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려시대 큰 스님으로
보조국사 지눌스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합니다.
스님은 조계종의 중흥조이시며,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강조하셨으며,
계초심학인문, 원돈성불론, 권수정혜결사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겨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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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스님은 고려 의종12년(1158년)에
아버지 정광우, 어머니 조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병이 잦았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부처님 전에 나아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만일 아들의 병이 낫도록 가피를 내려주시면,
출가시켜 불문에 바치겠습니다.”
그 후 신통하게 병이 완쾌하자 종휘(宗暉)선사를 은사로 출가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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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2년(1182년) 승과에 급제하고 불교정화를 위해 정혜결사를 맺었습니다.
평창군(나주) 청량사(淸凉寺)에서 수행하던 중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던 중
다음 구절을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6근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렵혀지지 아니하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
이 때 스님은 법열의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제 1차 심기일전(心機一轉=초견성/初見性)이 일어난 것입니다.
스님은 당시 고려 불교가 선교와 양종이 극한 대립을 이루고 있어
서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으나 워낙 대립이 심해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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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선종과 교종의 합치 부분을 찾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現) 장자의 <<화엄신론(華嚴身論)>>을 열람하다가
“몸은 지혜의 그림자요 국토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도 맑으며, 크고 작은 것을 서로 용납함이 인드라망 그물과 같다.”라는
문구에 이르러 책을 덮어두고 탄식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교(敎)가 되고 조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禪)이 되었다.
부처나 조사의 말씀과 마음이 다르지 않는데
어찌 선종과 교종이 저마다 익힌 것에 집착하여 서로 다툰단 말인가?”
스님은 여기서 선과 교가 다를바 없다는
선교일원(仙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이 때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아 ‘원돈성불론’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로서 선교의 합일 융화의 전통을 확립한 것입니다,
이 때 스님은 제2차 심기일전(心機一轉이 일어난던 것입니다.
스님은 교(敎)를 공부한 다음 선(禪)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수행법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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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심기일전(心機一轉)으로 대오(大悟)하신 때는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수행할 때입니다.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는 적정삼매(寂靜三昧)의 경지에 안주하여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송나라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의 어록을 열람하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 인연을 따르는 곳,
생각하고 여의치 않고 참구해야만 한다.”라는 문구에 이르러
홀연히 눈이 열리면서 본문(本文)을 활연히 체득하였습니다.
이후 스님의 도력을 좇아 수많은 수행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때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에 머물며 많은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무턱대고 시간 없애며 참선만 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면
그 요령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울러 문자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간화선법을 취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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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열반직전 선법당(善法堂)에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3번 구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나의 생명은 너희에게 다려 있다.”
그 때 한 스님이 일어나 물었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이 열반하는 것과
오늘 스님이 열반하는 것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너는 여지껏 중노릇하면서 같고 다른 것만 배웠느냐?”
그리고는 주장자를 구르시고 임종게(臨終偈)를 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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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어지러우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방이 깊을수록 등불은 더욱 밝아지도다.
그대에게 권하노니, 마음그릇을 잘 정돈하여
감로의 장물을 기울이지 말지이다.
파난월난현 실심등갱광
波難月難現 室深燈更光
권군정심기 물경감로장
勸君整心器 勿傾甘露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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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주장자를 3번 구르시고
“천간지 만 가지 법문이 모두 이 속에 들어 있다.”하시고
그 자리에서 단정히 앉은 채 입적하셨습니다.
세수 53세 법랍46세 였습니다.
입적하여 화장할 때까지 7일 간 스님의 안색이 생시와 다름없이
편안하셨고, 화장 후 오색사리가 수백 개나 나왔습니다.
스님의 사리는 수선사(송광사) 북쪽 탑에 봉안되었으며,
고려 희종 임금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事)란 시호를 내렸습니다.
오늘날까지 스님의 선교합일 정신과 청정수행 법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비불교정토회
정인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