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삶의 보람을 찾을 때
애착심을 버려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얻어서 자기를 얽어맨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나를 구속하는 행위이다. 너는 내 것이니 꼼짝 마라, 하고 꽉 잡아매어두고 한 발짝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사랑처럼 무서운 지옥은 없다.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움직여서 제 욕심만 채우려고 시집가고 장가간다. 독사보다 나쁜 마음이 이 사랑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사랑하지 말라.’ 고 하셨다. 분별 시비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오로지 자비만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사람이 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기는 어렵다. 물건을 탐내는 마음을 버려라. 사람의 가치는 재물이 많고 적고에 달려 있지 않다. 나는 무엇이냐? 내가 죽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냐?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남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마음, 죽는 것은 싫어하고 사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 이 마음을 정리해야 된다. 인간의 망상은 상대세계를 초월한 진아(眞我)를 저버리고 물질로 이루어진 가아(假我)와 현실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정한 그때서부터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믿는다는 말은 곧 생사가 없고, 망상이 없는 진아를 믿는다는 뜻이다. 확고한 자기를 발견한 그날부터, 다시 말하면 선택이 없고 증애가 떨어진 진아를 믿는 그날부터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참다운 나를 사는 삶을 누리는 것이며, 참된 행복을 창조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한 생각이 털끝만큼만 틀려져도 이 생각과 참 나와는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아니 하늘과 땅보다 더 벌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중생이다 하는 생각은 아예 털끝만큼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고, 나는 본래부터 부처다 하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 모든 생각이 다 망상이며, 이것을 망상이라고 하여 떼려고 하는 그것도 역시 망상이다.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도 망상이다. 이치를 따라 이리저리 따져 봐도 망상만 더해 갈 뿐 마음은 드러나지 못한다. 들끓는 생각을 억지로 참으려 하지 말고 마음을 턱 놓아버리면 못 자던 잠도 잘 자게 되고, 시끄럽던 머릿속도 조용해진다. 이렇게 계속하면, 망상은 차차로 없어지고 마음 하나만 남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나니 너니 하는 구별이 없으므로 목을 베어가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을 수 있고, 대접을 잘 받거나 욕을 먹더라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까지는 의식주에 있어서나 모든 사물에 대해서 좋다거나 싫다는 생각을 초월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 호떡을 사주든, 따귀를 때리든,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높은 자리에 앉혀주든 낮은 자리로 밀어버리든,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순경에나 역경에도 마음이 태산처럼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 가운데 맞느니 안 맞느니 시비곡절이 없고 보면 마음에 병이 없다. 불법은 좋고 다른 법은 나쁘다. 이런 분별심 때문에 우리는 제 마음을 바로 지키지 못한다. 이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나는 뭐가 될 것인가? '나'라는 것도 생각이니까 이 생각마저도 버려야 한다. 마음은 본래 아무 생각이 없는데 괜히 망상, 시비를 하여 마음 가운데 위순을 두는 것이 큰 병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확실히 모르고서는 몇 백겁을 돌아다니며 화두를 한다, 참선을 한다고 애써 봐도 헛수고만 될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번뇌 망상을 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진땀만 뻘뻘 흘릴 뿐 결과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사물을 대하여야 한다. 마음을 모양에 비교하여 말할 때에는, 둥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음, 이것은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대한 것이므로 둥글다고 비유하여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둥근 모양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난 사각형은 더욱 아니다. 허공이 무한대하여 끝이 없으니 우리가 그 모양을 생각할 때 둥글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생각이고 추상이지, 하공의 참모습이 둥글다고 할 수는 없다. 