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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정리

프랑스 혁명

작성자dalcom|작성시간04.03.27|조회수69 목록 댓글 0

1789년 7월 14일부터 99년 11월 9일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 절대왕정(絶對王政)의 구제도(舊制度;앙시앵레짐)를 타파하고 자유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한 전형적인 시민혁명(bourgeois revolution)이다.


1 원인
혁명사상은 18세기 중반부터 C.L. 몽테스키외·M.A. 볼테르·J.J. 루소·D. 디드로 등에 의해서 싹트기 시작한 계몽사상이었다. 그 가운데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과 그 유기적인 결합을 주창하고, 귀족제를 살린 군주제를 이상으로 하여 루이 14세가 주장하는 절대주의를 비판하였으며, 루소는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개인이 계약에 의해 인격과 소유권을 양도하는 대신 평등한 공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국민국가(國民國家)를 구상하였다. 이같이 여러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절대왕정은 신분제 사회에 입각하여 국민의 2%에 지나지 않는 성직자와 귀족에게 면세특권을 주고 있었다. 그들 특권신분은 제 3 신분, 특히 85%를 차지하는 농민의 납세에 기생(寄生)하였고, 봉건영주들은 지대(地代)를 징수하였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후기부터 루이 15세 치세를 통해서 대외정책의 실패와 궁정생활의 낭비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치자 정부는 세금의 증가와 국채 발행으로 적자를 보충할 뿐 근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으므로 절대왕정의 기초가 무너지고 혁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774년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 국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는 위기를 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특권계급은 상층시민과 결탁하여 구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선량하고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었으나 국정을 개혁할 수 있는 굳은 의지와 결단력이 없었다. 그리고 왕궁의 권위가 루이 14세 시대에 비하여 매우 약화되었으므로 특권계급의 세력을 누르고 개혁을 단행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이고 중농주의 경제학자였던 A.R.J. 튀르고와 스위스 대은행가로 1776∼81년까지 재무장관이었던 J. 네케르 등이 재정 뿐 아니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궁정귀족(宮廷貴族)과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반동세력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또 미국독립전쟁을 원조하기 위하여 영국에 선전(宣戰)하였는데 그 결과로 다액의 국채를 발행하여 화폐가치를 폭락시켰으며, 게다가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 미국독립전쟁의 승리는 절대군주(絶對君主)와 특권계급의 탄압에 반항하는 프랑스 민중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므로 헌법제정과 자유평등을 주장하는 소리가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1789년에 이르러 대흉작 때문에 일어난 곡가(穀價)의 폭등과 국고의 지불정지로 초래된 재정계의 공황으로 국내정세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하여졌으므로, 루이 16세는 최후 수단으로 1614년부터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三部會)의 소집을 선언하였다. 성직자·귀족·시민으로 구성되는 삼부회 대표들을 선출하기 위해서 비교적 자유스러운 토론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이 많이 계몽되었다. 삼부회 의원들은 선거구의 여론을 대표하는 진정서를 가지고 집합하였는데 특히 제 3 신분에서는 입헌정부(立憲政府)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시민계급과 귀족 출신의 계몽주의자가 많이 선출되었다. 1789년 5월 삼부회가 베르사유궁에서 소집되었을 때 제 3 신분의 의원들은 그들만이 국민을 대표하는 참다운 의원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계급과 합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민의회를 구성하였는데, 귀족·성직자계급의 의원들도 점차 가입하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삼부 합동으로 헌법국민회의(憲法國民會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보수파 귀족의 선동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위협하였으므로 이에 극도로 분개한 파리 시민들은 7월 14일을 기하여 궐기하였다. 그들은 먼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고 범인들을 석방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시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치제를 실시하며 국민군을 편성하였다. 그 영향은 곧 지방에 파급되어 지방도시도 파리시를 모방하여 자치제를 시행하였으며 도처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영주·관리·어용상인·부자 등을 죽이는 등 무서운 사태가 전국에 확대되었다.


2 경과


(1)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궁에서 개최되었다. 성직자·귀족의원은 각 300명, 제 3 신분은 약 600명이었다. 시이예스 등 제 3 신분 의원들은 모든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사안(事案)을 다수결투표에 의하여 결정하자고 주장하며 부별투표(部別投票)를 주장하는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대립하였다. 평민의원과 성직의원 일부는 궁정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6월 20일 국민의회(Assemblee Nationale)를 결성하고 프랑스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였으며(테니스 코트의 서약), M. 라파예트 등 자유주의 귀족도 합류하여 6월말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국민의회는 7월초 <헌법제정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헌법과 의회정치의 개설작업에 착수했는데, 아르투아백작 등 궁정 보수파는 국왕에게 압력을 넣어 베르사유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파리 시민들을 긴장시켰다.

