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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암사 결사(結社) / 성철스님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0.29|조회수21 목록 댓글 0

봉암사 결사(結社) / 성철스님

(1982년 5월15일, 방장 대중법어) 지나간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예전 봉암사에 살던 얘기입니다. 요새 와서 봉암사 살던 것을 묻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지금 봉암사에서 잘해 보겠다고 사람이 일부러 와서 묻기도 하고, 딴 사람들도 이야기 좀 해 주었으면 하는데, 사실 보면 봉암사에 여럿이 함께 살았지만은 내가 주동이 되어 가지고 한 만큼, 내가 그 이야기하기는 곤란하지만, 여러 형편으로 봐서 조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봉암사에 들어 간 것은 정해년, 내 나이 그때 36세 때입니다. 지금부터 35년 전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 동기는, 죽은 청담스님하고 자운스님하고 또 죽은 우봉스님하고, 그리고 나하고 넷인데, 우리가 어떻게 근본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이었습니다. 즉 근본 목표다 이말입니다. 그렇다면 처소는 어디로 정하나? 물색한 결과 봉암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스님하고 자운스님하고, 나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스님은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해인사에서 가야 총림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그 뒤로 향곡, 월산, 종수,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 보경, 법전, 성수, 종회의장 하던 의현이는 그 때 나이 열서너댓 살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그 멤버가 한 20명 되었습니다. 살기는 약 3년 살았습니다. 처음에 들어가서 첫 대중공사를 뭘 했느냐 하면, 혹 이런 이야기하면 '지금이라도 실천하자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할는지 모르겠지만, 살았던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지 지금 당장 꼭 이대로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우선 법당 정리부터 먼저 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법당 정리를 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우리 한국 불교는 가만히 보면 간판은 불교 간판을 붙여 놓고 있지만, 순수한 불교가 아닙니다. 칠성단도 있고, 산신각도 있고, 온갖 잡신들이 소복이 들어 앉아 있습니다. 법당에 잡신들이 들어앉을 수는 없는 것이니 법당 정리부터 먼저하자, 그리하여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습니다. 칠성 탱화, 산신탱화, 신장 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습니다. 자세히 이야기를 하려면 여러날 해야되니 자세히 다는 이야기 못하겠고, 그 다음이 이제 불공인데, 불공이란 것은 자기가 무엇이든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서 스님네가 축원해 주고 목탁 치고 하는 것은 본시는 없는 것입니다. 꼭 부처님께 정성 드리고 싶은 신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물자를 갖다 놓고 자기 절하라 말입니다. 우리가 중간에서 삯군 노릇은 안 한다 이것입니다. 그래 놓으니 불공은 그만 싹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대개 절에 칠성 신도가 많은데, 칠성 안 해줄 뿐만 아니라 부처님 앞에서라도 목탁 치고 축원은 안 해 주니 누가 불공하러 오겠습니까. 그만 신도 싹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영혼 천도가 문제되는데, 부처님말씀에 누구 죽어 7 . 7재를 지낼 때에 부처님 경을 읽어 주라고 했지 뭐 두드리고 하라는 말씀 없거든요. 마침 들어가니 49재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3재쯤 되었어요 쭈욱 이야기하고는, "당신네가 꼭 해달라고 하면 경은 읽어 주겠지만 그 이외에는 해 줄 수 없소"했습니다. "그러면 재 안 하렵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우리 사는 것은 걱정 마시오, 산에 가면, 소나무 솔잎 꽉 찼고, 개울에 물 출출 흘러내리고 있고, 우리 사는 것 걱정하지 말고 당신들이나 잘 하시오" 이래서 불공 막아 버렸지, 천도해 주는 것 막아 버렸지,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 무기는 따로 없습니다. 동냥하는 것뿐입니다. 