허공의 실상은 둥근 것도 모난 것도 아니며, 시작도 끝도 없다. 어떻게 말할 수 없어서 둥글다고 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으로 허공의 모양을 상상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자리도 허공처럼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의 참 모양을 다 생각해 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성불한 셈이다. 생각, 이것이 나는 아니다. 긍정 부정은 내가 아니고, 부정하고 긍정하는 주체가 나다. 농사짓는 것도 장사하는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정치, 학문도 내 일이 아니다. 그것을 하는 주체를 알아야겠다. 그게 무엇이냐? 생각하고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이게 무엇이냐? 태자는 날이 가고 해가 가도록 이것만을 생각했다. 이 생각이 날이 갈수록 가속도로 되어 마치 한 개의 불씨가 커져서 온 태산이 불로 번지듯이 오직 '이 뭐냐?’ 하는 내적 추구의 일념으로 천지가 꽉 찼다. 싯다르타 태자는 이렇게 하다가 납월 팔일(음 12월 8일) 새벽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다. '새벽에 별을 보다가’ 깨친 것이 아니라, '새벽 별을 보고’ 깨친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최고의 진리이다. 말로도 못 전하고 글로도 못 전하고 행동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물질도 허공도 아니어서, 자살할 수도 없고 타살할 수도 없다. 칼로 벨 수도 없고, 불에 탈수도 없으며,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태초 이전이고 차원 이전이어서,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고 나이다. 그러므로 이걸 발견하여 믿는 것이 불교이다. 움직이는 생각을 억지로 쉬려고 하면 머릿속은 오히려 더 시끄러워진다. 서울이 시끄럽고 번거롭다고 하여 백두산 꼭대기로 도망을 하여 앉아있어 봐도 서울의 생각은 머릿속에서 더 세차게 소용돌이친다. 그러니 억지로 번뇌 망상 없는 데로 돌아오면 더 큰 망상이 솟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끄러움이 싫다고 하여 조용한 곳을 찾든가, 조용한 곳이 나중에는 싫증이 나서 다시 번잡한 곳으로 나오든가, 또 생사가 싫어서 열반을 구하든가 하여 양쪽을 왔다갔다 이쪽저쪽을 건너뛰고 하다 보면 우리의 진면목을 잃어버린다. 생사를 벗어나려면 오직 생사를 밟고 차고 나가라는 말이다. 어디를 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치셨던 뜻을 필경 알게 되는 때가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심망상이 용납되지 않으므로 다만 화두만을 들어서 '저게 어째서 무가 되는가?’, '이게 뭔가?’ 하는 것만을 의심해 가는 것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 무아지경이 열반처럼 앞에 슬그머니 나타나서 그곳이 도리어 번뇌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요망된 분별심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어느 텅 빈 것에 애착하여 주저앉아 가지고, '아,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부처도 중생도 아니면서 부처놀음도 하고 중생놀음도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열반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주객관이 대립되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좋아서 우리가 이것을 잘못 열반인 줄 알고 거지가 어쩌다 곰팡이 핀 떡 덩어리 하나 얻어가지고 밤새도록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다가 결국은 못 먹고 버리듯이, 앞에 나타는 열반경계는 나한님이나 독성님들이 취하는 경계로서 이 경계가 슬그머니 변해서 또 번뇌가 일기 시작한다. 신물이라는 말을 삼가서 하지 말라. 곧 하지 말라는 말이며, 추심이라는 말은 무엇을 추심한다, 찾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슨 진리를 찾으려 들지 말고 깨쳐보려고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다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부처가 되어 있으므로 깨치려고 하다가는 영원히 깨치신 것을 네가 깨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추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 가운데 바늘끝 만한 시비를 일으켜도 8만4천 번뇌가 일어나서 정신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를 아예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둘이란 하나로 말미암아 생긴다. 하나가 없으면 둘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 하면 벌써 둘이 생기고, 둘 할 때 벌써 셋이 생기고, 이렇게 하나가 있으므로 무한수가 나오게 된다. 그러면 하나, 이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없는 데서 온 것이다. 인간은 본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나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아왔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없는 데로부터 우주가 생겼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 하는 것과 동시에 백천만 억 무한수가 벌어진다. 