(2) 바스티유 습격

7월 11일 국왕 루이 16세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삼부회의 최고책임자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C. 데물렝이란 젊은 신문기자의 선동에 따라 시가를 휩쓰는 폭동을 일으켰다. 격분한 시민들은 14일 약 1만명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으며, 왕실의 친위대가 이에 가담하여 감옥을 점거하였다. 이튿날 구(舊)체제 최후의 파리 시장(市長)과 수비대장은 살해당하고, 궁정진입기도는 저지당하였다. 파리는 자치제(commune)의 확립쪽으로 발전해 갔으며, 왕은 이에 군대를 철수시키고 네케르를 재등용하였으며 라파예트를 국민위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3)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

바스티유감옥의 습격 소식이 지방에 전해지자 파리에서 일어난 운동에 호응하듯 격렬한 농민소요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오랜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기를 열망하였으며 영주측이 보관중인 장원문서를 불태우고 장원과 성채(城塞)를 약탈, 소각하였다. 농촌은 대혼란에 빠지고 강도의 무리가 날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농민들은 밤에 문을 잠그거나 무장하여 자기방위를 하는 등 공포의 분위기였다. 당시 매우 막연하지만 광범위하게 퍼진 공포분위기를 <대공포(大恐怖;Grande Peur)>라 부르고 있다. 이 소요를 배경으로 헌법제정의회(立憲議會)는 8월 4일 밤 L.M. 노아유자작의 제안으로 봉건적 특권과 영주제가 폐지되어 전국민이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보증받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전제조건이 실현되었다. 다만 90년 3월 농노신분과 관계된 영주권은 무상(無償) 폐지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영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을 돈으로 되사야 하였기 때문에 그 뒤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입헌의회는 이어 89년 8월 26일 라파예트와 E.J. 시에예스 등이 기초한 <인권선언>을 가결하고 인간의 천부적 자유, 권리의 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神聖) 등 새로운 국민사회의 기본원칙을 명시하여 혁명의 정의(正義)를 내외에 널리 알렸다. 이 <인권선언>은 정치적인 평등이나 저항권의 구체적인 행사법이 명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후일 자코뱅 <산악파(山岳派)>의 인권선언과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농촌과 도시민중의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절대왕정이나 보수파귀족의 저항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민사회의 구성원리를 분명하게 선언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부르주아적이기는 하지만 근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기념비로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국왕은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에 동의하기를 주저했는데 10월 5일 때마침 빵 부족으로 생활고를 겪고 있던 파리의 주부들이 베르사유까지 행진하여 의회에 호소함과 동시에 6일 왕궁으로 난입했으므로 국왕은 의회의 뜻을 따라 선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회와 함께 파리로 귀환하였다. 바스티유 함락과 더불어 베르사유 행진은 프랑스혁명 초기의 극적 사건으로서 이로써 의회는 왕으로부터 독립, 민중에게 예속되었다.

(4) 1791년 헌법

입헌의회는 이미 A. 바르나브의 주장에 의거 일원제(一院制)와 국왕의 정지적(停止的) 거부권을 정하여 입헌군주제의 근간을 구축하였으나, 재정의 개선은 C.M. 탈레랑의 제안대로 교회재산의 국유화와 매각(賣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5월부터 교회재산 경매가 시작되었는데 지불수단으로 발행한 아시냐(assignat)를 지폐로 바꾸어 점차 대량으로 발행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는 정부에서 봉급을 받는 관리로 하고, 이것을 결정한 성직자는 국가와 의회에 선서(宣誓)를 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성직자가 선서를 거부하고 혁명을 적대시하기 시작하였다. 입헌의회는 이 밖에 현제(縣制)의 시행, 사법제도의 정비, 농사법의 제정, 길드의 폐지 등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납세액에 따라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의 차별을 두어 3일분의 노임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는 시민에게만 예선회(豫選會)에서의 투표권·집회권·청원권을 인정하고, 국민위병(國民衛兵)에서도 수동시민을 배제하였다. 이리하여 권리선언 6조에서 모든 시민의 입법과정에의 참여권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91년 프랑스헌법은 재력이 있는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을 반영한 데 그쳤다. 즉 입헌의회는 자유주의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를 주체로 하면서, 영주제의 지주제로의 탈피와 상공업의 자유라고 하는 부르주아혁명으로서의 최소한의 과제를 수행하려고 하였다. 한편 국왕 일가는 91년 4월 H.G.R. 미라보가 죽은 뒤 혁명의 진행과정에 불안을 느끼고 6월 20일 파리로부터의 도피를 꾀하다가 바렌에서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는 더욱 불신의 대상이 되었고 파리의 급진파는 이에 격분하여, 코르들리에협회를 중심으로 7월 샹드마르스에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서명집회를 개최하였으나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위병에 의해 진압되었다. 의회에서는 바르나브 등이 헌법의 완성을 서둘러 9월에 전편(全編)을 채택하고 해산하였다.

