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오가해 번역 32분 중 매 분마다 그 말미에 붙이는 간단한 해설
-무비스님-
금강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고래로 몇 가지 분류방법이 있으나 천친의 27가지 의심을 끊는 것으로 보는 면과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의 32분으로 나누어 보는 면의 두 가지의 해석법을 가장 많이 취하여 왔다. 그 중에서도 소명태자의 32분류법은 너무나도 알려져서 거의 금강경 해석의 정설로 되어 있다. 이 번역에서도 32분에 의거하여 간단한 해설을 붙인다.
1. 법회인유분
금강경을 설하게 된 동기와 원인이다. 금강경은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반야를 근본사상으로 삼는다. 반야는 다시 무상과 무주와 묘행으로서 그 뜻을 삼는다. 그렇다면 무상과 무주와 묘행을 설하게 된 동기와 원인은 무엇인가. 그 구체적인 표현으로 부처님은 걸식을 하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일체상이 없어야 반야가 빛난다. 반야를 빛나게 하는 아, 인, 중생생, 수자, 사상의 소멸을 부처님은 걸식으로 보여주었다. 걸식에서 마하반야가 빛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발을 씻으셨다. 철저히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여기에서 반야를 보아야 하리라. 더 이상의 친절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이 세상 사람치고 어느 누가 발을 씻지 않는 이 있으며 자리를 펴고 앉지 않은 이 있으리오. 사상 없이 사는 사람 드물다, 그러나 반야로서 사는 사람 더욱 귀하다. 이것은 금강경을 설하게 된 인연이 아니라 금강경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2. 선현기청분
반야는 흔히 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공의 이치를 가장 잘 안다는 수보리가 평소에 의심스러웠던 점과 알고 싶었던 점들을 부처님께 묻는 대목이다. 즉 보리심을 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다시 말하면 반야의 삶은 무엇이며 부처로서의 삶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꼭 밖을 향해서 남에게 물어야 하는가. 무엇이나 다 수보리 자신 속에 있고 어떠한 길도 다 수보리 자신 속에 있고 어떠한 길도 다 수보리 자신이거늘 어찌 밖을 향해서 찾는단 말인가. 밖에서 과연 찾아지고 얻어질 것인가. 그러한 사실을 이미 부처님은 걸식으로 다 보여줬다. 자리를 펴고 앉음으로써 다 보여줬다. 인간의 본래면목을. 반야의 참모습을.
3. 대승정종분
대승의 가장 바르고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대승이란 시대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진리를 뜻한다. 모두를 다 저 언덕에 실어 나르는 큰 법문인 것이다.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써라. 이를테면 온갖 여러 가지의 중생들을 다 제도하되 실은 제도한 것이 없어야 한다. 보살이란 어떠한 경우라도 상이 없어야 한다. 만약 상이 있으면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반야의 인생이 아니다. 부처의 인생이 아니다. 사람의 참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본래면목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부처란 것도 중생이란 것도 나눌 수 없는데 무슨 제도한다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제도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제도에 대한 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보살의 조건은, 사람의 조건은, 사람의 참모습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입장이야말로 가장 크고 바른 가르침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진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 묘행무주분
아름다운 행위는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보시란 보살의 생활이다. 사람들의 생활이다. 그 삶이 색, 성, 향 미, 촉, 법, 그리고 어디에라도 안주하거나 집착한다면 이미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보살의 삶이 아니다,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다. 안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온 우주를 다 채우고도 남는다. 온 법계를 다 채우고도 남는다. 아니 그러한 삶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며, 세계적 삶, 우주적 삶이다. 반야적인 삶이다.
5. 여리실견분
진리를 곡해하지 않고 사실대로 보는 길이다. 진리 그 자체로서의 여래를 육신의 모습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모든 형상이란 다 실체가 없이 허망한 것. 그 모든 현상들을 볼 때 이미 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진리인 여래를 볼 수 있으리라고 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형상 뿐이다. 진리의 모습 부처의 모습 이란 어디에 있는가. 실상의 모습이란 이 형상을 떠나서 달리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리를 펴고 앉아볼 일이다. 철저히 앉아 볼 일이다.