그래서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고 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 이것을 말한다. 마음 가운데 허물이 없고 보면 모든 법이 법이랄 것도 없이 한 법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의 마음 그대로다. 전체가 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저 무궁한 객관을 상대할 무슨 법이 따로 없다. 어떤 한 생각이 하나도 일지 않으며 이때의 마음은 마음이라 할 수도 없다. 주관 객관을 따지고 드는 짓은 버릇 때문에 이 순간에도 거짓을 짓고 있다. 음식도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을 생각지 않으면 소화도 잘 된다. 아무 기분 없이만 먹는다면 우리가 비지만 먹더라도 그 속에는 산삼녹용이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 생각 가운데는 온 우주가 다 벌어지듯이, 이 한 생각 가운데 독도 있고 영양도 있다. 그것은 기분으로 정추를 가리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나 가지고 고집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 알맞은 도수를 지나쳐서 중도를 잃어버린다. 벌써 신심을 어긴 것이다. 똑바른 신심이란, 경추를 보지 말고, 지동을 하지 않으며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시비를 가리지 않겠다는 생각까지는 하기 쉽지만, 정말로 시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무엇이라도 고집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벌써 도수를 넘고 분수를 잃어서, 그 사람은 반드시 나쁜 길로 달아가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놓아두어라.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불교까지도 믿지 말란 말이다. 탁 놓아버려서 해방이 되라는 말이다. 이 생명을 해방해 주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끝까지 제 몸을 동여매어 가지고 스스로 구속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탁 놓아버리면 자연스러워 본래 그대로의 자세로 된다. 시집가고 장가갈 생각 내지 말고 일해 가지고 모아서 모두 다 불쌍한 사람에게 주어라. 모든 것이 나에게 필요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성인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이고 보살이고 간에 그 사람과 안 맞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다면 얻어먹으면서 다리 밑에서 자더라도 마음 편할 것이다. 죽어도 그는 편안하게 죽는다. 그러니 내 마음 본래 그 자체가 도라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고 생각 없다는 것도 없이 귀먹은 듯이 일체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어떤 한 생각 일으키면 그것이 개념이요, 벌써 고집이다. 마음에 파도가 일어서 마음자리가 요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혼혼침침 하여 파도가 친다. 물에다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라도 던지면 그만큼 물결이 일어난다. 무엇을 본다고 생각하고 분별 망상을 일으키면 정신 상태가 흐려져서 좋지 못하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에게 생사의 고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 뿐,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이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번뇌 망상이고 올바른 진리는 아니며, 그 것은 싸우는 진리일 것이다. 마음이란 부처도 중생도 유정도 무정도 아니기 때문에, 지금 듣고 말하는 이 마음자리는 서로가 똑같고 질량이 똑같다는 말이다. 똑같다면 구별할 수도 없이 한 덩어리겠지만,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제각기 중생과 인연 맺었던 것을 가지고 성불하는 것이므로 확실히 각각 개성이 따로 있는 것이다. 미(迷)한 사람에게 대적멸에 나타날 때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번뇌 망상이 앞서고 한다. 대적멸과 번뇌 망상이 자주 번갈어서 나타난다는 말인데,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생사열반 양쪽을 왕래하는 사람은 미한 사람이며, 본래의 마음자리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좋고 나쁘고의 구별이 없다. 이 세상 모두가 꿈속이다. 지금 이것은 낮 꿈이고, 어젯저녁의 꿈은 밤 꿈이며, 지금 이 삶은 금생 꿈이고, 과거는 전생 꿈, 미래는 내생 꿈, 이렇게 꿈으로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나고 죽고 하는 것도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우리가 석가여래를 보았다는 것도 역시 꿈속의 일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보는 이것들이 꿈속에서 벌어진 한낱 꼭두각시놀음이란 뜻이다. 우리는 잠이 오라고 하면 눈두덩이 벌써 무거워지면 눈을 뜨기가 싫어진다. 눈을 스스로 감다 보면 점점 잠 속으로 취해 들어가면서 꿈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눈에 잠이 없으면 모든 꿈이 사라지게 된다. 천당 꿈, 지옥 꿈, 인간 꿈, 중생 꿈 내지 부처 꿈이 한꺼번에 없어진다. 