동냥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법당은 어느 정도 정리되는데, 가사니, 장삼이니, 바릿대니 이런 것이 또 틀렸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에 바릿대는 와철입니다.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하지 목바루는 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쓰고 있습니다. 가사상삼을 보면 가사니 장삼을 비단으로 못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전부 다 비단입니다. 색깔도 벌겋게 해서, 순수한 색이 아니고, 괴색을 해야 되는 것이니 그것도 비법입니다. 그래서 비단 가사, 장삼, 그리고 목바릿대, 이것을 싹 다 모아 가지고 탕탕 부수고 칼로 싹싹 자르고 해서 마당에 갖다 놓고 내 손으로 불싹 다 질렀습니다. 그리고서 시작했습니다. 가사는 그 전 해에 대승사에서 조금 만든 것이 있었으나 완전히 된 것이 아니고, 봉암사에서 근본적으로 출발했습니다. 비단으로 안하고,또 괴색으로 우리가 물을 들였습니다. 바릿대가 없어서 처음에는 양재기를 펴다가 나중에 옹기점에 가서 옹기를 맞추어서 썼습니다. 장삼은 법대로 된 예전 장삼이 송광사에 한 벌 있었습니다. 예전 보조스님께서 입던 장삼인데, 자운 스님이 양공(양복장이)이거든, 보고 와서는 이전 장삼을 버리고 새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장삼 그것입니다. 육환장도 새로 만들고, 요새는 안하지만 스님은 언제든지 육환장 짚게 되어 있으니까. 삿갓도 만들었습니다. 삿갓을 만들어 놓으니 이것은 조선 5백년동안에 스님네 압박하려고 만든 것인데 왜 내놓느냐고 사방에서 공격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건 모르는 소리야, 일본도 지금 선승들은 삿갓 쓰고 있고, 예전 중국에서도 보면 법문에 삿갓이야기 많이 나오고, 청규에 삿갓 쓰도록 다 있어. 그리고 아침에는 꼭 죽을 먹었습니다. 공양은 사시밖에 없으니까, 오후에는 약석이라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율에 보아서는 저녁 공양은 없는데, 청규에는 약석이라고, 약이라 해서 참선하는 데에 너무 기운이 없어도 안되므로 바릿대 펴지 말고 조끔씩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포살도 처음으로 거기서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일종의 혁명인셈이지요. 이런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우리 손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밥해 먹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나무하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밭 매는 것도 우리 손으로 한다. 일체 삯군, 일꾼은 안된다 말입니다. 이것이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청규 근본정신이니까. 그래서 부목도 나가라, 공양주도 나가라, 전부 다 내보내고 우리가 전부 다 했습니다. 쉬운 것 같지만 실제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곡식도 전부 다 우리 손으로 찧고, 나무도 우리 손으로 하고, 밭도 전부 우리가 매고, 이것이 실제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신도들과의 관계는 어찌되어 있느냐 하면, 스님네 보고 "야야", "자자" 하지 "스님" 소리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소리, 나이 많은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스님이 다 뭐야, 자기 종 취급인데, 나도 처음 승려되어 그런 소리 들어봤습니다. 우리도 보살계를 하자, 법을 세우려면 보살계를 해야 되니까. 자운스님이 「법망경』을 익혀 가지고 처음으로 보살계를 했습니다. 보살계 한다는 소문이 이리저리 나가지고,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진주, 마산, 저 먼 데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 심심산골에 수백 명이 왔어요, 방에 꽉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당신네가 여태까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네 보고 절 한 일 있나? 생각해봐,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한테서 법을 배우는 사람이야, 당신네는 제자고 스님은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보고 절하는 이 어디 있어, 조선 5백년 동안에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 부처님 법에는 신도는 언제나 스님네한테 세 번 절하게 되어 있어. 그러나 부처님 법대로 하려면 여기 다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오지 말아. 그렇다고 꼭 우리 말대로 하라 이 말도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 나가란 말이야 한 사람도 안 나가요" "그럼 부처님 법대로 하겠다는 말인데, 꼭 부처님 법대로 하려면 일어서서 절 세 번씩 하란 말이야, 그것이 부처님 법이니까. 