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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비스님이 가려 뽑은 불교 명구 365 ㉻ 12월20일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0.23|조회수29 목록 댓글 0


 





                                                           1220


                   용궁에 가득 찬 대장경이 모두 의사들의 약방문이요

                  학수에서 마지막에 설한 것도 그 이치가 깊지 못하네.

                  참되고 텅 빈 진리의 세계에서 겨우 한 생각 일으키면

                 이 염부제의 세계에서는 벌써 팔천 년 세월이 지나가네.


                                龍宮滿藏醫方義 鶴樹終談理未玄

                                           용 궁 만 장 의 방 의   학 수 종 담 리 미 현

                                眞淨界中纔一念 閻浮早已八千年

                                 진 정 계 중 재 일 념  염 부 조 이 팔 천 년


                                                  - 십현담 5-2, 동안 상찰


                                            ................

         불교는 그 역사가 오랜 만큼 무수히 많은 경전, 경, 율, 론, 삼장(經律論,三藏)을

   갖고 있다. 그 서술 형식과 내용을 12가지로 분류하여 십이부(十二部)로 구분하기도 한다.

   후대에 선불교에서 저작한 선종의 서적들을 선장(禪藏)이라고 하여 사장(四藏)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불교에서 이 모두를 용궁만장(龍宮滿藏), 또는 용궁해장(龍宮海藏)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여러 경전 중에서 가장 방대하다고 하는『화엄경』은 용수

   보살이 바다 밑 용궁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할 때 '깨달음의 바다'라는 의미의 각해(覺海)라는 말을 쓴다.

   불교의 모든 경전과 어록들은 깨달음의 드넓은 바다에서 출현하였다는 뜻이다.

   즉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들은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하여 저술되었든지 모두가 깨달은

   사람[부처님]의 지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친설(親說)이 아닌

   내용을 부처님이 설했다고 해도 큰 잘못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실제의 바다 밑 어느 용궁에서 가지고 나왔다고 왈가왈부하는

   사례가 작금(昨今)에도 많은데, 불교 경전 특유의 비유와 상징성을 도외시한 발상이다.


        아무튼 그 많은 경전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모두가 의사들이 환자의 병에 따라 처방을

   내리는 처방전과 같은 것이다.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라는 병을 치료하는 팔만 사천

   가지의 치료법이다. 그 외에는 별다른 뜻이 없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사라쌍수[鶴樹]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설하신 최고 최후의 경전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그렇게 깊거나

   현묘하다고 할 수 없다.


       옛사람들도 말하기를, "무수한 단풍잎[경전] 하나하나가 모두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황금색 돈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無數黃葉葉 盡作止啼錢]."

   라고 하였다. 아이들도 돈을 좋아하므로 황금색으로 물든 단풍잎을 돈이라고 속여서

   울음을 멈추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진리의 세계에서는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만약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한 생각에 따라서 즉시 팔만 사천 생각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더 넓은 우주 만유를 건립하고 인식하는 것도 그들이 일으킨 한 생각을 따라

   우주와 삼라만상들이 따라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은

   일체가 그렇게 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십현담」에서 말하는 염부제란 우리의 한 생각에

   의해서 만들고 펼쳐진 모든 시간과 공간들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아는 사람들은 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법을

   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자리야말로 궁극의 경지며 불생불멸의 본래 자리이기 때문

   이다. 

       불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꾸준히 발전해 왔다.


   소승불교(小乘佛敎)를 버리고 대승불교(大乘佛敎)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 그렇고,

   대승불교마저 버리고 선불교(禪佛敎)로 발전한 것이 그렇다. 특히 그간의 모든 불교

   전적들을 무시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기치를 든 선불교는 2,600년 불교사에 큰 획이다.

   이「십현담」또한 선불교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제는 또다시 이 시대에 알맞은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리라.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이 그대로 완전무결한 부처의 사람이라는

   인간불교(人間佛敎)가 바로 그러한 새 옷이 될 것이다.

  

                                                                            사진/오대산 적멸보궁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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