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학자들이 혹 이해하기를 불교에서 무가 유로 되고, 유가 무로 되고, 또 유와 무가 하나가 되고, 옳은 것(是)이 옳지 않은 것(非)이 되고, 옳지 않은 것(非)이 옳은 것(是)도 되고,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고 하는 그런 것이 변증법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는데 그건 잘못 아는 것입니다.
변증법으로 유명한 헤겔이 대문호 괴테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괴테] : 참 잘 오셨습니다. 당신의 그 변증법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헤겔] : 변증법이란 모순의 논리입니다.
[괴테] : 모순의 논리라고요? 그렇다면 선이 악이 될 수 있고, 비(非)가 시(是)로 될 수 있습니까?
유가 무가 되고, 무가 유로 될 수 있습니까?
[헤겔] : 그거야 판단하는 사람의 두뇌여하에 달린 것
아닙니까?
[괴테] : 그렇다면 당신의 변증법을 연구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생학을 많이 연구하여 두뇌좋은
사람을 자꾸 많이 만들어 내면 그게 좋지, 변증법을 연구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이렇게 헤겔이 크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辯證法)과 중도(中道)> 정(正), 반(反), 합(合),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정에서 반이 나오면 그것을 융합시켜서 합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 논리는 중도(中道)와 비슷한 듯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정(正)이라는 사상이 나와서 이것에 모순이 생기면 다시 반(反)이라는 사상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것이 서로서로 종합이 되어서 합(合)이라는 사상이 나온다는 이론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정, 반, 합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불교의 중도법문은 상대모순의 상통상합(相通相合)을 말하는 것이며, 헤겔의 변증법은 상대모순의 발전적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시간의 간격이 없는 모순의 직접적 상통을 말하고 헤겔의 변증법은 모순의 대립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서 발전적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퇴옹 성철- |
장
자크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은 선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손으로 옮겨지면 악으로 변해진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악으로 이끈다고 하는 것은 무명과 인위, 기교를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기세간이라고 합니다. 만들지 아니하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자연적인 현상, 사람의 생각과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위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모든 문명들은 무엇을 하고자 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중생이 바라는
욕구,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여러 측면에 연구하고 도전하고 모험을 걸고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하고 관계가 있을까요? 그건 중생세계를 만들어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지, 불성의 마음을 깨닫는 것에 목적을 두고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것은 아닙니다.
루소라고 하는
분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은 선이다 라고 했는데, 자연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지해서 창조됐을까요? 누가 자연을 만들었지요?
[대중] 인간이 의식으로 창조했습니다.
그렇지요. 사람이
의식으로 자연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지 않으면 자연이라는 게 존재를 못합니다. 사람이 자연이다 선이다 악이다 변증법이다 자연과학이다 인문과학이다 전부
마음으로 만든 것인데, 그래서 유심조(唯心造)라고 합니다.
제 스스로
아무것도 없는데 자연이라는 게 어디서 존재할 수가 있어요? 상대성 원리에서 경계를 놓고 자연이니 뭐니 하는 건데, 자연이라는 것이 제 스스로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을 공부해서 깨달아서 알아야 되는데 모르니까 막연히 ‘자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루소라는
분이 자기가 알아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서 말한 것이지, 자연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아마
노자가 무위자연지도라고 한 말을 후대 학자인 루소가 영향을 받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만, 노자도 무위자연지도라고 그렇게 결론지어서 말을 세웠습니다. 무위자연지도라고 하면 그 자체가 큰 허물이 되는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결론적으로 정해놓는 건 일체 안했습니다. 그걸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 했는데 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법무아(諸法無我)라, 일체 모든 법이
딱히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제법이
무아이기 때문에 무유정법(無有定法)입니다.
정한 바
없는 제법이 무아이지만, 중생을 상대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하자니 형식적으로 이름을 마음이다 자성이다 하고 붙여서 쓴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능가하는 분은 없습니다.
공자는 정치를
하자면 현인과 재물과 위정자의 의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노자는 그렇게
되면 경쟁과 투쟁과 시기질투가 난무하게 된다. 다만 자기 능력대로 성심껏 하느냐 안하느냐에 문제가 있다. 자기 역량 따라서 적으면 적은대로 크면 큰대로 성심껏 열심히 한대로 상(償)이 있어야 투쟁과 시비 질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떻게 해야된다고 하셨습니까?
불성(佛性)의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
(190630 학산대원스님 소참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