6. 정신희유분
이 시대에 있어서 올바른 믿음을 갖기란 희유한 일이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남김없이 알게 하였다. 그래서 더욱 어렵고 희유한 일인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이는 저 모든 것이 다 여래다. 이 도리를 바로 믿어 안다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상에 매달리지 않으면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주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 법이니 진리니 하는 것에도 매달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법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에야 말 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나의 설법을 물을 건널 때만 필요로 하는 뗏목처럼 알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믿고 이해하는 지혜의 삶이란 과연 어렵고 희유한 것인가.
7. 무득무설분
참다운 성품은, 참다운 진리는 본래 텅 비어서 일체 상과 일체 법이 없다. 맑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아무런 할 말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고받을 일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묵묵히 앉아나 있을 수 밖에. 본래 이와 같은 이치라면 무엇이 깨달음이며 무엇이 설법이란 말인가.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위법에서 온갖 차별과 분별들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차별과 분별들은 그 근본이 무위법임을 알아야 하리라.
8. 의법출생분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다 이 반야바라밀의 법에 의해서 출생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은 무엇인가. 반야의 삶이다.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이다. 왜 그런가. 모든 것은 내 자신 속에 구족되어 있으며 내 자신은 이 우주만유를 창조하는 주인이며, 못 생기고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참으로 더없이 훌륭한 존재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을 가져다주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출생하는 곳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어찌 반야바라에 치우쳐 있을 것인가. 불법에 빠져 있을 것인가.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불법이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9. 일상무상분
절대적이며 완전한 불성의 실다운 모습은 모양다리가 아니다.
모든 수행의 결과는 이 실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보살과 부처에 이르기까지 어떤 결과도 본래 모양다리 없는 실상에서 이루어 졌고 그 하나하나의 성과가 실상반야의 현현이라면 결과의 모양도 있을 수 없으며, 얻었다는 마음의 흔적도 추호라도 남아있어서는 진정한 성과가 아니다. 하물며 청정행을 좋아하고 적정행을 좋아하는 수보리에 있어서랴.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일도 그와 같은데 작은 선행을 하고 반딧불과 같은 이름을 얻고 조그마한 공을 세우는 그런 일에 생색을 내고 자신을 과시하고 선전을 해서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래서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급기야 작은 공덕마저 날려버리는 일을 무심코 한다면 그 꼴이 어떻겠는가. 그것은 밝은 삶이 아니다. 무지몽매한 삶이다.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어리석은 삶이다. 어떤 경우라도 상에 집착할 일이 아니다.
10. 장엄정토분
아름다운 불국토를 꾸민다.
이 땅 진정한 불국토 건설과 정토의 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커다란 사원이 곳곳에 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것, 그것이 정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다. 길이 넓혀지고 공장이 서고 빌딩이 높이 솟는 것도 아니다. 이 땅에 반야행자가 있어야 한다. 공의 실천자가 있어야 한다. 모든 현상은 연기의 이 법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아는 이가 있어야 한다. 반야바라밀법으로 이 세상을 정화했으되 정화했다는 마음의 흔적이 없어야 한다. 색, 성, 향, 미, 촉, 법 어디에도 안주하지 말라. 부디 안주하고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써보자 매이지 말고 살아보자. 결코 안주하거나 집착할 일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반야의 삶이 실현 되리라. 이 땅이 정토화 되리라.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이라. 순간순간 깨어있으면 곳곳이 모두 안락국이다.
11. 무위복승분
무위반야의 복이 가장 훌륭하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인생을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 과연 어떤 인생이 가장 훌륭한 인생일까. 어떤 삶이 가장 복된 삶일까. 혹 어떤 사람이 이 세계에 가득한 보물로써 남을 위해 보시를 하고 얻은 보람과 행복을 우리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큰 찬사를 보내야 하리라. 그러나 어떤가. 그것은 언젠가 끝날 때가 있는 것. 언젠가 소멸할 때가 있는 것. 그러므로 그것은 유위의 행복. 다함이 있는 복덕이라 한다. 완전한 행복은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완전무결한 행복이 있다. 그것은 이 금강경을 가지는 일이다. 반야바라밀을 가지는 일이다. 반야를 모두에게 나누는 일이다. 이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행복보다도 값진 것이며 영원하고도 완전무결한 행복인 것이다.
