과 서양을 대표할만한 학문을 갖추어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동경고사 영문과 재학 중 영문학 뿐만 아니라 일본 소설, 수필 등을 많이 읽었다. 운재는 이러한 폭넓은 독서를 통해 새로운 문물에 접하고 그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그 때까지 봉건사상에 젖어 있던 운재의 가슴을 발랄한 자유주의 사상이 확 열어 주었으며 자유사상이 준 감동이 운재의 인생을 새로이 눈뜨게 했고, 이것은 운재의 인생에 중대한 변화를 준 계기가 되었다.
3. 교직 (敎職)에 몸담고
일제 때 사범계 학교를 졸업하면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교편을 잡도록 되어 있었다. 동경고등사범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경고사를 졸업하자 주임교수의 추천으로 일본 아끼다현(縣)의 어느 중학교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중동 시절의 은사 최규동(崔奎東) 선생으로부터 모교로 오지 않겠느냐고 초빙이 왔다. 동경고사의 주임교수는 여간해서 얻기 어려운 자리이니 아끼다(秋圈)로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강력히 권유했으나, 오래 떠나 있으니 고국이 그리워 중동학교 초빙을 수락했다.
중동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는데 꼬박 10년을 근속했으나 학교의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경영주의 자세가 마음에 안 들어 별로 추억 거리가 없던 때였다고 운재는 술회했었다. 이 때는 1940년을 전후한 시기이므로 중일전쟁이 한창이었고 태평양전쟁을 목전에 두어 모든 것이 전쟁 분위기로 횝싸여 들 때였다.
1938년에는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지원병 제도가 생겨서 온갖 물자를 공출시키고 한국청년들을 전선으로 끌어가기 시작했으며, 1939년에는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다 하여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歆名)을 시키고 조선, 동아, 양대 민족신문을 강제적으로 통제하고 검열하여 발간시키고 국어 사용을 금지시키던 시절이었다.
운재가 중동을 떠나 보성(普成)으로 옮길 무렴은 세기적 격동기였고 성남(城南)으로 옮겼을 때는 일제의 가혹하고 악랄한 최후의 발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으니 학교 교육인들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1939년 운제의 나이 36살 때 보성으로 옳겼으며 보성에서는 3년 남짓 근무했다. 보성시절의 제자로는 조선일보의 방우영(方又榮) 회장, 현대자동차 정세영(郵世永) 회장, 국회의원 이중재(李重載), 평민당 최영근(崔泳灐) 부총재 등이다.
39살 때 보성에서 성남으로 옮겼다. 성남에서는 2년여 근무한 뒤 교두(校頭)인 김석원(金錫源)씨가 당시 영어과목 선생이자 교감인 운재에게 일제의 지시를 받아 영어과목을 폐지하라고 해서 강력히 항의하다 2년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4. 이리 남성고등학교 교장시절
1945년 대동아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서울시민들을 시골로 피난 시켰다. 운재도 이삿짐을 꾸려 고향으로 내려와 날마다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던 중 해방을 맞아 서울로 갈 준비를 하다가 장티프스로 50여일간 생사의 고빗길에서 다행히 회복되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운재의 나이 42살이었다. 그 해 10월 중순쯤 춘전 이춘기(春閼 李春基)씨가 찾아왔다. 이리에 중학교를 설립했으니 와 달라고 했다.
전주 갑부 백인기(白寅基)씨의 미망인 이윤성(李潤成) 여사가 사재를 내놓아 설립한 학교인데, 이 때 이춘기씨는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춘기씨는 재단도 튼튼하며, 호남 굴지의 명문학교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갖고 시작한 학교라 학교장의 적임자를 찾고 있는터에 그때 익산군수로 있던 운재의 집안 분에게서 운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운재는 우리 나라에 몇명 없는 고사(高師)출신에다 더구나 영어가 득세하던 시기에 영문과 출신이며 15∼16년의 교직경력에 교감도 거쳤고, 추천하신 분도 믿을만 하고, 한학도 조예가 깊고, 글씨도 보통을 넘는 솜씨라 하니 이춘기씨가 세 차례, 이윤성 여사가 직접 한 차례 찾아왔었다. 그래서 운재는 큰 아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시는 선친의 뜻도 저버릴 수 없어 이춘기씨에게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한 후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부임하기로 했다. 조건이란 교장에게 인사권을 주고 재단에서는 간섭하지 말것 또 하나는 교직원의 처우에 전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조건들이었다.
이리하여 교장으로 부임한 후 선생들이 가르치는 것을 눈여겨 감독했으며 수업시간 중에 불쑥 교실에 들어가 참관하는 것을 예사로 하다보니 부실한 수업이 있을 수 없었다. 대신 선생들의 보수는 다른 곳 보다 훨씬 많이 주어 잘 가르치게 하니 날로 좋은 학교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따라서 「남성」은 몇 해 안 가서 명문학교로 부상하게 되었고 이제 호남의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남다른 운재의 혜안과 집념의 결실이었다. 운재는 남성의 초대교장으로 부임한 후 8년여를 남성에서 근무했다.