이러한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눈에 잠이 없는 동안 공부를 하란 말이다. 본래의 마음이 달라지지만 않으면 1만법이 항상 한결같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러하며 우리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는다. 이 지식도 사상도 신도 아니고, 모든 생각도 아닌 이 마음은 우주의 모든 사물을 다 알고 있다. 그리하여 죽었다 태어나고, 태어났다 다시 죽는 우리의 몸뚱이는 달라질지언정 우리의 마음만은 항상 그대로이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병신이 되도록 때리더라도 참으면 아무런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업이 남지를 않는다. 기억한다는 것은 업이 남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마음에 간직하지 않아야 한다. 까닭만 하여도 나에게 업만 남게 만든다.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가는 다시 나고, 나서는 병들어 죽고 하는 고통이 되풀이 된다. 내가 만사에 간섭만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생사윤회가 닥치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믿음터라도 이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깨쳐가지고 능력이 들어서는 것은 둘째 문제로 하고 우선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망상과 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루 밥 세 끼 먹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며 애써 다투어가면서 살아간다. 머릿속과 마음이 헝클어지고, 항상 몸뚱이에 마음이 집착해 가지고, 너니 나니 따지면서 생사고해에서 부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깨쳐서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날이 덥거나 춥거나 상관하지 않을 만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을 안심할 수 있다. 이 마음만은 생명이 있어서 생각할 줄을 안다. 물질도 허공도 선도 악도 여성도 남성도 아니어서 어떻게 변할 게 없으며,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수도 없고 그러므로 마음은 태초 이전부터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며 성불하여 중생제도 하는 그 시간까지도 그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뿐이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경지, 나도 없고 남도 없는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없는 것마저 없는 경지, 상응을 해서 계합하고자 하거든 둘이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석가여래와 내가 둘이 아니고, 개와 내가 둘이 아니며, 저 태양과 지구와 내가 둘이 아니다 . 이렇게 마음이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서면 모두가 하나가 된다. 실은 하나도 아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 포용되었으면서 하나라는 숫자와 형상을 표현하여 내세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나의 품에 들어와 있으며, 있는 그대로 나의 마음속에 포용된다. 그러나 억지로 내 것이라고 끌어들이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들이 어디론지 달아나버리고 포용되지를 않는다. 제멋대로 앉도록 가만히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모든 것이어서 둘이 아닌 것이다. 주관과 객관은 거리가 없다. 둘이 아니다. 우리가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거리를 인정하게 된다. 발과 머리 사이는 거리가 있겠지만 나하고 거리가 없는 것처럼, 나와 몸뚱이는 어느 부분과도 거리가 없다. 그러므로 등도 나의 등이면서 나이며, 앞가슴도 나의 앞가슴이면서 나다. 그저 그렇게 생긴 것이 나이므로 앞도 뒤도 없는 것이다. 머리가 위에 있고 발이 아래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머리가 나의 위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이 나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계란 없다. 우리의 마음은 작을 때는 바늘 끝 위에도 올라앉을 수도 있고, 또 클 때는 온 우주를 둘러싸고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그 크고 작은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무슨 거리나 경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가장자리를 볼 수도 없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있다 없다는 말이 모두 들어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있다고 해도 안 되고, 없다고 해도 안 되며, 또 뭐라고 해도 맞지 않지만 표현할 글자가 하나도 없다. 본래 그 내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있을 유(有)’ 자가 본래 ‘없을 유’ 하였더라면 없다는 뜻으로 통할 것이고 없을 무자가 있을 무라고 하였더라면 있다는 뜻으로 통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어느 누가 처음 정해 놓았으면 그렇게 쓰이기 마련인 것이니, 글자 그 자체는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를 않다. 