12. 존중정교분
올바른 가르침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가르침도 많고 주의주장도 많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 값있는 가르침이며 존중되어야 할 사상인가. 그것은 곧 이 경의 가르침이며, 반야바라밀의 사상인 것이다. 반야는 만유의 진정한 생명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를 수지 독송하고 수지 독송하는 사람은 마땅히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는 최상의 진리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자며, 그는 깨어있는 사람이며 그는 참사람이기 때문이다.
13. 여법수지분
이 반야바라밀을 여법하게 받아 가지라.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족하고 수승하고 청정해서 생사까지 초월하여 있는 이 도리를 무엇이라 일러야 좋은가. 언어와 문자가 붙을 수 없고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그 자리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그러나 그 자리는 금강반야바라밀이란 말이 해당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은 일찍이 금강반야를 말씀 하신 적이 없으며 저 작은 먼지도 말한 적이 없으며 큰 세계도 말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일체 상이 없다. 법도 없다. 법 아님도 없다. 얻을 것도 없다. 설할 것도 없다. 성과도 없다. 정토장엄도 없다. 이 몸마저 없다라고 하시고 여기에서 금강반야바라밀을 받아가지라 하신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인가.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이런 대화가 있다. 어느 날 수보리가 좌선하고 있으니 공중에서 꽃을 뿌리거늘 수보리가 “꽃을 뿌리는 자가 누구인가?” “하늘의 제석입니다.” “어찌하여 꽃을 뿌리는가?” “존자께서 반야바라밀을 잘 설하심을 존중히 여기어 꽃 공양을 올립니다.” “내가 무엇을 설하였는가?” “말씀 없으심이 참다운 설법입니다.”
14. 이상적멸분
모든 상을 떠나면 밝은 지혜로서만 이해되는 적멸의 실다운 상이 나타난다.
수보리가 지금까지의 법문을 듣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린다. 처음 있는 일이며 희유한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을 듣고 신심이 청정해진다면 곧 실상이 밝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일가는 공덕,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입니다. 부언하건대 실상이란 모양다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실다운 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상이란 무엇인가. 일체의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를 뜻한다.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란 본래로 생기지도 아니하고 소멸하지도 아니하며 원만하고 걸림이 없으며, 평등하여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우주만유보다도 먼저 있으되 시작이 없으며, 우주만유보다 더 뒤에 있으되 마침이 없다.
그래서 실상은 곧 나이며, 곧 너이다. 실상은 곧 반야이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이러한 실상을 깨달은 사람은 일체상을 떠났을 것이므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며 바로 부처님이다.
15. 지경공덕분
무상과 무주와 묘행의 반야경을 수지하는 공덕은 한량이 없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양상은 저마다 각양각색이다. 과연 어떤 삶이 가장 값있고 보람된 삶일까. 쉽게 단언하지는 못하리라. 사람들은 흔히 생명을 보존해 가는 것만으로도 숭고하고 존엄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라고 했다. 그리고 세존은 “너희들이 그 소중한 목숨을 남을 위해서 무수히 버렸을 때 얼마나 많은 칭송과 찬사를 받겠는가. 그 명예와 공덕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렇더라도 그것보다 천배 만배 값지고 소중하고 찬란히 빛나는 삶이 여기 있다. 그것은 곧 반야의 삶이다. 반야의 삶이야말로 참 생명의 삶이다. 무상, 무주, 묘행의 삶만이 가장 존귀하고 위대한 삶이다. 너희는 부디 그렇게 살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반야란 무엇인가. 낙엽이 지자마자 눈발이 휘날린다.
16. 능정업장분
금강경을 수지하면 그간에 지은 모든 죄업을 깨끗이 소멸하고 깨달음을 성취한다.
금강경은 참으로 위대한 경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갈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 금강경만 수지 독송하면 그 죄업은 소멸하고 지옥은 즉시 사라진다. 불전에서 천배 만배 절을 하고 피를 토하도록 염불을 해서가 아니고 이 금강경을 수지해서이다.