어느 날 교직원 회의에서
"우리학교는 신설학교로서 아직까지 교훈이 없으니 교훈을 만들어 학생들을 교육시켜야 한다. "
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운재는
"교훈, 그것 있어야지요. 내가 교훈이요. 교훈이 걸어다니지요"
교직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운재는 스스로의 언행, 교육관 하나하나가 모두 교훈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학생들은 운재가 멀리서 오면
"야./ 저기 교훈이 걸어온다. "
하고 서로 농담을 나누었다.
5. 정계입문(政界入門)
운재는 8년여의 남성 교장을 끝으로 교단생활을 떠났다. 그 때가 1954년 운재의 나이 51세였다. 29살에 중동학교에 첫 발을 디딘지 22년이 되는 해였다.
국회로 나가자면 국회의원에 당선돼야 하는데, 그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가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춘전 이춘기씨가 2대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했을 때 운재가 선거사무장으로 선거란 것을 다루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당선 가능성이 있는지 고향 여론을 모았다. 그랬더니 윤(尹)아무개가 이 고장 출신인데 서울서 내려와 이리에서 남성 교장으로 이름을 얻고 있다는 소문이 들 건너 김제에까지 전해져 있었다. 그래 생판 무명지사보다는 유리할 것 같기도 했고 될성도 싶었다. 마침내 김제을구(金堤乙區)에서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막상 부딪쳐 보니 겉보기와는 달리 어렵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입후보자 8명이 나름대로의 비젼을 내세웠는데 운재 후보는 말하기를
"지금 우리 나라에는 두 개의 큰 정당이 있는데, 이것은 지게에 진 짐이다. 짐을 받치려면 작대기가 필요한데, 나는 무소속으로서 그 작대기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나왔다" 고 했다. 그래서 유세장에 가면
"저기 작대기 왔다. "
고들 했다.
5월 20일 투표가 실시되었고 김제을구 8명의 후보 중에서 운재가 당선되었다. 운재의 기호가 끝번이었는데 차점(次点)과 근소한 표 차이였다. 운재의 당선이 발표되자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씨가 비서를 보내서 당선을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김제갑구(金堤甲區)에서도 무소속의 송방용(宋邦鏞)씨가 당선되었다.
1954년 6월 9일 제3대 국회가 개원되고 운재는 농림분과를 택했다.
교육자 출신이 왜 농림분과를 택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운재는 농촌출신이니까 농촌문제에 좀 관심을 가져보고 싶었고, 또 농림분과에 있어야 선거구에 이롭겠다 싶어서 농림분과를 택했다.
또 한 가지 광활면의 방조제가 터져서 그 곳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어서 그 방조제를 다시 막아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농림분과를 택한 이유였다. 결국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둑을 다시 쌓았으며 농림위원 1년만에 문교분과로 옮겨 6선하는동안 줄곧 문교위원으로만 있었다. 급한 불만 끄고는 운재의 길로 되돌아온 것이다.
운재가 무소속 초선 의원으로 활약하던 시절 정국은 그야말로 흔란과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1954년 말의 세칭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騫) 대통령에 출마했던 해공 신익희 후보의 급서(急逝) 등 자유당의 말기적증상이 서서히 드러나던 그러한 시기였다.
「운재와 해공」 (芸齋와 海公)
운재와 해공 신익희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운재가 남성 교장으로 재직할 때 해공이 강연차 이리에 간 일이 있었다. 이리지방의 유지들이 모인 자리라 해공과 운재는 자연스럽게 만났다. 해공은 운재가 한학과 서예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리를 남성 교장실로 옳겨 서로 한시도 짓고 붓글씨도 썼다. 이 때 해공은 운재의 글씨 솜씨에 놀랐다고한다.
그 해 겨을 사사오입개헌 파동이 있었고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어 해공과 운재는 함께 호헌동지회 소속으로 싸웠다.
계속 무소속으로 있으면서도 그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운재는 김제 선거구에서 지원유세를하고 있을 때 해공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해공으로 하여금 기필코 정권교체를 이룩하도록 힘을 쏟았다가 비보를 듣고는 나라 앞날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고 한다.
"왕손은 귀불귀(王孫歸不歸)라 춘초는 연년록(春草年年緣)이라고 해공은 갔습니다만 해공이 뿌리고 간 참된 민주주의의 열의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무성하게 꽃 피을 것이오,"하는 운재의 강연에 청중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때 정당으로는 집권 여당인 자유당, 제1야당인 민주당, 그리고 혁신 정당인 진보당이 있었다. 이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운재의 성향에 맞지 않아 보수정당을 택하다 보니 민주당 밖에 없었다. 이것이 운재가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 연유이며 9월 27일 입당성명을 발표했다.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지들을 남겨두고 옛 무(成)자리를 떠나고자 하매 한가닥 미련이 남는다마는 그러나 나의 전선 이상없으리라.!"이 입당성명은 그 당시 언론계의 화제가 됐고 정치인들도 그 문안을 얻기에 진땀을 흘린 일이 있는 불후의 명문장이었다.
