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구룡사계곡(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울창한 숲을 뚫고 이어지는 심산유곡
치악산은 최고봉인 비로봉(1,288미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세가 당당하기 그지없어 단순히 산이라기보다는 산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1천 미터급 준봉들이 연이어 솟구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깊은 계곡들이 꿈틀대고 있다.
치악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곳은 구룡사계곡이다. 수백 년생 소나무와 활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찬 계곡 길을 더듬어 오르다가 구룡사를 지나 구룡소에 이르면 저절로 발길을 멈추게 된다. 폭포의 높이는 별것 아니지만 그 자태가 흡사 용이 몸을 비트는 듯하고 물줄기 아래로는 깊고 넓은 웅덩이가 짙푸른 빛으로 일렁인다.
구룡소를 지나 상류로 오르면 계곡은 더욱 깊어만 가고 선녀탕과 세렴폭포라는 절경을 다시금 빚어내고 있다. 구룡사 입구에서 비로봉을 오르내리는 데는 왕복 7시간이나 걸리는데다 사다리병창이라는 급경사 코스를 거쳐야 하므로 무척이나 힘들다. 산행에 익숙한 건각이 아니라면 세렴폭포 부근에서 쉬다가 내려오는 게 나을 듯싶다. 구룡사 입구에서 세렴폭포까지는 1시간쯤 걸린다.
아홉 마리의 용에 얽힌 전설
계곡의 이름을 낳은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 8년(668년) 의상조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찰로 창건 당시의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다. 이 자리는 원래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던 연못이라는 전설이 이어져 내려오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가 퍽이나 흥미롭다.
절 자리를 고르려고 다니던 의상조사(또는 무착대사)는 이곳에 이르러 주변을 살펴보고는 절을 세우기에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웅전을 세울 자리에는 용들이 살고 있는 연못이 있었다. 용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사의 의중을 읽은 용들은 내기를 제안했다. 그러더니 용들은 하늘로 치솟아 올라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비를 쏟아 부었다. 그 바람에 근처의 산들은 삽시간에 물에 잠겼다. 대사가 물귀신이 되었을 거라고 여긴 용들은 비를 멈추고 내려왔다. 그러나 대사는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매어놓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는 대사가 조화를 부릴 차례. 대사는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 속에 넣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뜨거움을 참다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달아났다. 그런데 한 마리의 용은 눈이 멀어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구룡소로 옮겨 앉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여러 차례 중수했음에도 닫집이 남아 있어
또한 아홉 구(九) 대신 거북 구(龜)자를 쓰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어느 날 한 승려가 찾아와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바위를 쪼개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거북바위를 쪼갠 이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는 더욱 줄어들고 급기야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즈음 어느 도승이 찾아와 절의 운을 지켜온 거북바위를 동강내 혈맥을 끊어버린 탓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 구(九)자 대신 거북 구(龜)자로 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창건 이후 도선, 자초, 휴정 등이 거쳐 가면서 영서 지방의 대찰로서의 소임을 다한 구룡사에는 현재 대웅전, 보광루, 삼성각, 범종각, 심검당, 설선당, 응진전, 요사 등의 당우가 남아 있다. 구룡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천불상이 놓여 있으며 오른쪽 벽면에는 조상 숭배나 영혼 숭배 신앙을 그린 감로탱화와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신중탱화가 걸려 있다. 여러 차례 대웅전을 중수했음에도 그 안에 있는 닫집(궁전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구룡사 주위의 울창한 노송들은 조선시대에 궁궐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황장목(금강송)의 무단 벌채를 금하는 황장금표가 구룡사로 들어오는 입구에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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