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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논문] 현대사회에 있어서 염불행자의 믿음 (한보광 스님)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2.07.21|조회수22 목록 댓글 0
現代社會에 있어서 念佛行者의 믿음



한 보 광*(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


·목 차·
Ⅰ. 머리말 Ⅳ. 不滿時代
Ⅱ. 不信時代 Ⅴ. 不確實時代
Ⅲ. 不安時代 Ⅵ. 맺음말



Ⅰ. 머리말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과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대답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것인가?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이러한 답은 철학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종교적으로 해결해 보고자 한다. 현대사회의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병리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이점을 염불행자로서 아니 염불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해야 정토교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무척 바쁘게 살아 왔다. 교통의 발달로 먼 거리를 단시간에 갈 수 있게 되었으며, 방안에 앉아서도 전세계의 뉴스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바쁘게 많은 량의 신문과 방송으로 전세계의 소식을 모두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농업기술의 발달로 계절에 관계없이 맛있는 과일을 먹게 되며,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길어지고 있다. 화학섬유의 발달로 화려한 옷감이 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자동차 등 기계문명으로 인류는 편안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바쁘고, 편리하고, 편안하며, 맛있고, 아름다우며, 빠른 것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필자는 현대사회의 4가지 부제에서 온다고 진단하고자 한다. 즉 불자로서 신앙의 기본인 三寶에 대한 不信과 眞如自性에 대한 不信과 因果에 대한 不信 및 阿彌陀佛에 대한 不信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특히 염불행자들이 이와 같은 4가지의 不信을 가진다면 결코 올바른 염불행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不信時代

오늘날 현대사회는 不信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신앙의 기본인 三寶를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교신앙의 기본인 삼보를 믿지 않을 때 불교는 존재할 수 없다. 초기교단의 구성은 깨달은 석가모니불의 佛寶와 그의 가르침인 三法印, 四聖諦, 十二緣起 등의 진리인 法寶와 그의 교단을 이루고 있는 僧團인 僧寶로 이루어졌다. 초기의 출가는 이러한 삼보에 귀의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삼보는 불교교단의 기본이며,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경전이나 대승경전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신앙의 구심점이다. 따라서 각 경전에서는 念佛 念法 念僧을 설하고 있으며, 이를 찬탄하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신앙방법으로 제시하는 念佛도 三念法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염불방법은 정토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형태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稱名念佛은 염불만이 아니라 稱名念法, 稱名念僧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阿彌陀經}을 비롯한 각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다. 즉 극락세계에서는 念佛念法念僧을 찬탄하는 법문이 흘러나온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염불행자들은 염불은 중시하면서도 염법이나 염승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 불교인들은 삼보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다. 즉 삼보를 불신하고 있다.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남아 있으나, 스님들께 귀의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고 있을까? 여기에는 불자들의 승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승보가 승보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승단에 대한 불신이다. 승보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寶性論}의 三寶偈에 의하면 僧寶의 가치는 淸淨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如實修行과 遍修行이라고 하는데 如實修行이란 참다운 수행 즉 여법한 수행으로 모든 중생의 자성이 청정한 경계를 봄으로서 無障함을 말하며, 遍修行이란 如實知가 무변경계하여 無 함을 말한다. 또 {大乘起信論}에서는 眞如와 三寶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도 승보는 자리이타를 위해 바른 수행을 하는 출가자를 말하고 있다. 소승의 {南傳涅槃經}에서는 승보란 화합이라고 한다.
