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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6. 티베트불교의 전개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05.31|조회수12 목록 댓글 0

삼예의 종론’ 논쟁 거쳐 인도불교 정착

 

티송데첸왕.인도학승이 ‘초석’
초기는 왕궁의 지원속에 발전

티베트불교는 오늘날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달라이라마로 대표되는 티베트불교는 고산지대에 둘러싸인 숨겨진 불교가 아니라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새로운 불교의 모습이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한 것은 7세기 티베트의 송첸감포왕 때이었다. 송첸감포왕은 인도의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티베트의 문자를 제작하는 등 티베트문화의 초석을 다졌다. 당시 티베트 국력은 점차 강성해지는 단계에 있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티베트는 중국의 장안(長安)을 점령하는 등 강력한 국력을 발휘하였다.

 

티베트불교는 송첸감포 왕 당시 두 왕비에 의해 처음 받아들여져 사원이 세워지고 불교문화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티베트에 본격적으로 불교가 뿌리를 내린 것은 성군(聖君)으로 전해지는 티송데첸 왕에 의해서였다.

티송데첸 왕은 불교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자 인도에 사람을 파견하였다. 파견된 사자(使者)에 의해 티베트에 들어온 인도의 학승이 샨타라크쉬타 즉 적호(寂護)이었다. 적호는 당시 날란다 사원의 학승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티베트의 사자에 의해 불교의 상황을 들은 적호는 이후 두 차례의 방문을 통해 티베트불교의 초석을 닦았다. 그에 의해 최초의 불교사원인 삼예사원이 건립되고 또한 최초의 출가 수계자가 나와 티베트에 불교교단이 성립하였다.

 

적호에 의해 티베트불교는 뿌리를 내렸으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행된 소위 〈삼예의 종론(宗論)〉을 통해 불교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삼예의 종론〉은 티송데첸 왕 당시 거행된 불교논쟁으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논쟁이다. 각각의 대표자는 인도측에는 카말라쉴라 즉 연화계(蓮華戒)이며 중국측은 마하연(摩訶衍) 화상(和尙)이었다. 이것은 당시 본격적으로 출범한 불교계에 성격이 전혀 다른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대립적으로 나타나 왕에 의해 올바른 불교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자 거행된 논쟁이었다.

 

불교역사상 초유의 불교논쟁이 티베트에서 거행된 것이다. 당시 인도불교는 적호와 연화계에 의한 교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점수(漸修)적인 성향을 가진 반면 중국불교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하여 돈오(頓悟)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성격을 달리한 불교는 당시 티베트 사회에 큰 혼란을 주었던 것으로, 왕은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불교논쟁을 거행하였다.

〈삼예의 종론〉을 통해 인도불교가 불교의 중심이 되고. 이것을 계기로 티베트에는 본격적으로 인도불교가 전해졌다. 다수의 인도불교문헌이 번역되고 또한 티베트인에 의한 불교문헌도 생겨났다. 당시 인도는 밀교가 성행하던 시기이었지만 적호와 연화계의 체계적인 불교학이 전해져 티베트 불교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렇게 초기의 불교는 왕궁의 절대적인 지원 속에 발전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불교적 성향에 반발한 또 다른 정치 관계 속에서 티베트 왕국은 분열되기에 이른다. 이 분열을 계기로 티베트는 통일적인 정치체계가 무너져 혼란기에 들어가고, 이 혼란기를 전후하여 티베트불교는 전전기(前傳期)와 후전기(後傳期)로 나뉘어 진다. 분열로 인한 오랜 기간 이후 후전기의 불교는 11세기 아티샤라는 인도의 위대한 학승이 들어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오늘날 새롭게 조망되는 티베트불교는 〈삼예의 종론〉과 같은 불교논쟁을 통해 인도의 불교가 정착된 역사적 배경을 가진다. 이것은 인도에서 소멸된 불교의 역사가 티베트로 이어져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티베트불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도불교 후대의 정치(精緻)한 불교교학을 엿볼 수 있다.

이태승/ 위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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