금강경은 최상의 경이다. 세존은 연등불 시절로부터 오면서 팔만사천만억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 앞에서 갖가지 공덕을 쌓았다. 그래서 오늘날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오로지 이 금강경만 수지하면 세존이 갖춘 모든 공덕과 지혜와 위덕을 하루아침에 갖출 수 있다.
불교적 삶(수행)의 내용을 간단히 두 가지로 표현한다. 업장을 소멸하는 일과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가는 일이다. 그것들을 다 충족시켜주고 다 해결해 주는 경이 있다. 곧 이 금강경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듣고 믿지 않을 지도 모른다. 비방을 퍼 부을지도 모른다. 이 경의 의미는 참으로 불가사의 하다. 과보 또한 불가사의 하다. 못난 사람들이 쉽게 믿는다면 족히 금강경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7. 구경무아분
온 법계에 참다운 반야성품이 본래로 충만해 있다. 여여하고 밝고 깨끗하다. 어디에도 나라 할 것은 없다.
이 17분의 문답은 앞의 제2분과 제3분의 문답과 말은 같다. 그러나 뜻은 다르다. 이를테면 거친 질문과 미세한 질문의 차이이며 초심자의 입장에서의 질문과 익숙한 사람의 경우에서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친 번뇌를 끊는 일과 미세한 번뇌를 끊는 일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같아도 뜻은 전혀 다르다. 부처님의 대답도 또한 마찬가지다.
바다에선 오직 짠물뿐이듯이 반야의 세계에선 오직 반야만 있을 뿐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무상이요 무아다. 반야의 세계에선 어떠한 경우라도 무상이며, 무아뿐이다. 그래서 구경에도 무아라고 하지 않았는가. 끝까지 철저히 밝고 깨끗하여 어디에도 나란 없다. 라고 한 것이다.
반야는 초심자든 익숙한 사람이든 무상무아로서 종을 삼는다. 범부든 성인이든 무상무아로서 종을 삼는다. 그래야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 된다.
온 법계 진진찰찰이 다 불성을 갖추었고 반야를 갖추었으나 나에 매달리고 상에 매달려서야 어찌 일체법이 다 불법이 되겠는가.
18. 일체동관분
한 몸으로 같이 본다.
끝없는 우주 한량없는 세계 가운데에 있는 별의 별 종류의 많고 많은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다 한 가지 망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한 망념이 없어지면 중생들의 한량없는 갖가지 마음들이 텅 비고 깨끗하여진다. 그렇게 되면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이 곧 중생의 마음이다. 오직 맑고 깨끗한 깨달은 마음뿐이다. 중생과 부처를 다 같은 한 몸으로 같이 볼 뿐이다. 즉 천지는 여아동근이요 만물은 여아일체라. 하늘과 땅은 나와 그 뿌리가 같고, 온갖 만물은 나와 한 몸이리라.
그렇다면 부처님이 갖춘 특별한 다섯 가지 눈이 있은들 달리 무엇을 보리요. 한 몸을 보는데 다섯 눈은 필요치 않다. 아니 한 몸이라면 무엇이 무엇을 본단 말인가. 한 몸으로 같이 본다는 말도 실은 맞지 않다. 그러므로 한 몸인 그 마음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나눌 수 없다. 공간도 시간도 혼연히 하나이거늘 무슨 과거 현재 미래를 분별할 수 있단 말인가.
19. 법계통화분
이 무상무주의 반야를 온 법계에 널리 펴서 법계에 있는 중생들을 다 제도한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도만행의 요체는 상에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 이 우주에 가득 찬 칠보로 사람들을 위하여 베풀었을지라도 그 마음 가운데 베풀었다는 의식이 있으면 모두가 유루복이 된다. 그러나 그 마음 가운데 베풂에 대한 의식이 없으면 모두가 청정한 무루복이 되어 이 우주를 덮고도 남는다. 자성의 반야복은 본래로 모양다리가 아니다. 한정된 모양다리가 아니므로 비로소 그 복덕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사람사람이 모두 이 금강반야의 복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미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이 있을 수 없다. 법계에 있는 중생을 다 제도하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20. 이색이상분
모든 형색과 형상과 그에 따른 모든 인식을 떠나야 여래를 본다.