(5) 혁명전쟁의 시작

1791년 10월 1일 소집된 입법의회에서는 왕권을 수호하려는 푀이양당과 왕권을 제약하려는 지롱드당이 대립하였다. 지롱드당은 P.V. 베르니오·장소네 등 남서부 출신자와 J.P. 브리소·M. 콩도르세 등 파리에서 선출된 이론가들의 집단인데, 지방 무역상·기업가를 비롯하여 중산 부르주아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망명자 재산의 몰수와 선서거부 성직자에 대한 봉급의 정지 등 강경조치를 가결시켰는데, 이 당의 주요목표는 전쟁정책에 있었다. 전쟁 수행 중에 국왕의 태도를 확실하게 해 두려고 했던 것이다. 국왕은 4월 20일 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선전하였으나,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프랑스군은 큰 혼란에 빠져 계속 패배하였고, 라파예트장군 등은 공격불능을 선언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양국군대는 즉시 연합하여 프랑스에 침입하여 국왕옹호의 선언서를 발표하여 프랑스국민을 위협하였다. 이에 분격한 파리시민들은 연일 의회로 몰려가 패전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였고 의회는 시민들의 애국적인 감정에 호소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는 이 때 마르세이유의 의용군이 부른 진군가이다.

(6) 8월 10일 사건

파리 여러 구(區)의 국민위병대, 시총평의회(市總評議會)는 2개의 진영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입법의회에서는 지롱드당이 우위에 섰으며 1792년 7월 11일에는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각지에서 청년들이 애국적 정열에 불타 의용군으로 참가함으로써 파리는 다시 소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가운데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다시 한번 시민 봉기(蜂起)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쟈코뱅협회의 해산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라파예트는 전방에서 오스트리아군에 투항하였고, 브룬스비히선언이 8월 1일 파리에 전해지자 8월 9일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거하고 봉기, 코뮌을 수립하여 왕당파(王黨派)의 국민위병 지휘관 망다를 사살하였다. 이튿날인 10일 국민위병을 선두로 수동시민의 무장부대가 가담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튈르리궁으로 진격하여 왕궁을 지키던 스위스인 용병들을 살해하였다(8월 10일 사건). 국왕 일가는 의회로 난을 피했으나 곧 코뮌 당국에 인도되었고, 왕권은 일시 정지되었으며, 파리는 봉기 코뮌의 지휘하에 놓여 왕당파의 무장해제가 단행되었다. 9월초 베르??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민중은 9월 2일과 3일 아베이감옥을 습격하여 선서거부 성직자 등 죄수를 학살하였다.