1956년 9월 28일 운재가 민주당에 입당한 이튿날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대표 최고위원으로 조병옥(趙病玉)씨가 선출최었는데, 이 대회장에 참석하고 퇴장하던 장면(張勉) 부통령이 권총 저격을 받아손에 부상을 입은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에 대하여 국회에서는 10월 1일부터 장면 부통령 피격사건에 관한 진상질의를 벌였고, 1957년 1월23일 운재는 민주당 동료의원들과 이익흥(李益興) 내무부장관의 불신임안을 발의하고 제안 설명을 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 갔다. 초선 의원으로서 가냘픈 몸매에 백발을 머리에 인 운재였다.
"민주당 윤제술이올시다. 김상붕이가 쏜 담담탄은 행인지 불행인지 장면 부통령의 왼쪽 손을 관통하고 말았지만, 이익흥 내무부장관,! 백발이 성성한 윤제술이가 쓰는 국민의 심판탄은 그대의 가슴팍을 꿰뚫을 것 이 오.!" 대갈일성에 이(李)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2층 방청석과 아래충 의석에서는 낮은 감탄사가 일제히 터졌다. 의회정치의 진면목이었고 오래 기억될 명연설이었다.
6. 김제에서 재선(再選)
운재는 3대국회 임기를 마치고 4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자유당은 말기적으로 치닫고 있어 정권을 지탱하려면 부정선거를 하지 않고는 단 몇 석도 얻기가 힘들게 보였다. 이승만(李承晩)대통령도 종신집권의 야욕에 앞뒤를 가리지 않았고, 모든 권력은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西大門 景武臺) 이기붕(李起鵬)의 지휘를 받기 시작 할 무렵 이 었다.
초선 의원으로 50이 넘어 국회에 들어간 운재는 해박한 지식과 천부의 연설솜씨로 일약 선배 정치인들을 앞질렀고 때로는 투사로 때로는 선비로 정가의 주목을 받았다.
1958년 5월 2일 선거를 앞두고 인사장을 보냈다.
"여러분이 꼭 찾아 데려 오라던 춘향이는 못 데려 왔지만 춘향의집 번지는 알아 놓고 왔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글귀였다. 그 때 선거부정은 극에 달했으나 민의는 윤제술에게 모아져서 4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3대 때는 초선이었지만 박식과 능변으로 일약 중진정치인으로 부상했으니 김제을구 유권자들은 운재를 무척 아꼈고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표차로 당선시킨 것이다.
1958년 6월 7일 개원한 국회는 의장단마저도 자유당이 독점하는 등의 막다른 조짐이 보였다. 마침내 자유당은 언론, 출판, 결사, 정치인들의 연설 내용까지 규제하려튼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내 놓았고 야당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 붙이기로 작정한 자유당은 그해 12월 24일 무술경위를 동원 야당의원을 끌어내고 자유당만으로 본회의를 개최,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하였다. 그래서 전국에서 차출되어 임시 경위로 임명된 무술경관들이 본회의장을 점거 농성하고 있는 야당의원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냈다. 몸이 약한 운재 옆에는 젊은 의원 몇이 포위하고 있었다. 무술경위는 아랑곳없이 운재에게도 다가와 끌고 가려고 했다. 운재는 소리쳤다.
"네 이놈들, 잡아 가려면 잡아가라.! 나를 끌고 가면 송장 치을 것다. "
건장한 무술경위들도 큰 소리로 고함치는 운재의 위엄 앞에서 움찔했다. 그러나 결국은 운재도 지하실에 갇힌 채 악명 높은 신보안법은 자유당만으로 통과되었다.
정국은 경직된 그대로 그 해를 넘겼고, 이듬해 4월 경향신문(京鄕新閒)이 강제 폐간되고, 7월 31일에는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씨가 처형되는 등 정국은 계속해서 어수선하기만 했다.
1960년에 시행될 정 ·부통령 선거에 민주당은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씨를 지명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문제로 도미(渡美) 치료해야 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미국으로 떠나게 된 유석은 당시 선전부장이던 운재에게 그냥 떠날수는 없으니 몇 마디 적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짤막한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낫는대로 지체없이 돌아 오겠다"는 유석의 마지막 성명서이다. 그러나 낫는대로 돌아 오겠다던 유석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그 해 치러진 3.15 정 ·부통령 선거는 우리 헌정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되어 4.19를 유발하고야 말았다.