없다는 말은 우리의 약속일 뿐, 말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없다는 말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있다 없다는 말은 확실히 없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관념에 따라 그렇게 표현하였을 뿐, 실제로는 없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꿈같다. -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불법을 많이 들어도 별도리가 없고, 부처님 말씀 한마디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꿈이다. - 이렇게 생각해야만 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이(利)도 해(害)도 될 게 없는데, 다만 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하루 밥 세끼를 먹어야 하고, 또 전쟁을 하기 위해서 새파란 젊은이가 총 메고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인간은 싸우는 그 시간까지도 살아보려고 애쓴다. 육신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공포증이 나고 억울하고 분해한다. 마음을 똑바로 갖는다는 것- 그것이 마음의 본연자세 갖기이다. 이것을 인식하게 되면 거기에 가까워진다. 아니 아무 것도 인식할 것이 없다. 왜 그것이 꿈이기 때문에 우리는 꿈에 부처님을 만났다. 옥황상제를 만났다. 예수를 만났다. 극락에 갔다. 천당에 갔다. 절에 갔다. 예배당에 갔다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것도 한낱 꿈이다. 가령 개미 같은 곤충도 기어가다 앞에 무엇이 툭 떨어지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촉각을 세워가지고 가만히 더듬거리면서 따져본다. '어떤 다른 짐승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가, 어떤 해를 입히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연하게 위에서 흙덩이가 굴러 떨어진 걸 가지고 내가 놀란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살핀다. 그렇게 살피다가 무슨 소리가 더 안 나면 안심을 하고 가던 길을 다시 간다. 이것도 역시 사유이다. 자기의 행동을 생각하여 보고, 그 생각으로부터 판단이 나서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참선을 하면 마음을 깨칠 수 있다. 정신이란 것은 생명의 충동이요, 환경의 충동으로 일어난 것이며, 제멋대로 일어난 것일 뿐 본래는 아무 것도 없다. 외계로부터 충동을 받기 전에는 아무 생각도 안 일어난다. 그러므로 충동에서 일어나는 생각, 그것이 어떻게 나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그때그때 임시로 생긴 것이어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거기에 충동을 받아 생각을 일으키지만, 본래는 이러한 충동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바지 껍데기 모양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냐? 나는 도대체 어떤 실재인가? 여기서 '나'라는 말, '나'라는 생각, 이것이 무엇이냐, 천파만랑(千波萬浪) 파도치는 환경의 충동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찾을 수 없다. 바람 따라 이는 물결처럼 우리는 이리저리 불려 다닌다. 불려 다니는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결국 '나'라는 생각을 내게 된다. 이것 하나뿐이다. '나'라는 생각, 이거 하나 가지고 우리가 '나'라고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만일 '나'라는 생각을 놓아버린다면 죽어버린다. 일체 행동도 없어지고, 아무 연구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근본적으로 이 나를 내놓고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 막 태어나셔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이라고 하셨다. 이 독존의 독이 뜻하는 것은 영원불멸한 것,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면서 영원히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나’라고 하는 데에는 ‘안 죽으련다.’ 하는 뜻이 도사리고 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이 '나'라는 생각이다. 이 '나'라는 한 생각이 없다면, 목을 베어가든 옷을 벗겨가든 두들겨 맞든 아무 말도 안할 것이다. 죽어도 죽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 단지 '나'라는 주체, 이놈 속에 나는 영원히 안 죽는다 하는 뜻이 들어 있다. 동시에 나란 절대자유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남한테 구속을 안 받으려고 하고, 어디까지나 자유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영원불멸인 동시에 절대자유를 뜻한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된 말인고 하니, 바로 생명이란 말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말이다. 살아 있다는 말은 이 생명이 온갖 조화를 부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
[출처] 제6장 삶의 보람을 찾을 때|작성자 곡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