오늘날 승보를 불신하는데는 올바른 修行과 淸淨性의 결여 및 和合性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승가의 청정성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계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계는 승가를 청정케 한다. 둘째는 승려의 무소유를 말할 수 있으며, 셋째는 자비, 넷째는 평등, 다섯째는 비폭력 등을 승려의 청정성이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승단에서는 이를 하루 속히 회복하여야 삼보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삼보 중 불보와 법보만 존재하지, 승보는 존재가치를 잃고 말 것이다. 이는 불교의 장래에 있어서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승보의 노력과 불자들의 귀의가 하나가 되었을 때 참다운 불교가 정립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正法은 출가자들에게 부촉하였고, 護法은 재가자들에게 부촉하셨다. 불교에는 분명히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자들이 正法과 護法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재가자들은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사원에 드나들 뿐이다. 출가자들이 사원을 건립하고 가람을 유지 관리 보수해야 하며, 운영도 해야한다. 재가자들은 단순히 참배하고 기도하며, 자신이 필요할 때만 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본래 사원의 건립과 유지보수는 재가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책임하게 여기 저기를 다닐 뿐이지 불자로서의 책임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출가자들은 자신의 본분인 출가 수행보다는 가람의 유지보수와 경영에 더욱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그런데 재가자들은 모든 잘못을 출가자들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승단을 향하여 비난과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는 재가자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한편 출가자들은 출가 본분의 뜻을 망각하고 사원의 유지보수와 경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사원이 피폐해졌고 수행공간이 부족하다가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수행공간이 확보되었으므로 가람불사보다는 인재불사가 더욱 중요하다. 한 마음을 돌이켜 사회와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삼보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우리생활의 근본을 흔들어 놓고 있다. 즉 이는 진리에 대한 불신이며, 인간의 근본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인이 삼보를 불신한다는 것은 이미 불자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설사 삼보 중 승보가 일시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한다면, 재가자들이 나서서 이를 시정하고 바르게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방관자적 자세로 비방만 하고 있는 것은 불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삼보 중 불보와 법보만 믿고 승보는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삼보는 하나이므로 셋 중 둘만 믿고 하나는 믿지 않는다는 것은 셋을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불법승 삼보의 성품은 동일하며 이를 모두 믿어야 바른 믿음이라고 {大般涅槃經}에서는 설하고 있다. 즉 삼보 중 어느 하나만 믿고 다른 것은 믿지 않을 경우 삼보를 모두 불신하게 된다. 불법승 삼보를 모두 귀하게 여기고 아낄 때 우리 불교는 제자리에 돌아갈 것이다. 승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신도들은 단결하여 출가자 중 옥석을 가리어 내어야 하며, 보시와 공양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출가자를 하나같이 매도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또 한편으로는 훌륭한 승보를 길러야 한다. 훌륭한 출가자가 있을 때 이 나라의 불교는 밝아질 것이다.
이러한 불신의 벽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현대인들이 가장 믿지 못하는 집단은 政治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대신하여 살기 좋은 국가를 건설하고 나라 살림을 바르게 살아 달라고 하여 뽑은 정치인들에 대한 不信이 많다. 이들은 선거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권리를 위임받아 나라 살림을 꾸려간다. 국민들은 선거과정에서 이들의 선거공약을 보고 믿음직하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그런데 그들은 선거공약은 그럴듯하게 내걸어 당선이 되고 나면 公約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역대로 많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공약을 착실하게 실천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당선만 되면 공약은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 이를 다시 반복한다. 그러나 국민들은 속는 줄 알면서도 이를 믿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거짓말을 워낙 잘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속아 넘어 간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발전의 가장 큰 저해요소는 정치에 대한 불신인 것 같다. 그렇다가 보니 국가 정책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믿지 않고 있다. 국민들이 불신하는 국가정책이란 수행될 수 없다. 모든 정책의 실행에는 국민들의 호응과 지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시각에서 보는 정치인들의 상은 부정과 부패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정된 수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소비는 엄청나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바로 부정과 부패 이권개입 등 부조리의 고리를 단절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높은 권력을 가졌거나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진 종교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를 신앙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선거의 표밭으로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거철만 되면 사찰이든 교회든 상관없이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선거가 끝나면 모른척한다. 선거와 종교라는 화두는 대단히 흥미롭다. 이들이 각자 종교를 가진 신앙인 임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일삼고 空約을 남발하고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믿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불자 정치인이라면 삼보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므로 자연히 국민에게도 신뢰받는 정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Ⅲ. 不安時代