7.제2공화국과 운재(芸齋)
4.19의거로 인해 자유당 정부는 몰락하고 허정(許政)씨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탄생되었다. 결국 4대국회는 겨우 2년 2개월을 채우고 막을 내렸다. 과도정부에서의 국회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1960년 7월 29일 개정된 헌법에 따라서 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집권을 목전에 두고 실시한 선거였다. 선거분위기는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작대기도 된다는 여론이 지배했다. 그런데 민주당의 고질인 신 ·구파의 싸움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해서 분당(分黨)의 위기로까지 몰아 가고 있었다. 이런 때에 운재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김제을구에서 세번째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해 8월 8일 5대국회가 개정되었고, 운재는 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의원 233석 중 민주당이 177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둔 선거였으나 너무 많이 당선되다 보니 당이 신 ·구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신파는 민주당의 간판을 메고 여당이 되고 구파는 신민당이라는 간판 밑에서 야당이 되었다. 운재는 신민당의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1월에 들어 시 ·도지사 직선도 했고 도의원 선거도 해서 겉으로는 제법 민주제도가 착착 자리잡아 가는 것 같았으나 정국은 불투명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8. 5 · 10 군사혁명
정계는 민주당이 신 ·구파로 갈라져 구파는 신민당을 만들고 신파인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노소장(老少壯)으로 갈라져 사분오열되고 학생과 민중들은 걸핏하면 데모를 해서 정국은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곧 쿠테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는데, 마침내 1961년 5월 16일 새벽 운재의 집에서 들었던 총소리가 그대로 쿠테타가 되고 말았다고 운재는 후일 회고했다.
정권은 군사혁명위원회의 손으로 넘어가고 장면 내각은 총사퇴하여 헌정이 중단되었으니 국회는 자연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5대국회는 1년도 돗 채우고 9개월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4대와 5대 합해도 임기가 3년이 못 되는 격동의 연속이었파. 운재는 이즈음 은둔하여 바둑도 두고 낚시도 하면서 1년 남짓 정관(靜觀)하고 지냈다. 그 때 자동차 휘발유를 외상으로 쓰고 재촉받았던 일이며 국회에서 세비를 많이 가불해서 혼났던 일 등이 1년여 기간의 씁쓰레한 추억이라고 운재는 후일 회고텖다.
정치정화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구 정치인들을 묶어 놓고 1차, 2차로 나누어서 풀어 주었다. 운재는 1962년 5월 30일부터 묶였다가 이듬해 2월 25일에 풀렸다. 1년여의 재야생활을 하는동안 구정치인 대부분은 안국동 윤보선(尹潽善)씨 집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의 거취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63년 가을 민정이양(民政移讓) 첫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민정당 후보 윤보선씨와 육군대장의 군복을 벗고(8월 30일) 후보로 나온 박정희 (朴正熙)씨 의 대결 이었다.
박정희 : 윤보선 두 후보의 첫번째 대결에서 운재는 윤(尹)후보의 참모장 격으로 해위(海葦)의 선거전략과 지원유세를 도맡다시피 했다.
1963년 10월 초 윤후보와 함께 여수에 내려간 운재는 구름같이 모여든 청중을 앞에 하고 단상에 올랐다. 깡마른 체구에 백발은 마침 불어오는 해풍에 휘날렸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종고산(鍾鼓山 : 여수시내에 있는 산)에 물어보자. 진국 명산이 너 아니더냐? 너는 몇 해 전에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이다. 그 때 그 장본인을 너는 똑똑히 보았으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하고 있으며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말해라. 쇠북종(鍾), 북고(鼓), 과연 너는 민주주의 전진의 북을 울릴 것이냐, 아니면 이 나라의 조종을 칠 것이냐? 시원 하게 대 답하라."
멀리 종고산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했다. 우뢰같은 박수가 터졌다. 이 연설이 그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상논쟁의 기폭제가 됐다. 여순반란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을바른 역사를 써야 한다고 운재는 주장했던 것이다.
목포로 여수로 서울로 할 것 없이 지원유세를 다녔다. 운재는 그것을 소 팔러 다닌다고 했다. 소장사 이야기는 목포 유세 때의 조크였다. 내가 여기 어찌왔느냐 하면 나는 이른바 구정치인인데 이름은 윤제술이 아니라 구악이라고 자기 소개를 한 다음, 일 잘할 든든한 소 팔러왔다며 윤(尹)자가 소 축(丑)자 같대서 흔히 소라고 놀리는 말을 써 먹은 것이다. 결국 이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인 15만 표 정도로 지고 말았다. 조직과 자금 모든 짜임새가 없는 싸움을 나이 60줄에 오로지 혀(舌) 하나로 어떻게 싸웠는지 신기하다고 운재는 후일 회고했다.
9. 제6대 총선과 원내총무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 실패한 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들어갔다. 운재는 3, 4, 5대에 걸쳐 김제을구에서 당선되었는데 갑(甲) 을(乙)구가 합해져서 김제군이 하나의 선거구로 바러었으니까 갑구의 조한백(趙漢栢)씨와 을구의 운재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갑구의 조한백씨가 정정법(政溥法)에서 먼저 풀려 당대회를 열어서 지구당 위원장이 되어 있었으니까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었다. 같은 민정당 소속인데 운재가 늦게 풀렸으니 운재가 딴 데로 옮겨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서대문 당원들이 찾아와서 서대문구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유리하니 서대문 을구로 오라고 해서 선거구를 옮기게 되었다.