(7) 국민공회(國民公會)의 성립

발미전투에서의 승리가 알려진 1792년 9월 21일 신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공회는 왕정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국민공회는 브리소·베르니오·콩도르세 등 약 200명의 지롱드당이 우익, G.J. 당통·M.F. 로베스 피에르 등 약 100명의 자코뱅당이 좌익으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지롱드당은 가장 혁명적인 파리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방분권적인 연방공화제를 주장하였는데 민중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프랑스 상품 시장을 넓히기 위하여 대외전쟁에 정치의 중점을 두었다. 이에 대하여 자코뱅당에는 급진적 혁명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통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고 파리코뮌이나 민중과 타협하려는 산악파(山岳派)가 있었다. 양당의 중간에 결정권(캐스팅 보트)을 장악한 평원파(平原派)가 있었다. 산악파 중에는 혁명독재를 일찍부터 주장한 J.P. 마라, 8월 10일 사건 후에 봉기위원이 된 로베스피에르가 있어 후일 지롱드당에서 이탈한 뒤의 자코뱅클럽을 이끌어 이른바 자코뱅당으로서 파리의 여론에 영향을 끼쳤다. 양당의 대립은 루이 16세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당은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1793년 1월 21일 산악파의 주장이 근소한 차로 통과되어 루이 16세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처형당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지롱드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전 유럽의 군주에게 큰 충격을 주어 2월초에는 영국·네덜란드가, 3월초에는 에스파냐가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 2월말에 의결한 30만 명 징용령(徵用令)은 선서거부 성직자의 영향을 받고 있던 방데지방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로베스피에르 등 산악파는 과격파의 한 사람인 J. 루를 앞세운 민중의 식량폭동과 각료체포를 겨냥한 발루레 등의 봉기를 제지하면서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자코뱅클럽을 통해, 또 의원 스스로 3월말에 파리 여러 구에 창설된 혁명위원회로 가서 민중과의 접촉을 심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지롱드당이 결의한 마라의 재판은 파리 민중의 신경을 자극하였으며 그가 석방된 뒤 봉기의 기운이 급속히 고조되어, 93년 5월 31일과 6월 2일에 국민공회 포위로 지롱드당 의원의 대다수가 추방당하였다.

(8) 자코뱅당의 독재정치

산악파는 평원파의 소극적인 지지를 받고 공안위원회를 축으로 내전의 긴박한 정세 아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1792년 8월 20일 봉건적 여러 권리의 무상폐지(無償廢止),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이 소토지 소유자로 바뀌어 오늘날 프랑스 소농민계급의 기원이 되었다. 93년 7월 13일 마라가 지롱드파를 신봉하는 여성 S. 코르데에게 암살당한 뒤 국민공회는 자코뱅당에게 조종당하고 공화국의 최고 행정권은 당통·로베스피에르·L.N.M.카르노 등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산악파의 공화국 헌법은 남자의 직접보통선거와 선거인회에 의한 의원 소환, 법률의 재심(再審)을 원칙적으로 승인한 획기적인 것으로, 전문(前文)을 이루는 인권선언은 소유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평등을 전면(前面)에 내세웠으며 봉기권도 명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6월 24일에 가결되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8월 10일 포고와 동시에 시행이 연기된 것은 반(反)혁명의 위험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산악파내의 자유경제 지지세력을 누르고 곡물과 생필품의 매점(賣占)을 금지하는 단속법과 공설저장고(公說貯藏庫)의 설치가 결정되고, 8월 23일에는 카르노의 제의로 국민총징용령이 가결되었다.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파리 민중을 또다시 행동으로 몰고가 9월 5일에는 에베르파를 선두로 최고가격령(最高價格令)과 식량징발을 위한 <혁명군>을 요구, 국민공회는 이를 받아들여 29일 생활필수품 39품목에 대한 일반 최고가격령을 제정하는 한편, 반혁명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구하였다. 공안위원회도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 동안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 <혁명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비요바렌 등 산악파 급진분자를 가담시켜 실시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또 9월에 개력위원회(改曆委員會)가 발족되고, 11월에 공화력(共和曆;혁명력)이 공포, 실시되었다.

(9) 로베스피에르 정권

자코뱅당 독재에 의한 공화력 2년의 공포정치는 민중운동의 정치적 압력을 배경으로 하여 의회주의를 한걸음 넘어선 혁명정부를 축으로 하여서 감행되었다. 그 전반기는 혁명위원회와 국민협회, 거기에 혁명군 등 민중 자신이 구성하는 조직에 의해 정부의 여러 법이 실시되었는데, 거기에는 교회폐쇄에서 예배금지로 나가는 비(非)그리스도교화, 대차지농(大借地農)과 부유상인의 축재(蓄財)에 대한 간섭 등 민중적인 테러가 확산될 여지가 있었다. 12월 14일 혁명정부는 공안위원회 독재를 정비하고 민중적 테러를 억제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94년 3월 혁명노선을 둘러싼 에베르파와 당통파와의 항쟁이 격렬해졌는데, 로베스피에르는 <덕(德)과 공포>를 주장하고 94년 3월 에베르파가 파리의 식량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을 동원해서 봉기를 계획하자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4월에는 당통을 처형하였다. 이것은 경제적인 통제를 이완시키면서도 도덕적 원리의 뒷받침을 독재정권에게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코뱅당의 독재를 지탱하는 기반은 약해지고, 6월 10일의 법률에 의해서 국민공회는 의원을 혁명재판에 인도하는 배타적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는 의원들마저도 전율시켰다. 이로써 독재타도의 기운은 높아지고, 공안위원회 내부의 대립도 얽혀 7월 27일(共和曆 2년 테르미도르 9일) J.L. 탈리앙 등 온건파의 반혁명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는 사형당하고 자코뱅당은 몰락하였다. 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 한다.