일체의 형색형상과 그 인식이 남아 있는 한은 무량공덕의 반야의 삶은 펼쳐지지 않는다. 여래의 삼십이상이 아무리 거룩하다 하여도, 여래의 팔십종호가 아무리 훌륭하다하여도, 그리고 여래의 설법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여도, 그것은 모두가 눈을 멀게 하는 것, 귀를 멀게 하는 것. 색상에 눈이 멀면 법계에 충만해 있는 여래는 보지 못하리라. 자신의 반야신을 보지 못하리라.
21. 비설소설분
일체법이 본래로 텅 비어 청정하다, 설할 법도 없으며 설할 말도 없다.
설법이란 부처님이 몽매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십 구년간 말씀하신 저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이 금강반야는 사람사람이 본래로 원만히 구족하고 있는 것인데 누가 누구에게 법을 설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만약 여래가 설법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곧 여래를 비방하는 일이다. 그리고 여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이 된다.
이 반야의 도리는 학문과 지식으로 될 일이 아니다. 배우고 가르쳐서 될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가르칠 부처도 배울 중생도 설 땅이 없다.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란 본래로 중생이 아니야. 그 이름이 중생이며 그냥 중생이라고 할 뿐이다.
22. 무법가득분
일체법이 본래로 텅 비어 맑고 깨끗하다. 깨달음을 달리 얻을 수도 없으며 얻었다고도 할 수 없다.
부처님은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하는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도를 남에게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다 그 형제에게 말하지 않는 이 없을 것이며, 도를 남에게 줄 수 있다면 그 자손에게 주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법을 가히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법에 속박된 것이고 법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야 바야흐로 이름이 해탈이 된다고 했다.
사람사람이 다 아뇩보리거니 어찌 보리로서 보리를 얻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23. 정심행선분
청정한 마음으로 모든 선을 닦아 행한다.
무엇이 청정한 마음인가. 무상 무주의 마음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마음이다. 모든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는 마음이다. 공의 마음이요 반야의 마음이다. 이러한 청정의 마음으로 모든 선을 닦으면 그는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하리라.
24. 복지무비분
천하를 덮는 복으로도 반야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남을 위해 보시한 그 복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금강경의 이치를 통달하여 반야의 지혜를 성취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미칠 수 없다. 그것은 유위와 무위의 차이이며 유루와 무루의 차이이며 유한과 무한의 차이이며 상대와 절대의 차이인 것이다. 자신의 무한 절대의 반야를 알지 못한 채 천하를 덮을 복이 있다한들 어찌 제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유루의 복과 무루의 지혜를 비교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25. 화무소화분
중생을 교화하였으되 일찍이 교화한 바가 없다.
수보리야 여래는 일찍이 누구를 위해서 법을 설한 적도 없고 중생을 교화한 적도 없느니라. 만일 내가 법을 설하였으니 중생을 교화 하였으니 하면 그는 여래를 모르는 사람이며 여래를 비방하는 사람이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상이 없는 사람이며 속박이 없는 사람이며 어디에 안주함이 없는 사람이니라. 여래가 중생을 교화 했다고 하면 여래를 상에 집착한 사람으로 만들고 말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사람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참 성품에는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차별이 없으므로 실로 교화하는 부처님과 교화 받는 중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26. 법신비상분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참답고 여여한 진리의 본체는 형상이 아니요 생멸도 아니다. 법신은 어떠한 경우라도 상일 수가 없다. 비록 상을 동해서 법신을 유추해 알려고 하더라도 또한 옳지 않다. 상을 통해서 법신을 알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진리의 당체인 여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래는 스스로 “외형적인 모습으로써 나라고 하거나 설법의 모습으로 나라고 여기는 자가 있으면 그는 사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여래는 꿈에도 보지 못한 자다.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라고 했다.
법신은 모양이 아니나 늘 참되고 항상함을 드러낸다. 들에 날아다니는 새도, 청정한 산빛도 동일한 반야의 광명·본래의 면목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고향에 돌아가리라.