서대문에서는 거물과 맞부딪쳤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최규남씨가 공화당 공천을 받고 나온 것이었다. 김제에서는 자유당 때문에 애를 먹었는데 서울은 서울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운재는 본시 선거에는 겁이 없었다. 6선하는동안 안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운재는 결국 당선되었다. 김제에서는 조한백씨가 떨어지고 장경순(張坰淳)씨가 당선되었고, 서대문 갑구에서는 김재광(金在光)씨가 당선 되었다.
6대국회 원내의 의석 분포는 민주공화당 110석, 민정당 41석, 민주당 13석 의 순이 었다.
제1야당인 민정당의 당수인 해위는 부의장 2명 중 야당 몫인 부의장에 운재를 지명했다가 나용균(羅容均)씨로 바꾸었으며 대신 운재에게는 원내총무를 맡아 달라고 해 나라일 하자고 국회에 나와 있는데 필요하다면 하마고 응락을 해서 총무서리가 되었다.
공화당의 강압정치가 강도를 더해갈 즈음 민정 민주 양당이 통합 1965년 초여름 민중당이 되었다. 그 해에 6.3사태가 벌어졌다. 그 전 해인 1964년 봄 김종필(金鍾必)씨가 일본 외상 오오히라(大平)와의 사이에 한일회담(韓日會談)을 진행해 왔다. 그것이 1965년 3월 들어 정치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5월에는 대일굴욕 외교투위(對日雇辱 外交鬪委)가 구성되고 민중당은 한일협정 체결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다.
만일 이 협정이 맺어지면 국회의원직을 사직하겠다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반대연설을 했다. 그러나 한일협정은 6월 22일 동경에서 조인되고 말았다.
한일회담이 타결되고 야당인 민중당은 둘로 갈라진다. 사퇴키로 배수의 진을 쳤던 야당의원들 중 사퇴를 결행한 8의원(尹潽善, 金度演, 徐珉豪, 尹濟述, 鄭一亨, 鄭成太, 鄭海永, 金在光)을 제외한 박순천(朴順天),유진산(柳珍山) 등 많은 등원파는 지도노선이 잘못 됐다는 궁색한 명분으로 원내에 들어가고 사퇴파 8의원을 중심으로 신한당을 창당한 것이다.
딴 살림으로 갈라선 두 당은 선명논쟁과 당세확장을 위해 치열한 싸움을 했다. 신한당은 윤보선을 당수 대통령후보로, 민중당은 박순천을 당수에 마땅한 대통령 후보감이 없어 현민 유진오(玄民 兪鎭午)를 영입했다.
운재는 어느날 시국 강연을 하기 윈해 전남 구례지방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장날이라 청중들이 많이 모였다. 이 때 광주 출신 김록영(金祿永)이 사회를 맡았다.
"며칠 전 이 곳에서 민중당 유모씨를 선비 정치인이라고 소개했답니 다. 그런데 여기 진짜 선비 한 분이 오셨습니다. 이번에 국민과의 약속대로 의원직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국회를 뛰어 나오신 운재 윤제술을 소개 합니다. "
운재가 뒤이어 등단
"김동지가 나를 선비라고 소개했는데 나는 선비도 아니고 지지리 못난 사람이요. 진짜 선비는 이 고장 출신 매천 황현(梅泉 黃球) 선생이요, 나는 매천 선생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이 고장에 사시는 여러분도 존경합니다." 박수가 그칠줄 몰랐다.
1967년은 제6대 대통령 선거(5.3선거)와 제7대 민의원 선거가 있는 해였다. 선거가 다가오니 야당통합을 요구하는 국민여론에 따라 두 당을 합쳐 신민당을 만들게 되었다. 1월 24일 야당통합 사자(尹潽善, 兪鎭午, 白樂濟, 李範奭)회담이라는 것이 열렸다. 여기서 야당통합이 합의되어 유진오 당수에 윤보선 대통령 후보로 골격이 짜여졌다.
5.3 대통령 선거에 패한 뒤 운재는 역시 서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운재는 3, 4, 5대는 고향인 김제에서 6, 7, 8대는 서을 서대문구에서 각각 당선됐다. 5.16직후인 6대 때는 공화당에서 문교부장관을 지낸 최규남(崔奎南)을 내세웠지만 무난히 물리쳤고, 7대 때는 젊은 오모(吳某)라는 후보를 내세웠는데 고향이 전남미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사람이었다. 공화당은 서대문 을구에 호남사람이 많이 살고 운재는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노인이기 때문에 40세 전후의 오(吳)후보를 여러가지로 배려한 끝에 내보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선관위에서 준비하는 합동연설회의 연단을 사다리로 을라 가게끔 높게 만들어 놓았다. 나이 들면서 걸음걸이가 비실비실했던 운재로서는 단상에 오르기가 약간은 고역이었다. 그런데다 오 후보는 연설 때마다 젊음을 내세워 늙은사람에게는 나라일을 맡길 수 없다고 역설했다. 오 후보는 소리쳤다.
