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불로 호랑이를 조복시키고, 가뭄에 단비 내려,
/ 연지 대사
정토종 제8조 연지대사는 아미타경을 풀이한
[미타경소초]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수 많은 공덕을 한꺼번에 다 갖추는 것이고,
아미타불 명호만 부른다면, 이는 온갖 수행법을
빠짐없이 갖추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사께서는 염불수행법이
계정혜 삼학을 두루 포함하고,
육바라밀을 빠짐없이 갖춘 법문이라고까지 하셨다.
대사께서는 염불수행으로 마음이 밝아지자
드디어 본래 성품을 깨달아 초견성을 이루었지만,
견성했다하더라도 미혹과 업장을 완전히 끊지 못해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것을 대사의 임사체험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대사는 견성체험 이후,
강소 땅 와관사라는 절에서 주석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병에 걸려 낫지를 않고,
마침내 숨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대중이 다비를 하려고
시신을 관 안에다 놓고 운반하려고 하는데,
관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대중이 열고 보니
연지대사가 아직 살아 계시더라는 것이다.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당신은 道를 깨쳐 안심하고 살아온 것인데,
이제 이러한 죽음을 당하고 보니
그런 정도의 도력 가지고는 생사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임을 크게 깨닫고
앞으로는 오직 '염불수행'만 전력을
다 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리하여 운서산을 찾아가
그 곳에서 평생 '염불수행'을 하고 갈 것을 발원하고,
송나라 때 호랑이를 조복받으셨다는
복호선사가 지은 암자에서 살기로 하셨다.
그런데 그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아
사람들이 들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매년 수십 명이 호식을 당했고,
그 지방 사람들은 해만 지면 삽작의 문을
걸어 닫고서 출입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말을 듣고도 연지대사는
홀로 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셨고,
거기서 며칠 동안 높은 소리로 경을 독송하고
염불을 하고, 많은 고혼을 위해서 시식을 하니
그 후부터는 일체 호환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이 어찌 염불의 위신력과 가피력이 아니겠는가?
이 일로 그 고을 사람들은 연지대사를
위대한 도인으로 믿어 받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또하나 이적이 일어난다.
연지대사가 운서산에 주석한 지 얼마가 지나
날이 가물어 곡식이 말라 죽고,
산천에 초목까지도 시들 정도여서
온 농민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과 그 지방관리들과 유지들이 모여
연지대사가 계신 암자에 찾아가서 예배드리고는
비가 오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대사는
“나는 단지 염불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며
아무런 도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까지
찾아오신 성의를 생각해서 염불이라도 해드리겠나이다”
하시고는 목탁을 들고 그 분들과 같이
들로 내려오셔서 가물어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논과 밭을 다니면서, 목탁을 치며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한시 바삐 비를 내려 달라고 기원을 하셨다.
그랬더니 갑자기 먹구름이 온 하늘에 가득히 덮히고
뇌성벽력이 치면서 바라고 바랬던 비가 오기 시작했다.
흡족하게 비가 내리자
농민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했다.
이를 계기로 연지 대사의 도력은
온 천하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나라에서도 대사를 위해
절을 하나 크게 지어 드렸다 한다.
스님의 저서로는
아미타경을 해설한 [미타경소초]와
선정쌍수의 관점에서 고인들의 기연과
어록을 기록한 [선관책진],
염불과 참선 보살행 등의 일상 수행법을
안내한 [죽창수필]등 20여종이 유명하다.
평생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아서
일찍이 '자신을 경책하는 32가지 조항'을 지어
늙을 때까지 스스로 빨래하고 요강을 치우며,
시자를 힘들게 하지 않았던 스님은
늘 평등한 대비심으로 대중을 교화했으며,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일과 행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나무아미타불
- 염불각자열전[김성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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