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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가득한 방

[스크랩]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1 / 성철스님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1.11|조회수27 목록 댓글 0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1 / 성철 스님

(1982년 1월1일, 법정 스님과의 대담 : 이은윤 기자 정리) 🍵 큰스님 모시고 대담을 갖기 위해, 안거 중인데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흔히 밖에서 말하기를 큰스님 뵙기가 몹시 어렵다고들 합니다.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부처님께 3천 배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일반인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째서 3천 배를 하라고 하시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 계실 때부터 그런 가르침을 시행하게 되셨습니까? "흔히 '3천 배 하라' 하면 '나를 보기 위해' 3천 배 하라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승려라면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느 점으로 보든지 내가 무엇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3천 배 기도를 시키는 입니다.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자신을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3천 배절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하는 사람이 잘 안 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3천 배는 그전부터 시켰는데, 본격적으로는 6.25사변 뒤 경남 통영 안정사 토굴에 있을 때부터입니다. 또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만이라도 해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같은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그래도 자꾸 찾아오길래 할 수 없이 철망을 쳤지요. 그래서 성전에서 철망 치고 한 10년 살았습니다. 철망을 치고 산 것도 겉으로 보면 도도한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부처님을 찾으시오'하고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무엇으로 부처님을 대행하겠습니까. 나야 그저 산중에 사는 사람이니 산사람이지요" 🍵 요즘 세태를 보면, 날이 갈수록 인간 사회가 험악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사회에서 존립의 터전으로 내려온 기존의 가치 체계나 규범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산중에 들어앉은 사람이니 세상일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새 풍조를 보면 너무나 물질에 치중한 것 같아요 물질에 치중해서 물질에 자꾸 끄달리다 보니 이성을 상실하고, 자연 탈선 행위를 하게 되지요, 그 근본 원인을 보면, 서양의 물질 문명을 너무 맹종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래도 정신 문명에 있어서는 동양이 서양보다 수승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 병을 고치려면 정통적인 동양의 정신 문화를 새로 복구시켜 정신이 위조가 되어 물질을 지배해야 합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 인간은 자기 상실을 하고, 완전히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약육강식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참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면 물질 문명을 배제한다기보다는, 물질이 없으면 살지를 못하니까, 동양의 정신이 주가 되고 물질이 종이 되어 따라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서양 문명에서도 물질이 발달할수록 인격은 더 상실되고 동시에 악행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는 그 근본 책임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나는 정신적인 지도 역할을 맡고 있는 종교인에게 있다고 봅니다. 살인, 강도 등 범죄가 있다면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신적인 지도 책임을 맡고 있는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참다운 지도를 하지 못하고 참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근본 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독립된 현상만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희들 자신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에게도가 아니지요 '에게도'가 아니고, 실제로 책임은 근본 책임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인이란 정신을 지도하는 근본 책임을 맡았으니, 예전 스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극중한 죄인은 내가 아니고 누구냐'고 했습니다. 종교인 자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종교인이라는 사람, 성직자라는 사람부터 근본 자세를 바로잡아서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정신적 지도부터 잘못되었다고 하면 밑에서 지도 받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 근본 책임을 맡은 종교인, 성직자인 우리가 참회해야 한다고 봅니다." 🍵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입니다만, 물질적인 부를 인간의 행복으로 여기던 가치관, 즉 물질적인 척도로서 인간의 의미를 재려던 생각은 이제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이 의지할 가치 의식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근본 가치는 인격에 있는 것이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 잡으려면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부터 회복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본래 인간은 절대적 존재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물질만능에 그 존엄성이 묻혀서 인간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깨끗한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해서 아무 티끌도 없는 것인데, 먼지가 잔뜩 앉을 것 같으면 본래의 착용을 못 합니다. 즉 거울 본래의 근본 역할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본래의 깨끗한 거울, 때묻지 않은 거울로 복구만 시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지를 닦아내야 합니다. 먼지만 닦아내면 그만이지 거울을 딴 데 가서 구할 것도 없고, 또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래 깨끗한 인간의 절대성, 인간 존엄성을 복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인간 회복이란 본래의 청정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지요? "그렇지요. 본래의 청정한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 무슨 새로운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본시 깨끗한 거울을 두고 어디 가서 새로운 거을을 만들겠습니까? 거울에 낀 먼지만 닦아내면 됩니다. 그러면 본시 거울 그대로입니다." 🍵 세계의 많은 학자들, 특히 토인비 같은 역사가는 현대 문명의 해독제로서 불교사상을 크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야말로 인류 구제의 길잡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의 인류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내가 무슨 불교를 잘 안다고 자처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데 있습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그리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 세계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 여기에 우리 불교의 근본이 서 있습니다. '성불한다'고 하여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고 하는 것은 실은 방편설입니다.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는 것은 부처 아닌 중생을 부처로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고, 현실 이대로가 극락 세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본래 부처인 이것을 바로 보고, 현실이 본래 절대 극락 세계인 이것을 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중생,중생', '사바세계, 사바세계' 해대는가? 내가 늘 비유로써 말합니다. 대낮에 광명이 우주에 충만하게 쏟아져도 눈먼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설사 눈감은 사람이 광명을 보지 못해도 광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해는 떠서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감고 있어서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현실 이대로가 본래 절대인 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근본은 마음의 눈을 바로 뜰 것 같으면 광명을 따로 찾을 것도 없고 부처를 따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여기도 극락 세계, 저기도 극락 세계이지요,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부처님도 방편으로 서방의 극락 세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눈을 감고 잘 모르니, 어떠한 표준을 말하기 위해서 서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조스님 말씀에 '동방 세계 사람이 염불해서 서방 세계에 간다면 서방 세계에 있는 사람은 염불해서 어디로가느냐?'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좋은 말씀입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본래 광명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자체가 본래 광명입니다. 전체가 본래 부처고 전체가 본래 극락세계인 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섬기자' 이것입니다.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으로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불교 믿는 처음 조건에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 모셔라, 모든 존재를 부모로 섬겨라,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섬겨라 하는 3대 조건이 있습니다. 요새 흔히 '구제 사업'이라 하는데, 이 말이 우리 불교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입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는 옷 없는 부처님, 양식 없는 부처님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옷이 없으니 불쌍하다, 저 사람이 양식이 없으니 불상하다 그러니 불쌍해서 구해 준다는 것은 상대의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말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불교에는 '구원'이란 없습니다. 구원이란 불쌍하고 못난 사람을 구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늘 말합니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고 그냥 돕는 것이 아닙니다. 저쪽 상대가 부처님이기때문에 '불공'이다, 이 말입니다. 남을 돕고 모시는 것이 불공이다 이 말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만약 배가 고프다면, 아버지가 불쌍해서 밥을 가져다 드립니까? 큰일 날 소리입니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 불쌍하니까 구병한다고하면 그것도 자기 아버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 생활을 불공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상대가 부처인 줄 알면서 부처님으로 섬기고 존경하고 봉양한다면 극락 세계를 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대로가 극락 세계가 아닐래야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는 이것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출처: 자기를 바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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