"여러분,! 노인은 곧 갑니다. 투표 잘못하면 또 한번 해야합니다.(재 선거의 뜻)정신 똑바로 차리고 투표합시다. " 다음 차레 단상에 기어 오른 운재는 목소리를 높였다.
"젊은 후보가 나보고 곧 간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기는 어디로 가 의사당으로 가지. 구부러진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윤제술이는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의사당으로 갑니다. "
환호와 박수가 뒤범벅이었다.
10. 국회 부의장
등원협상으로 진통을 겪다가 1968년에 들어서야 신민당 의원들이 등원하면서 국회는 반년만에 기능을 되찾았다.
당대표인 현민 유진오씨가 운재를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으로 지명했다. 1968년 6월 7일의 선거에서 운재는 100표를 얻어서 부의장에 선출되어 만 2년간 재임하고 다음 바톤을 정성태(鄧成太)씨에게 넘겨 주었다. 운재는 국회가 늦게 열리는 바람에 임기를 다 채워서 정성태씨는 10개월도 채 못하게 되었다.
11. 10월 유신(維新)
제8대 국회의원은 임기가 겨우 1년 3개월로 끝나 버렸다. 「10월유신」이라는 것으로 국회를 해산해 버렸기 때문이다. 운재는 3대 때부터 시작하여 8대까지 6선의원을 지냈으나 임기를 통산하면 14년 2개월에 불과했다. 정상이었다면 24년 했어야 될 것이 그리된 것이니 얼마나 파란 많은 격동기에 정치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12. 정계은퇴(政界隱退)
1973년 민주통일당에 참여하여 그 해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신 운재는 사실상 정계를 떠나게 된다. 이른바 유신체제를 선포한 박(朴) 정권은 유신집권의 길로 접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서 무소불위의 권능을 휘둘렀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변이었다. 그 선거는 투표와 당선이 무관한 선거였다고 흑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계의 거물급 인사가 모두 낙선한 것이다. 운재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6선을 한 운재가 처음 낙선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뒷날 운재는 그 때를 회상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13. 운재의 마지막 연설
1983년 7월 7일 서을 우이동 옥류정에서 운재의 후학들이 80회 생신을 기리기 위하여 '운재 윤제술 선생을 모시는 모임'을 마련 수연을 베풀었다. 운재가 타계하기 3년 전의 수연에서의 마지막 인사말을 옮겨본다.
"본인은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집도 못 짓고 또 제 구실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전 한 글귀가 있는 것을 늘 기억합니다. '오, 사람이 제 구실을 못하면 어찌 일찍 죽지 않느냐' 하는 것이요. 그 소리가 나에게 적당하게 붙여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까지 산 것은 바로 말하자면 밥을 굶지 않고 먹으니까 사는 것이지 그 외에는 아무 살 가치가 없숩니다. 그런데 십 수년 전부터 다리가 부러져 젊은 남녀들이 좋아하는 디스코 댄스에도 한 번 못 가고 어디든지 맘대로 짱짱거리고 돌아다니던 몸이 이제는 뜻같지 못해서 결국은 사람의 신세를 입어야만 손을 잡고 화장실도 가게 되니 이게 사는 도리가 아니요.
그런데 다만 오늘날까지 이 영광을 보려고 그렇게 구차하게 살아 왔던가. 또 그럭게 짓눌려서 억울하게 살아 왔던가 생갈됩니다. 오늘의 영광을 내가 입은 뒤에는 내일 어떻게 될 것인고‥‥‥ 다만 여러분이 나보고 오래 살라, 오래 살라 하지만 이것은 욕입니다. 그저 내가 숨붙여 사는 동안까지는 다정한 벗님네들 혹간 찾아 주신다든지 전화라도 걸어 주시면 그것이 나의 오늘날의 바람인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아까도 팔자 얘기도 하고 그랬지만 팔자가 좋으면 윌 하나, 가면 그만인데. 그렇다고 내가 죽음의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지만 더 살 고 싶은 마음도 그렇게 왕성하지 못해요, 오늘 좌우간 이렇게까지 참 알뜰한 벗님네가 원(遠)거리 바쁘신데 찾아 주시니 이 영광을 윤제술이가 차지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아셨다면 '자식 잘 두었구나'하고 칭찬을 해 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이 이상 만족이 없으며 다시 여기서 더 하나 말을 이를 것은 이 식(式)이 너무 지루합니다. 이렇게 지루해서야 모처럼 윤제술이가 잔치를 한다면 또 오기나 하겠습니까 그저 속히 여러분을 해방 시켜 주는 것이 내 인사의 도리인 줄 압니다. "
14. 호 운재(號 芸齋)
아래 글은 운재에 대해 어느 잡지에 기고했던 글인데 그대로 옮겨 본다.
"내 별호는 좀 까다롭다 글자가 '예(藝)'자의 약자와 비슷해서 '운(芸)'자를 예자로 부르는데 질색이다. 운재를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예재!"하면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고 과히 유쾌한 일은 못된다.
