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에서 벗어나려면'
/ 법정 스님
어제는 비가 내린 끝에 활짝 개어
서쪽 바닷가 싼타모니카 비치에 나가
수평선으로 해가 잠기는 일몰을 지켜보았었다.
일몰을 보고 있으면 하루의 끝을 실감하는 한편,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그 하루도
끝이 났구나 하는 허무감이 든다.
저녁 노을 앞에 설 때마다
우리들 삶의 끝도 그처럼
담담하고 그윽할 수 있을까 묻고 싶어진다.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꽃이 피었던 그 가지에서 무너져 내리듯이,
삶의 가지에서 미련없이 떠나 대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불교를 믿는다는 한 청년이 불쑥 이런 질문을 하였다.
"불교 경전 가운데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까?"
아마도 그 젊은이는 자기 자신이
불교 경전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건성으로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 젊은이뿐 아니라
대개의 불교도들은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 비해
경전에 대한 이해나 탐구적인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말라'
고 한 그 뜻을 잘못 받아들여,
부처님의 교법을 아예 무시한 채
불교를 이해하려는 모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중아함 염처경>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이와같이 가르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뛰어난 길이 있다.
그것은 곧 사념처법이다.
과거 모든 여래(如來)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열반이란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온갖 번뇌와 갈등이 사라져
평온하고 청정하게 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킨 말이다.
니르바나란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태,
그래서 적멸(寂滅)이라고도 한다.
그 열반(곧 깨달음)에 이르려면 다음 네 가지 즉
몸(身신)과
느낌(受수)과
마음(心심)과
현상(法법) 에 대해서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꾸준히 정진하며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버려야 한다.
관찰이란 안으로 면면히 살피는 일이다.
선(禪)은 물론 인도에서 싹텄지만
그 발달은 중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은 중국불교인 셈이다.
그 이전에는 안으로 면밀히 살피는 관법(觀法)이
수행의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닦으신 것이 이 관법이었지
중국의 선불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럼 다시 경전으로 들어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어떻게 몸을 바르게 관찰할 것인가.
숲속이나 나무 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똑바로 하고 앉아
오로지 일념으로 먼저 호흡을 조절한다.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도 짧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
생각을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호흡에 대한 관찰은 자기 삶의 확인이다.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거나 내쉬었다가 들이쉬지 못하면
우리 삶은 멈추고 만다.
그걸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 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일에 생각을 기울여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생각을 호흡에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각이란 내딛는 말과 같아서
한군데 매어두지 않으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진다.
흩어지려는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 들이기 쉬운 방법이
자신의 호흡을 면밀히 살피는 일이다.
경전은 계속된다.
"다음으로 이 몸을 관찰하라.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 때에는 앉고 누웠다는 상태를 바로 보라.
그래서 생각이 그 몸의 동작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라.
그 어떤 사물에도 생각을 팔지 말고
오로지 이 몸 관찰하는 데에만 머물게 하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일 따로 생각 따로 흩어지게 되면
일에 능률도 안 오르고 일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일과 생각이 하나가 되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하면
그 일을 통해 일의 기쁨만이 아니라
삶의 잔잔한 기쁨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말은
자기가 하는 일과 생각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따로 흩어져 있는 상태임을 드러낸 소식이다.
일을 할 때에는 내 온몸과 마음이 그 일 자체가 되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좌선을 할 때도 그렇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할 때에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는 일에 실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일 뒤에 가려진 세계까지도 인식할 수 있다.
일을 통해서 이치를 터득한다는 뜻이다.
다시 경전의 말씀,
"이와같이 몸의 굴신과 동작과 상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한 생각도 흩어지지 않게 되면,
몸에 대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 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이 세상 어떤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혜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들 마음의 빛이다.
이 마음의 빛은 생각을 한곳에 기울여 몰입하고 집중함로써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선정(禪定)과 지혜의 상관관계는 물과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
물이 일렁일 때는 거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물결이 잔잔히 가라앉을 때만
그 위에 둘레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즉 지혜의 달이 비친다.
하루 한때라도 우리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자세히 살피고,
몸이 움직이고 멎을 때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생각이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훈련을 익혀야 한다.
정진(精進)이란
잡념을 떨쳐버리고 일념으로 꾸준히 나아간다는 뜻,
이런 정진 없이는 내가 내 인생을 살면서도
알짜로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집착을 혼돈하고 있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구다.
이 이기적인 욕구로써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서로가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하겠지만,
원천적으로 볼 때는 줄수록
더욱 맑고 투명하고 넉넉해지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받으려고만 하면 더욱 큰 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욕구가 따르고 갈증상태를 면할 길이 없다.
주는 사랑에는 집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꾸 받기만을 원하다 보면
사람이 무디어지고 오만해지고 불만과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괴로움의 뿌리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대개 집착이 도사리고 있다.
집착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몸에 대한 관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몸을 관찰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육체가 애초에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사실대로 관찰해 보라.
이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된 것임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솜씨 좋은 백정이 소를 잡아 사지를 떼어 펼쳐놓듯이,
이 몸을 네 요소로 갈라 눈앞에 드러내 보아라."
좀 끔찍한 표현이지만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이와같이 자기 자신을 낱낱이 해체해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 라고 고집하거나 집착할게 없어지고 만다.
'나'의 실체란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온(五蘊 : 다섯 가지 뭉치) 즉 물질적인 요소인
이 육신(이를 色이라고 한다)과
정신작용(이를 受 想 行 識으로 나눈다)으로 화합해 있는 것을
우리는 '나'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분석적이다.
세계와 인생에 대한 지적 작업은 주로 관찰과 분석이었다.
투철한 관찰로써 있는 그대로 보았고,
치밀한 분석으로써 대상을 여러 가지 요소로 나누어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아주 이성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들뜨게 하거나 흥분시키지 않고
차근차근 그 원천을 살펴
잘못된 이해를 돌이켜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서 찾도록 한다.
몸에 대한 관찰은 계속된다.
"숲속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불 수 있듯이,
내 이 몸도 언젠가는 그와 같이 되고 말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 모양이 눈앞에 역력하면
모든 허망한 대상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숲속에 버려진 시체의 해골,
한두 해 지나 무더기로 쌓인 해골,
다 삭아 부스러진 해골의 잔해를 보는 것과 같이
자신을 주시하라.
내 몸도 마침내는 저렇게 되고 말 것이라고 관찰한다면,
세상의 온갖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몸에 대해서 이와같이 관찰을 해야 한다."
병원에서 우리 몸의 일부를 찍은
엑스선 사진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살과 피부는 어디로 가고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기분 나쁜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사진은 도무지 내 몸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사실이 지금의 내 몸인 것을.
이런 뼈가 잘났다고 우쭐거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헐뜯고 싸운다면
가소로운 일이 아닌가.
이런 뼈가 다름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고 생각을 돌이킨다면
집착할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기분 나쁜 글을 읽어 마음이 언짢겠지만,
우리가 피차에 이런 인간의 실상을 알았다면
그런 뼈로 돌아가기전에 후회 없는 삶을 이루도록
생각을 거듭거듭 돌이켜야 한다.
휴정(休靜) 선사가
죽은 스님을 두고 읊은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올 때는 흰구름 더불어 왔고
갈 때는 밝은 달 따라서 갔네
오고 가는 그 주인은
마침내 어느 곳에 있는고. <88. 1>
출처: 법정스님 수상집<텅 빈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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