현대인들은 무엇인가 不安해 하고 있다. 불안한 이유가 무엇일까? 불교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自性이 청정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淸淨無垢의 자성이 있지만, 번뇌에 가려서 참된 자기 즉 眞我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정한 자성이 번뇌에 쌓여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佛性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 초조해 하고 있다.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불성의 소유자가 우리들임에도 그것을 믿지 않고 있다. 부처님과 나와는 너무나 차별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大乘起信論}에서는 四信 가운데 가장 처음이 眞如에 대한 믿음이라고 한다. 즉 "근본에 대한 믿음으로 진여법 염하길 좋아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진여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大乘起信論}에서 자세히 정의하고 있다. "오직 一心이 眞如이다" 또 "眞如란 相도 없으며, 말이 다한 자리이고, 말로 인하여 말을 없애며, 진여의 본체는 없앨 것도 없으며, 일체 법이 모두 참으로 있기 때문에 眞이라고 한다. 또한 가히 세울 것이 없이 일체법이 하나같이 똑같이 있으므로 如라고 한다. 마땅히 알아라 일체법은 가히 설할 수도 없으며 가히 염할 수도 없음로 眞如라고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진여란 일심이며, 일체법이 참으로 있으므로 眞, 일체법이 모두 같으므로 如라고 한다. 진여에는 번뇌가 없는 如實空과 無漏性功德이 구족한 如實不空으로 말하며, 이를 眞如自性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는 진여자성인 일심이 있어서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성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고 자기의 능력에 한계를 두고 있다. 부처님 같은 진여자성이 있음을 확실하게 믿고 수행정진하면 우리들은 반드시 성불이 가능한 것이다. 그 날이 금생에 올 수도 있고, 몇 생 후에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정토교학에서는 금생에 念佛三昧에 들어서 見佛할 수도 있으며,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생에는 염불공덕으로 반드시 왕생하여 성불을 보장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성불하는 그 날까지 수행정진하여야 한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자신감을 잃고 자포자기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으며, 自我喪失症에 빠져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연명해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소외당하고, 무력감에 빠지며, 자아상실, 인간성상실로 가고 있다. 우리들에게 진여자성이 구족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희망이며, 生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신의 노예로 전락하여 자주권이나 인권이 없다고 한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들을 영원한 부처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았으며, 神에 대한 믿음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인간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인권인 眞如自性이 있음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항상 무엇인가에 좇기면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강박관념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자기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회복하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진여자성의 본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대인들의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성찰하고 "隨處作主" 즉 어디에서나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였을 때 인간은 불안감에서 해방되어 안락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인간성의 회복이야말로 열반이며, 인격완성이며, 성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여자성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생기는 不安은 여러 가지 사회병리현상으로 나타나고 있 있다. 현대인들의 개인적인 불안으로 생기는 문제점은 바로 가정과 사회의 불안정으로 나타난다. 자신감의 상실과 무기력으로 인하여 한 가정에서는 가장이나 주부가 가정을 지탱할 의지를 잃어가고 있다. 97년 조사에 의하면 인구 500명당 한 명 꼴로 이혼율이 높다고 한다. 가정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것은 이제 가정도 인생의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생활의 不安定으로 생기는 사회적인 문제점은 적지 않다. 언제 붕괴될지도 모르는 不安定한 가정에서 자녀교육이나 미래의 행복을 설계하기는 대단히 힘들 것이다. 서로의 인내력 부족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점을 이혼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면서도 고통의 극복수단으로 항상 이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가정은 자녀의 교육과 일상생활에서 안정될 수 없다. 가정 가정의 파괴는 부부의 문제에 못지 않게 자녀의 문제나 집안간의 문제로도 볼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항상 不安의 요소는 가지고 있다. 각 나라간의 세력균형의 문제, 지역간 분쟁의 문제, 경제적인 불안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의 근본은 인간성의 상실과 의지력의 부족으로 볼 수 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이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피해가려고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가야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眞如自性이 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Ⅳ. 不滿時代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는 인류 역사 이래로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들어와서 인류는 엄청난 물질적인 풍요를 성취하였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볼 때 각 가정마다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갖추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필품에서부터 가전제품, 풍요로운 식생활, 다양한 의류, 편리한 주택 등 衣食住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현대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컴퓨터, 전화기, 휴대폰, 펙스, 카메라, TV 등 다양한 생활정보의 창구가 있으며, 날로 달라지는 현대기술은 인간의 五官을 대단히 편리하게 길들이고 있으며, 갈수록 예민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의 쾌락적인 욕구나 쾌감도는 이러한 오관의 극대화에 있다. 즉 오관은 인간 육체의 최첨단의 말초신경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사회의 물질문명은 이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며, 이것이 사업의 성패로 보고 있다. 다시 한번 살펴보면 오늘날 산업의 발달은 대부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TV, 컴퓨터, 전자 오락, 패션문화, 영화 영상 산업 등을 볼 수 있으며, 귀의 청각기능을 극대화하는 것으로는 다양한 음향기기, 라디오, 전화기 등이 있으며, 코를 즐기기 위해서는 수많은 향수의 개발 등이 있으며, 맛을 즐기는 술, 향료, 음식문화, 식음료 등이 있으며, 몸을 즐기기 위해 다양한 패션문화, 화장품과 편리한 이동을 위하여 다양한 교통수단 등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결국은 현대산업의 발달은 인간의 오관의 편리함과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루동안 이동하는 거리나 활동하는 범위를 계산한다면 신라시대의 사람들이 일년동안 움직인 범위보다도 훨씬 넓을 것이다. 현대인의 일년동안의 활동범위는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던 때의 사람들이 일생동안 움직인 범위보다도 넓을 것이다.