억지로 하라는 것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 그랬더니 전부 일어나서는 절을 세 번씩 했습니다. 절을 다 하고 난 후에 말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 어디서든지 스님들을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아니야" 신도가 스님네 보고 절한 것, 근세에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다시 보살계를 합니다. 당시에 들으니 보살계첩 한 장에 천원 받는다 하는데, 40년 전 천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사는 많은데 흔히 불사, 불사하지만 불사하는 것 나는 하나도 못 봤어. 전부 장사하지, 장사속이란 말이야 우리는 불사 좀 해보자, 장사는 하지 말고" 그 때 계첩을 모두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 놓고는 이제 시작입니다. 보살계를 받으려면, 천화불이라 해서 천 번은 절을 해야 되는데, 밤새도록 절을 시킵니다. 그 중에 한 70살 되는 늙은이가 뻗정다리입니다. "스님 저는 다리가 이래서" "다리가 그러면 계 안 받으면 될 것 아니오 절을 안 하면 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한 80살 되는 늙은이가 말했습니다. "스님, 저는 아파서 일주일동안 미음만 먹다가 왔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미음단지" "절 못하면 보살계 안 받으면 될 것 아니오. 나가시오, 나가!" 나중에 보니 그 늙은이들이 더 절을 잘합니다. 그렇게 절을 시켰습니다. 천 배 절을 시킨 후에 보살계를 하는데 미리 큰 죽비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두들겨 패려고 그 전에 계살림 하는 것 보니까 한쪽에서는 법상에서 뭐라고 뭐하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이야기하는 사람, 자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이 꽉 찼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간섭은 안 한다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계첩만 팔아먹으면 그만이니까. 우리가 다 봐두었거든. 그래서 "앉을 때는 꼭 꿇어앉아라" "합장해라" 그래놓고, "잘못 꿇어앉아도 때려주라" "합장 잘못해도 때려주라" "졸아도 때려주라" "이야기해도 때려주라" 이 네 가지를 범하는 사람은 무조건 큰죽비로 죽도록 때려준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젊은 사람이 군데군데 서 가지고 턱턱 때려준다, 그건 때려주어야 자비지, 안 때려주면 자비가 아니니까. 여기서 철썩, 저기서 철썩, 몇 번을 깜짝깜짝 놀라더니 그만 아무도 조는 사람이 없습니다. 걸어 다닐 때도 어디 기를 펴고 다녀, 숨도 크게 못 쉬는 판인데 그리하여 계살림을 사흘간 원만히 잘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후에 원주를 불렀습니다. "그래도 쌀 좀 남았지? 남은 쌀 전부 밥 다해라" "허! 그걸 어쩔려구요" "어쩌든지 내가 알아 할 터이니 밥 다해라" 남은 쌀로 전부 밥을 해서는 주먹밥을 만들어서 한 덩이씩 안겨 주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8,90살 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때, 그것 사흘동안 한 것보다도 몇 줌 남은 쌀 그것까지 싹싹 긁어 가지고 밥해서 한 주먹씩 안기는데 그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놓고 보니 7천 원이나 빚졌다고 해요. 40년 전 7천 원이면 큰돈입니다. 우리는 또 동냥 나다닙니다. 총무원장 하다가 수도암에 가 있는 법전스님, 자운스님, 따라 다니면서 동냥한다고 어떻게나 욕을 봐놨던지 지금도 이야기한다고 해요. 참 동냥한다고 욕봤어요. 석 달 안에는 어디고 기침소리도 한군데 나는 데가 없었습니다. (석 달 안에는 대중공양 안 받기로 한 때문) 석 달이 지나고 나니 대중공양이 들어오는데 딱 벼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방에서 대중공양이 들어오는데 감내를 할 수 있어야지, 여기서도 공양이 들어오고, 저기서도 공양이 들어오고, 돈도 들어오고, 장삼하자, 가사하자, 뭣도 하자, 막 불사가 벌어지는데 그만 장사를 여러 수십 배 해버렸습니다. "우리가 장사를 하나, 농사를 짓나, 뭣하나 결국은 신도 것 먹고 사는데, 신도 것 얻어먹어도 법답게 얻어먹고, 신도가 절에 다녀도 신심으로 갖다 줘야 되지 이것 뭐냐, 신도가 오면 돈 몇 푼 그것 먹으려고 발밑을 슬슬 기고, 그것은 보통 사람도 할 짓이 못되는데 우리가 부처님 제자라 하면서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앞으로 법답계 들어오는 것은 법답게 받으면 안되느냐고" 출처: 자기를 바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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