(10) 총재정부(總裁政府)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을 계기로 유산시민을 주체로 하는 온건공화당이 국민공회에서 다시 지도권을 회복하여 무산시민을 배경으로 하는 자코뱅당과 구특권계급이 지도하는 왕당의 반항을 억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많은 혐의자들은 석방되고 로베스피에르의 법은 기각되고 봉기 코뮌은 해체되었으며 공안위 및 혁명재판소는 폐지되었다. 또 급진적인 노농정책·통제경제는 폐지되고 상업시민의 자유로운 세기가 재현되었으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유의 도래는 생활비의 팽창을 초래하여 빈곤한 시민을 한층 더 비참한 생활에 빠지게 하였다. 테르미도르파는 즉각 혁명 정부 개편, 자코뱅클럽의 폐쇄를 단행하고, 너머지 급진 산악파를 추방하였다. 또 1795년 봄에는 두 차례에 걸친 파리민중의 식량봉기를 진압하고, 그해 8월 22일 공화력 3년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0월 27일에는 이원제(二院制) 의회와 5명의 총재로 구성된 정부를 발족시켰다. 피선거자격을 높여 상층·중산 부르주아에게 유리한 체제가 되었다. 96년 구(舊)자코뱅파와 전투적인 민중을 규합하여 인민독재를 겨냥한 F.E. 바뵈프의 음모가 미연에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그 뒤 97년 3월의 선거에서 입헌 왕당파가 양원(兩院)에 진출하고 위의 법령이 폐지되자 시에예스·바라스 등의 순(純)공화당파는 군대의 위력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의원을 추방하였다. 이어서 98년의 선거에서의 자코뱅파 진출에 대해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99년 6월에는 다시 M. 바르텔미 등 입헌 왕당파의 총재를 배제하였다. 이와 같이 총재정부는 2,3차에 걸쳐 비상수단을 행사하여 그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재정정책은 낮은 가격을 형성하던 아시냐 지폐를 회수, 폐기하기는 하였으나 강제공채 등에 의하여 구(舊)피낭시에(왕정과 결탁한 금융업자)·은행가 계층을 냉대하였다. 사법·행정에 대해서도 관직자가 선거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압력이 커서 안정성이 없었다. 신앙의 자유는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입헌 성직자는 봉급과 공무원 자격을 박탈당하여 공적 시설의 예배가 허용되지 않았다.

(11) 브뤼메르의 쿠데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국민공회 해산 때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실적이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여 프랑스에서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영국군 때문에 일시 궁지에 빠졌으나 탈출하여 1799년 11월 9일(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일), 시에예스·J. 푸세·탈레랑 등과 짜고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폐지하고 통령정부(統領政府)를 수립,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와 동시에 의회를 삼원제(三院制)로 하여 공화주의적 비판세력을 봉쇄하고 부르봉가의 복위를 도모하는 왕당파와 자코뱅 급진파를 탄압하였다. 한편으로는 신구 관직자를 재능, 경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통령제하의 요직에 앉히고, 또한 프랑스 은행의 설립, 정교협약(政敎協約)의 체결 등에 의해 국민 각계층의 욕구를 충족시켜 국내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혁명의 의의
프랑스혁명은 자본주의 발전기에 있어서 절대왕정에 반항하여 봉건적 특권계급과 투쟁하여 얻은 유산시민계급의 승리였으므로 보통 이것을 시민혁명이라 부른다. 이 시민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자코뱅당의 좌파가 기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옹호하는 절대평등사회의 실현은 실패하였으나 프랑스 한 나라의 혁명에 그치지 않고 그 영향이 널리 전유럽에 퍼져,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승리의 기초를 세워 근대사회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혁명은 사상·법률·정치·사회 전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자연권(自然權) 사상을 무기로 하여 절대왕정(絶對王政)의 법구조를 타파하고 사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를 건설하였다. 혁명의 귀착점은 국내 상공업의 자유, 토지경작의 자유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혁명 초기에는 절대주의 국가간의 전쟁을 부정했는데, 도중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의 간섭전쟁이 일어났고, 이어 영국이 참전하였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을 받아 상황은 급속하게 전개되어 나갔으며, 정정(政情)의 불안정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군대를 배경으로 한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수습되었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역사적인 환경이며, 당시의 프랑스가 영국보다는 후진국이었지만, 다른 인근 여러 나라보다는 선진자본주의국이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4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

