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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비스님이 가려 뽑은 불교 명구 365 ㉻ 12월15일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0.18|조회수33 목록 댓글 0


 




                                                              1215


                            조사의 뜻은 공한 듯하면서도 공하지 않다.

                         신령한 기틀이 어찌 있고 없음에 떨어지겠는가.

                            삼현도 오히려 이 뜻을 밝히지 못하거늘

                           십성이 어찌 능히 이 종지를 알 수 있으랴.

                  그물을 뚫고 달아난 금빛 고기도 오히려 물에 젖었거늘

                        머리를 돌리는 돌말은 가리개를 벗어났도다.

                       은근히 그대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말하노니

                        서쪽에서 오고 동쪽에서 온 것을 묻지 마라.


                              祖意如空不是空 靈機爭墮有無功

                                         조 의 여 공 불 시 공   영 기 쟁 타 유 무 공

                              三賢尙未明斯旨 十聖那能達此宗

                                         삼 현 상 미 명 사 지   십 성 나 능 달 차 종

                              透網金鱗猶滯水 廻頭石馬出紗籠

                                         투 망 금 린 유 체 수   회 두 석 마 출 사 롱

                              慇懃爲說西來意 莫問西來及與東

                                         은 근 위 설 서 래 의   막 문 서 래 급 여 동


                                                  - 십현담 2, 동안 상찰


                                                       ..............

       조사의 뜻이란 곧 조사의 마음이며 부처님의 마음이다. 불교에서의 궁극적인 의미,

   곧 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를 말한다. 임제 스님이 스승 황벽 스님에게 불법의

   명확한 대의를 물었다가 60방을 흠씬 두들겨 맞았다. 바로 그것이 조사의 뜻이다.

   또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특별히 중국에 건너온 것의 의미가 곧 조사의 뜻이다.


        그래서 흔히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건너온 뜻입니까?" 하고 묻는다.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라고 대답했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처럼 조사의 뜻이라는

   말에는 인생사와 세상사의 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또한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

   불법의 명확한 뜻, 그리고 달마 대사가 동토(東土)에 오신 뜻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았던 동안 상찰 선사는  이「십현담」을 통해 이와 같이 중요한

   조사의 뜻을 밝혔다. 조사의 뜻은 텅 비어 공한 것 같으나 단순한 공()이 아니다.

   신령스러운 기틀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전체 작용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그것을 어떻게 "있다, 없다"라는 말로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고, 없는가 하면 온 천지 우주와 삼라만상

   (森羅萬象)에 꽉 차 있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色卽是空空卽是色]

   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수행을 쌓아 십주(十住)와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에 오른 보살 현자들도

   그러한 조사의 뜻은 오히려 밝히지 못한다. 즉 삼현위(三賢位)에 오른 사람도 "뜰 앞에

   서 있는 잣나무"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불법(佛法)의 명확한 뜻은 모른다.


        십지(十地)의 지위에 오른 성자(聖者)들도 이 종지를 알 턱이 없다.  십지 보살은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60방을 때린 뜻도 모르고,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의 불법이

   간단하구나."라고 한 뜻은 더더욱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조사선(祖師禪)이 여래선(如來禪)을

   능가하는 것이다.


       불조(佛祖)의 향상사(向上事)는 밀밀(密密)해서 바람도 통하지 않는다.

   마치 구름 속에서 새가 날아간 자취를 찾는 것과 같고 물속에서 고기가 노닌 흔적을

   더듬는 것과 같다. 


      동안 상찰 스님은 스스로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으로 조사의 뜻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간다.

       "크게 깨달았다는 사람도 아직은 깨달았다는 자취가 남아 있다. 깨달았다느니

   증득했다느니 하는 자취나 흔적이 완전히 없어져서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굴레에서

   멀리 벗어나야만 조금 비슷하다. 그대를 위하여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가만히 일러

   주리니, 서쪽에서 왔느니 동쪽에서 왔느니 아예 묻지를 말라."라고 하였다.


        사람에게야 동쪽이 있고 서쪽이 있고 피차가 있지만, 심성에야 무슨 동쪽이니

   서쪽이니 피차니 하는 것이 있겠는가. 문자를 부정하고 오직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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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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