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금강경 강의
依法出生分 第八 제8분-1
須菩提가 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是福德이
수보리 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卽非福德性일새 是故로 如來가 說福德多니이다
즉비복덕성 시고 여래 설복덕다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이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이 복덕이란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을 말합니다. 그토록 귀한 보물로 그렇게도 많이 보시하였으므로 당연히 돌아오는 복덕이 많을 것입니다마는 복덕성(福德性), 즉 우리들의 본성자리에는 하등의 이익이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진실 생명에다 비교해 보면 무한한 허공 중의 먼지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느냐 하면 성품(性品)이란 본래로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 얻었다 잃었다 하는 양변(兩邊)에서 모두 떠나 공적한 자리이고 또한 걸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일반적인 상식 내지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념(無念)의 세계와 우리의 사변(思辯)을 초월하는 무한(無限)의 세계에 대한 언급입니다. 무한의 세계를 흔히 허공에 비교하는데, 허공은 많다, 적다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많은 허공, 적은 허공 하는 말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이런 허공과 같이 무량(無量) 무변(無邊)한 것이 바로 우리들 마음의 복덕이고 진실한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새지 않아 참답고 청정한 복덕(福德)인 것입니다. 얕은 소견에서 볼 때에는 '복덕이 많다'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적으로 생각해 보면 '많다'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시간만 있으면 다 계산을 해낼 수가 있고, 언젠가는 다 써서 흘러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물질로써 보시하여 돌아오는 복덕이 많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다 할 때가 있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덕성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 생명과 비교해 보면 그것은 결국 샘이 있는 유루복(有漏福)에 지나지 않음을 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若復有人이 於此經中에 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其福이 勝彼 하리니 기복 승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녀서 다른 사람을 설한다면 그 복이 저 앞의 복보다 스승하리니.
『금강경』 전체나 아니면 사구게만이라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보다 훨신 스승합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지혜의 눈을 뜬 사람이 보면 정말로 그러합니다. 『금강경』의 도리나 사구게의 가치는 진실로 다함이 없고 결코 새지 않는 큰 복인 것입니다. 사구게의 복만 해도 이러할진대 『금강경』전체를 공부하고 아침 저녁으로 독송(讀誦)힌다면 그 복은 과연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온 우주를 다 덮고도 남을 것입니다. 상을 떠나보낸 그 자리에서 활짝 드러나는 우리들 본성의 위력을 남을 위해 설해주어 그 사람의 본성도 일깨워 주는 그 공덕은 정말 어떠한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수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보시할 게 뭐 있느냐. 『금강경』만 잘 지니고 읽으면 되지."해서도 곤란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도 그릇에 담겨 있어야 우리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법당이 있어야 귀중한 법회가 열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적인 딧받침을 한다는 것은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 유루복(有漏福)이 모체(母體)가 되어야 무루복(無漏福)을 닦을 수가 있습니다. 또 경을 수지(受持)한다는 것은 그 경의 이치와 도리가 나의 마음 속에 무르녹아서 온전히 나의 본성을 꽃피운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경을 가방에 넣고 다니기만 해도 웬지 마음이 든든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나들이 때나 먼 여행길에 꼭 경을 챙겨 가지고 틈틈이 읽는 태도는 바람직합니다. 혹 바빠서 한구절도 못 일게 되더라도 경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마음가짐이야 말로 무엇보다도 칭찬받을 만합니다. -계속-
=유정=
부처님 친견하기
나와 인연 맺어진 모든 이들이며,
모든 사소한 존재일지라도
그 모두는 나의 부처님이십니다.
남편이 남편이 아닙니다.
법계에 편만하신 법신 부처님께서
남편이라는 인연으로 나투신 것이지요.
자식이 자식이 아닙니다.
나와의 인연이 자식일 뿐이지
모두가 부처님의 현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법계에 가득한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은
인연 따라 그 어떤 모습으로든
모습을 나투어 주십니다.
사랑한다고 사랑이 아니고,
미워한다고 미움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미운 인연으로 나툰 것이고,
또 사랑이라는 인연으로 나툰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연이란
내가 만들고 내가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내가 만든 인연이 법계에 비추어져서
남편으로 자식으로
미운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러니 어때요...
상대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내 인연의 나툼이니 모든 것은 내 문제인 것이지요.
상대는 그대로 온전한 부처님일 뿐!
문제는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법신 부처님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편만하셔서
어떤 실체도 없고 고정된 모습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연에 의해
남편으로도 자식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도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투실 수 있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
그와의 인연이 미움인 것이지요.
그러니 상대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미운 인연을 탓하고
그 미운 인연을 잘 닦아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친견하려고
애를 쓰고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늘 한결같이 기다려 주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저
가까운 부처님 맞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 두면 되는 것이지요.
--- 법상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