국민의회로서 조직된, 프랑스국민의 대표자들은 인권의 부지(不知)·망각 또는 멸시가 공공(公共)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참작하여, 한 가지 엄숙한 선언 속에서, 인간의 천부적이고 양도할 수 없으며 신성한 권리를 공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늘 눈 앞에 두고 끊임없이 그 권리와 의무를 상기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입법부 및 집행부의 모든 행위가 항상 모든 정치제도의 목적과 비교되게 함으로써 보다 존중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시민의 요구가 이후 단순하고 또 확실한 여러 가지 원리에 기초함으로써 항상 헌법의 유지 및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로서 국민의회는 신(神) 앞에서 그리고 그의 비호 아래 다음과 같은 인간 및 시민의 권리를 승인하고 또 선언한다.
제1조 인간은 모든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으며 또한 생존한다. 사회적인 차별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하다.
제2조 모든 정치적 단결의 목적은 인간의 천부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하는 데 있다 이들 권리란, 자유·소유권·안전·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명시적으로 국민에 의하지 않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제4조 자유는 남을 해치지 않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격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천부적 권리 행사는 사회 다른 구성원의 동일한 권리의 향유를 확보하는 한, 제한 받지 않는다. 이러한 제한은 법에 의해서만 규정한다.
제5조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만을 정당한게 금지할 수 있다.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모든 것은 방해받지 않으며 또한 어느 누구도 법이 명하지 않는 일은 강요받지 않는다.
제6조 법은 총의(總意)의 표명이다. 모든 국민은 자신이 또는 그 대표자를 통하여 법을 작성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법은 보호하는 경우에도 처벌하는 경우에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여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의 시각에서는 평등하기 때문에 그 능력에 따라 그리고 그 덕성(德性) 및 재능 이외에 차별을 제외하고, 평등하게 모든 공공(公共)의 지위 및 직무에 취임할 수 있다.
제7조 어느 누구도 법률에 의해 규정된 경우나 그 명하는 형식에 따른 경우 외에는 소추(訴追)되거나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 자의적인 명령을 청원하거나 발령하거나 집행하거나 또는 집행하게 하는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법률에 따라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즉시 이에 따라야 하며 저항할 경우 유죄가 된다.
제8조 법률은 엄격하고 명백하게 필요한 형벌만을 규정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범죄에 앞서 제정·공포되고, 또한 적법하게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되지 않는다.
제9조 모든 사람은 유죄라고 선고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의 체포가 꼭 필요하다고 판정되어도 그의 신병(身柄)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하지 않은 모든 강제처치는 법률에 의해 준엄하게 억제되어야 한다.
제10조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에 대하여, 그것이 비록 종교상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표명이, 법률이 확정한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 아닌 한, 방배 받지 않는다.
제11조 사상 및 의견의 자유로운 전달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記述)하며 인쇄할 수 있다. 다만 법률에 의해 규정된 경우의 자유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
제12조 인간 및 시민 권리의 보장은 하나의 공권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공권력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마련되는 것이며 그 업무를 위탁받은 사람들의 특정한 이익을 위하여 마련되는 것은 아니다.
제13조 무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행정의 여러 가지 비용을 위하여 공동조세가 필요하다. 이 조세는 모든 시민에게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
제14조 모든 시민은 자신이 또는 그의 대표자를 통하여 공조세(公租稅)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이를 자유로이 승낙하며, 그 용도를 추급(追及)하고 또한 그 액수·부과방법·징수 및 기간을 규정하는 권리를 갖는다.
제15조 사회는 그 행정을 맡고 있는 모든 공직자에게 보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제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규정되어 있지 않는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17조 재사권은 불가침의 신성한 권리이므로, 누구도 법에 의해 보장된 공공의 필요성에 대한 명확한 요구나 사전에 정당한 보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는 박탈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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