'운(芸)'은 향기나는 풀을 뜻한다. 중국 사람들은 향기가 좋아서 서재 주변에 이 풀을 심는데 이것은 향기뿐만 아니라 책의 좀을 막는 것이라서 책 속에 넣으면 나프탈렌으로 대용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이 풀을 보면 장서가의 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청나라 때 중국에 완운(玩芸)이란 문인이 있었다. 유명한 문인이라서 그 분을 사모하는 뜻도 있었고 젊었을 때 내 스승이던 송유재(宋裕 齋)라는 분이 지어준 것을 오래 간직하게 됐다. 나는 원래 '운재'란 호를 갖기 이전에는 백산(白山)이란 호가 있었다.
백두산에서 머리두(頭)만 빼고 백산이라고 했더니 백두산이 건방지게 뭐냐고 놀리는 바람에 두번째의 운재를 애용하게 된 것이다.
향기가 나고 좀을 막는 풀이 얼마나 좋은가? 별로 두드러 지지도 않고 모양있는 풀도 아니면서 은근히 그리고 좀을 막을 수 있는 그런 풀이 되고프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절실한 생각이다. "
15. 운재와 동빈(東演)
사학자 동빈 김상기(東濱 金庠基)와 운재는 김제 백산면 아래윗동네에서 태미났으며 둘다 만학이었다. 동빈은 백산 수각마을 태생이었고,운재는 석교리에서 태어났다. 둘이 모두 한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접하게 된 것은 결혼하여 이미 처자를 두고 나서였다.
동경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일요일이면 거의 매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술도 같이 들곤 하였다. 동빈은 그 때 와세다(旱稻圈)의 예과격인 제2고등학원에서 불문학을 공부하다 와세다 본과로 을라가서는 사학을 전공했고, 운재는 동경고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 때 동빈과는 동성지(同聖誌)라는 문학동우회지를 함께 펴내기도 했다. 동빈은 수재였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분야가 달랐지만 이화여전, 서울대 문리대 강단에 서서 투철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명강의를 했었다. 동빈은 착실하고 깨끗한 선비였다. 구차하게 이름을 찾아 헤매지 않았고 조용하게 자기를 지켰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남에게 바른 소리를 해서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한 번 틀리면 사람으로 알지 않고 붙여 주지 않는 학처럼 고고했다고 운재는 동빈 사후(死後)에 술회했다.
동빈은 동학(東學)과 동학란, 중국고대사 강요, 고려시대사, 동방문화교류사논고, 동방사론총 등의 명저를 남겨 우리 사학계에 커다란 업적과 공로를 남겼다.
운재는 동빈이 죽은 뒤 동아일보의 기고문을 통해 1977년 3월 24일 이렇게 회 고했다.
"동빈은 나 같은 문외한도 깨닫고 느낄 수 있는 사학에 관한 밝고 투철한 형안을 지니고 있다. 동빈은 청빈 속에서도 오로지 학문의 길만을 쫓고 닦다가 간 사람이었다. 평생을 집 한 칸 없이 지내면서 한권 두권 사 모은 만여 권의 장서를 기꺼이 기증할 수 있는 슬기와 용기를 지니기도 했었다. 참으로 우리 나라 인재 중의 한 분이 그리고 재주있고 아까운 선비 한 분이 세상을 떴다"
10. 운재와 서예(書藝)
운재는 아흡 살 때부터 글씨를 썼다. 2년동안은 전공을 했고 그 뒤에는 아주 떼지는 않고 드문드문 썼다.
심농 조우종(心農 趙友鍾) 선생 밑에서 해서(楷書)를 썼고 글씨는 먼저 해서를 익혀서 골격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골격을 세우면 그 뒤에는 어지간하면 제 나름대로 쓰는 것이다고 했다. 골격이 없는 글씨는 뼈없는 생선과 같다고도 했다. 붓만 잡으면 글씨가 되는 줄 알고 쓰는 사람을 보면 글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으며 한문도 모르고 글씨를 쓴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고 지적했다. 운재는 골격을 세운 뒤로는 붓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좋은 글씨를 글나면 눈여겨 보면서 지냈다. 운재는 일제시대 만주 봉천에 가서 글씨를 보고 글씨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학생들 데리고 수학여행에 가서 전시관에 걸려 있는 글씨를 보고 글씨란 과연 이래야 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거기서 중국의 근대 명필들을 보고 이것이 진필이구나 싶어 그로부터 글씨 보는 안목이 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글씨 쓴다고 손가락이나 꼼짝꼼짝하면 되는 줄 알지만 생각만이라도 올바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재는 정계를 떠나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씨를 많이 썼다. 국회의원하던 때도 조금씩 썼다. 누가 달라면 써 주기도 하고 빈번한 이합집산 속에서 새로 정당이 생길 때마다 그 간판은 도맡아 놓고 쓰다시피 했다. 운재는 구양순(歐陽詢)법첩, 황산곡 초서(黃山谷 草書)는 당승 희소를 특히 많이 본받으려고 했다. 그는 회소 스님의 글씨를 참 좋아했다. 운재의 글씨 골격은 한 마디로 지적하기는 어렵겠지만 구양순 해서에에다가 황산곡 체를 좀 가미한 것이다. 모방이 아너라 글씨 뜻을 따온 것이다. 그대로 써 가다가 자연히 한쪽으로 기울어 지더니 운재체랄까, 운재 특징이랄까 하는 것이 성립된 것이다.
