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대승기신론 소·별기」
원효 저, 최세창 역주
2562. 5. 17
Ⅱ. 정종분正宗分
3.해석분
대승기신론소기회본 권삼 大乘起信論疏記會本 卷三
【논論-27】 삼세三細 ⇒ 심층의식
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 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 以依不覺故 心動說名爲業. 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 以依動故能見. 三者境界相. 以依能見故境界妄現. 離見則無境界.
다시 불각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세 가지의 모습(相)이 생겨서, 저(彼) 불각과(與) 상응하여 여의지 않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마음이 움직이는(心動) 것을 설하여 업業이라 부르는(名) 것이다. 깨달으면(覺)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마음이) 움직이면 곧 고苦가 있으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 두 번째는 아민我慢이니, (마음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며(能見),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보는 것도 없다.(無見).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보는) 능견(主)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보이는) 경계(客)가 망령되게 나타나는 것이니, (보는) 능견能見을 여의면 곧 (보이는) 경계도 없을 것이다.(주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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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04) 아만我慢은 보는 주체이며, 경계상境界相은 보이는 객체이다. 보는 주체인 내(我)가 보지 않으면 보이는 객체인 경계는 없는 것(無見)이다. 업상業相이 주객 미분未分의 상태라면, 능견상과 경계상은 주객으로 나뉜 분별의 상相이자 차별의 상이다. 선사들의 “일체경계에 끄달리지 말라”는 법문에서 일체경계는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객체이며, 끄달리지 않는 것은 보는 주체로서의 나(我)이다. 아무리 많은 경계가 있을지라도 내가 보지 않으면 하나의 경계일 뿐 나에게 아무런 고苦를 주지 못한다. “일체경게에 끄달리지 말라”는 법문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宗眞 寫經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