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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비스님이 가려 뽑은 불교 명구 365 ㉻ 11월30일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0.02|조회수30 목록 댓글 0


 




                                                                    1130


                                         예컨대 소가 수레를 끄는데

                                         만약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如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

                                              여 우 가 거   거 약 불 행  타 거 즉 시  타 우 즉 시


                                                                      - 남악 회양


                                                                     ......

        이 글은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의 가르침이다. 남악 회양 선사는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으로서 성은 두()씨이며 산동성(山東省) 출생이다.

   15세에 호북성 형주에 있는 옥천사의 홍경(弘景) 율사를 따라 출가하고 혜안(慧安) 스님

   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뒤에 조계산(曹溪山)에 들어가 육조 혜능 스님 밑에서

   크게 깨달았다.


   714년 남악의 반야사에 들어가 30년 동안 교화를 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전등법계(傳燈法系)를 남악하(南岳下)라고 하는데, 청원 행사(靑原行思) 스님의 청원하

   (靑原下)와 함께 후세의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기에 의하면 사법(嗣法)의 아홉 제자

  중 마조 도일 선사가 이를 이어받아 임제종(臨濟宗)과 위앙종(潙仰宗)을 발전시켰다.


        여기에 소개하는 유명한 말씀도 마조 도일 선사와의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전등록(傳燈錄)』에 의하면 마조 스님이 전법원(傳法院)에서 매일 좌선을 하고 있었다.

   남악 회양 선사는 그가 훌륭한 법의 그릇임을 알고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대덕은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남악 선사는 벽돌을 하나 가지고 와서 절 앞 바위 위에서 갈고 있었다. 그것을 본

   마조 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않는다면 좌선을 한다고 어찌 부처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조 스님의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남악 선사가 하신 말씀이 곧 다음과 같다.

        "예컨대 소가 수레를 이끄는데 만약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마조 스님이 아무런 말이 없자 남악 선사가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앉아 있는 부처를 배우는가?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이란 앉고 눕는 데 있지 않으며, 만약 앉아 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일정한 형상이

   아니다. 어디에 머무름이 없는 이치에서 마땅히 취하거나 버리지 말라. 그대가 만약 앉아

   있는 부처를 배운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만약 앉아 있는 것에 집착한다면

   그 바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리라."

        마조 스님은 이 가르침을 듣고는 마치 제호(醍醐)를 먹은 것과 같은 감동을 받았다.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어찌 보면 뜻은 매우 평범하지만,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다.

   그만큼 평범한 진리가 위대하다는 뜻이다. 차가 멈췄을 때 차를 매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운전 기사에게 차를 운전하라고 부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제일 현명하고 지혜롭게 산다는 수행자들이 그 간단한 문제를 놓치고, 근본(根本)이 아닌

   지엽(枝葉)인 일에 마음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지엽인지를

   몰라서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가치관이 아직 바르게 서지 못해서인가?


       유교(儒敎)에도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지말(枝末)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으니,

   그 앞과 뒤를 분별하여 알면 곧 도()에 가깝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根道矣]."라고

   하였다. 또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라."는 말도 있다. 당연히 말이 마차 앞에서 끌어야

   한다. 선원에서는 '몸을 조복(調伏) 받는다'는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곧잘 한다.


        몸을 다스린다고 하여 억지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가 몸에 여러 가지 병을 얻은

   예도 적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찾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찾는다.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사진/산판 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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