운재는 항상 글씨에는 글씨 쓰는 사람의 개성이 들어 있어야 하고 인격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글씨는 뭐니뭐니 해도 많이 써 봐야 하며 덮어놓고 많이만 쓸 것이 아니라 고인의 글씨를 배우면서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17. 영원한 운재
1986년 7월 24일 운재는 서을 상동 자택에서 향년 83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영면했다.
운재의 부음에 접한 동아일보는 1986년 7월 25일 <송골학형(宋骨學形)의 외골 야당인>이란 제목의 글을, 동일자 한국일보는 (해학과 대쪽 성품의 선비 정치인)이라는 글을 각각 고인의 영전에 바쳤다.
8. 맺음말
이 글은 전북애향운동 본부에서 펴낸 「나라를 위하여 全北을 위하여」란 전북 인물지와 「운재선집(芸齋選集)」을 참고하였다.
■ 운재의 약력
o 1904년 : 갑진 3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159번지에서 아버지 윤광진(尹匡鎭), 어머니 나주 나씨(羅氏)의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파평
o 1910년 : 7세, 서당에서 한문 수학
o 1915년 : 12세, 심농 조우종(心農 趙又鍾) 문하에서 서도를 공부하다
o 1917년 : 14세, 송이순(宋二順) 여사와 결흔, 본관은 여산 o 1918년 : 15세, 간재 전우(艮齋 田愚) 문하에서 2년 반동안 한학을수학
o 1920년 : 중동학교에 입학, 3년간 수학하고 졸업한 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1년동안 독학
o 1925년 : 동경(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입학
o 1929년 : 동경고사 영문과 4년 졸업하고 모교인 중동중학교 영어 교사로 임명되어 그 후 10년 동안 재직, 보성중학교 교사,남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다 1945년 봉 교직을 떠나 향리에 내려가 쉬고 있을 때 해방을 맞다.
o 1946년 : 신설 이리 남성중 ·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
o 1952년 : 전국 사림중 ·고등학교장회 전북 회장으로 피선되어 사학발전에 노력 하다.
o 1954년 : 51세, 교직을 떠나 고향인 김제에서 제3대 민의원 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나서다. 무소속동지회, 호헌동지회, 다시 무소속으로 원내활동을 하다가 1956년 민주당에 입당
o 1957년 : 민주당 문화부장, 정책위원회 위원장에 피선
o 1957년 : 중앙교직보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퍼선
o 1958년 : 김제에서 제4대 민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
o 1959년 : 민주당 전라북도 당 위원장에 퍼선, 4.19를 겪고 1960년 5대 민의원 의원으로 김제에서 3선
o 1960년 : 민의원 문교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새로운 교육정책 수립에 많은 활약을 하다
o 1961년 : 민주당 구파 동지들과 함께 신민당을 창당, 야당투쟁을 벌이다가 5.16군사 쿠테타로 정치활동 정화법에 묶이다.
o 1963년 : 정치활동이 재개되어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중앙상위의장에 피신되다
o 1963년 : 서대문 을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
o 1964년 : 민정당 원내총무로 언론윤리위원회법과 학원보호법 반대의 원내 지휘를 맡음
o 1965년 : 한·일회담 비준에 반대, 국회의원직 사퇴, 한·일협정이 굴욕 외교라고 반대했음
o 1966년 : 의원직을 사퇴한 8의원과 함께 신한당을 창당하고 정무위원에 피선
o 1967년 : 신한·민중당을 합당한 신민당 창당에 참여
o 1967년 : 서대문 을구에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
o 1967년 :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등원을 거부한 신민당 협상대표로 합의의정서 발표(협상대표는공화당 白甫檍, 金振晩, 신민당 尹濟述, 金義澤)
o 1968년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국제회의 등에 참석 국위를 높였음.
o 1968년 :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어 의회정치의 민주화에 공헌하고 국회의원 파월장병 위문단장으로 월남을 방문
o 1971년 : 서대문 병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 신민당 정무회의 부의장 피선
o 1972년 : 유신체제 선포로 국회해산
o 1973년 : 민주통일당 창당, 최고위원에 피선
o 1980년 : 5 · 17사태로 국회, 정당해체
o 1983년 :후학들이 80회 생신을 기리기 위하여 「운재 윤제술」수연을 베풀다
o 1986년 : 3월 25일 부인 송이순 여사와 사별
o 1986년 : 7월 24일 서울 누상동 자택에서 영면, 향년 83세, 향리인 김제 백산면 대청 후록에 안장, 슬하에 3남 3녀를 두다. 志操로 일생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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