27. 무단부멸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상이 끊어져서 텅 비었으나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단멸이 또한 아뇩보리는 아니다. 여래는 상호를 쓰지 않음으로써 보리를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여래는 모든 법이 텅 비어 없음만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집착하기 좋아하는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거기에 매달려 병을 만든다. 그래서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니할 수도 없다. 여래를 보고 보리를 얻으려면 무상무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상이요 무주라고 집착하면 그 또한 상인 것을. 여래는 일찍이 상을 긍정한 적도 부정한 적도 없었느니라.
28. 불수불탐분
보살은 복덕을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 자연히 복덕이 따른다. 무상보리가 따른다. 그러나 보살은 무상이며 무아다. 반야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무슨 복덕을 바라며 무슨 보리를 바라겠는가. 바라지 않으니 달리 받을 리도 없다. 일체법이 텅 비어 아가 없을 뿐이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구하지 않고 얻는 것이고 탐하지 않고 갖는 것이다. 주어서 받고 탐해서 얻는 것이 별 것이겠는가. 사람사람이 본래로 산 있고 물 있는 곳에 영화도 없고 욕됨도 없는 몸인 것을.
29. 위의적정분
그 자리는 본래 위의와 거동이 텅 비어 고요할 뿐이다.
여래란 본래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것. 그래서 여래라 하거늘 만일 사람들이 여래가 온다느니 간다느니 앉는다거니 눕는다거니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가고 옴이 있으면 상이 있고 상이 있으면 집착이 있다. 그래서야 어찌 시방과 삼세에 충만하고 융통자재 하겠는가. 다만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고 물이 흐리면 달이 숨는다. 물이 맑고 흐림을 인연할 뿐이요 달이 오고 감이 아니듯이 한마음 청정하면 부처가 나타나고 한마음 어두우면 부처가 숨는 것은 마음이 청정하고 흐림이 있을지언정 부처가 오고 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30. 일합이상분
한 덩어리인 세계의 본질과 현상은 하나도 아니며 여러 개도 아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작은 미진으로 형성 되었으며 작은 미진들이 모여서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실존하는 한 덩어리라고도 할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미진이라고도 할 수가 없다. 세계고 미진도 근본은 텅 빈 것이다. 일체만유가 또한 텅 빈 것이다. 만유의 본질인 이치와 밖에 나타난 현상의 관계도 마치 미진과 세계의 관계와도 같다. 상이 곧 이치이며 이치가 곧 상이다.
법신과 화신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법신이 곧 화신이며 화신이 곧 법신이나 그러나 법신과 화신은 같다고도 할 수 없으며,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집착할 일이 아니다.
31. 지견불생분
안다. 본다. 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과 알음알이로 생각하고 헤아려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끊어져서 생기지 않아야 비로소 반야바라밀의 실답게 알고 실답게 보는 것이 살아나게 된다.
여래가 언제 아견, 인견, 중생견을 말한 적이 있었던가. 여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여래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에 대하여 이렇게 안다. 이렇게 본다라고 하는 것이 없어야 된다고 알아야 하며, 보아야 하며 믿어야 된다.
백가지로 많이 아는 것이 구하는 것 없음만 같지 못하다. 다만 구함이 없고 집착함이 없음을 배우면 곧 마음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 그를 일러 부처라 한다.
32. 응화비진분
응신 화신은 참다운 몸이 아니다.
색신의 형상을 나타내서 감응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응신 화신은 참다운 여래의 법신이 아니다. 불법에 마음을 낸 사람들은 반드시 이 금강경을 읽으라. 그리고 남을 위해서 해설하여 주라. 경 전편을 못하겠으면 사구게 만이라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 일러주라. 그리하면 그 복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리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이 세상에 그 어떤 좋은 일을 해서 지은 복보다도 천배 만배 수승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 일러주는 것이 되는가. 상에 집착하지 말라. 모양다리를 취하지 말라. 너다 나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남자다 여자다. 선이다 악이다. 중생이다 부처다. 성인이다 범부다. 하고 하는 따위의 분별을 하지 말라. 그런 차별상에 집착하지 말라. 만상의 참모습은 그와 같은 차별상이 아니다. 사람의 본래면목은 그와 같은 생김생김이 아니다. 참으로 있는 모습으로 있으라. 참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있으라. 이것이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일이다. 여여부동 하라. 이것이 진실로 반야의 삶이며 여래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