예를 들어본다면, 필자는 1999년 6월 27일에 진해 해군부대에 다녀온 일이 있다. 당일의 활동상황을 보면 서울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여 7시 비행기로 8시에 김해공항에 도착하여 9시 30분에 해군 훈련소에서 장병 500명의 수계식을 하고, 이어서 11시에 흥국사 법당에서 불자 500여명을 대상으로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12시 30분에 점심공양 후 오후 2시에 울산함대를 방문하여 위문을 하고 5시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하니 6시가 되었다. 즉 12시간 동안 1200km를 다니면서 두 차례의 법회로 1000여명의 불자를 만났다. 만약 교통이 발달되기 전 도보로 다닐 때 같으면 3개월 이상 걸려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하루에 모든 것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볼 때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활동해 온 시간과 공간보다도 수 백 배로 넓다. 활동하는 時空을 계산한다면, 우리들의 일생동안의 삶은 그들보다 수 백 배를 더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정보도 다양하여 온 세계의 모든 상황과 정보를 얻고 있으며, 전세계의 먹거리를 서울에서도 맛볼 수 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일제의 가전제품과 네델란드의 장미꽃과 아프리카의 과일과 호주의 쇠고기와 알레스카의 연어와 미국산의 빵을 먹는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엄청나게 넓은 활동범위, 다양한 정보, 온갖 종류의 먹거리 등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세종대왕도 갖지 못했으며, 과거의 어떠한 제왕도 누릴 수 없었던 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항상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며, 속은 텅 비어서 헐떡거리고 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남에게 뒤 처지는 것 같은 강박관념에 쌓여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지만, 현재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남과 비교하였을 때 내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바로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GNP인데 세계각국의 생활수준을 하나의 수치로 표기하고 있다. 즉 이 수치가 높으면 선진국이며 이 수치가 낮으면 후진국이라고 하여 선진국은 일등국민이고 후진국은 야만인 인 것처럼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선진국이라고 하여 그 나라 국민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1998년에 세계인들의 행복체감도를 조사한 것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방글라데시인이며, 일본인은 24위이고 한국인은 26위였다고 한다. 경제적인 측도로 본다면 일본은 세계적인 수준이며 우리 나라도 중위국에는 속한다.
그런데 GNP가 300불정도에 불과한 방글라데시인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복감은 물질이나 경제적인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불평불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小慾知足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의 불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박탈감에 의한 불만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크다. 자본주의 경제는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켜 貧益貧 富益富의 현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어 불안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나누어 가질 줄 아는 정신이 필요하다. 가진 사람들은 남을 위해 베풀 줄 알아야 하며,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인과의 도리를 믿음으로 가능해진다. 빈부의 격차는 사회적인 갈등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갈등도 낳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소비의 형태는 문화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부유층은 한없는 문화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반면에 빈곤층의 생활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마저도 박탈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화적인 격차에 의해 사회적으로 불만의 요인이 된다. 정부에서는 인간의 문화적인 혜택을 골고루 주기 위해 복지정책을 쓰고 있다. 사회복지가 잘되었을 때 국민들의 불만은 줄어든다. 또 문화가 바르게 발전하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면 사회적으로 큰 부작용을 낳게 된다. 즉 퇴폐문화나 향락문화, 소비문화 등은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때문에 지구는 병들어 가고 있으며, 자원은 고갈되고 있다. 인간의 방종과 자만으로 인류의 미래는 대단히 불투명하다. 이렇게 가다가는 지구는 자멸할 지도 모른다. 절제할 줄 모르는 생활, 끊임없는 소비, 이로 인하여 인류가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인과응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하였다. 인과의 도리, 연기의 도리를 믿지 않으므로 인간에게는 큰 재앙이 오고 있다. 만약 인간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실천한다면 인류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한 인과의 도리를 믿고 실천하는 것은 불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으므로 불교인으로서의 기본정신마저도 상실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의 廬山 慧遠스님은 白蓮結社를 시작하면서 당시의 승려들이 인과를 믿지 않기 때문에 결사를 한다고 하였다. 불자로의 최소한의 믿음인 인과설조차 믿지 않는 승려와 교단을 과연 불교라고 할 수 있을까? {大般涅槃經}에서는 바른 믿음이란 三寶와 因果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과의 도리를 믿으므로 小慾知足할 줄 알고, 만족하는 마음을 배운다. 중국의 백장스님의 百丈野狐에서는 인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不落因果인가? 不昧因果인가? 이를 문제 삼고 있는데 그 답은 不昧因果라고 한다. 즉 인과가 없어져 인과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을 얻은 道人일지라도 인과를 받긴 받지만 알고 받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설을 바르게 믿었을 때 불교는 제자리로 돌아가 바르게 정립될 수 있으며, 현대인들은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인과를 믿지 않는데서 끝없는 불만이 나온다고 볼 수 있다.


Ⅴ. 不確實時代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바로 내일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不確實하다. 내 자신의 삶이 불확실하며, 나의 장래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더 멀리로는 미래에 대한 명확한 길이 제시되지 못하고, 무턱대고 살아가고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면서도 이 가정이 평생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부간에 조금만 맞지 않아도 이혼을 쉽게 한다. 인간 최후의 보금자리인 가정의 미래가 불투명하므로 가족 구성원들간에 신뢰나 행복은 보장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직장만 해도 이제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살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한번 들어온 직장은 정년퇴직 할 때까지 보장받았으며, 직장을 자주 옮기는 일이 있으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 다른 곳으로 갈지 모른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만 제시된다면, 인정이나 의리는 상관없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직장이 안정되지 못하다가보니 가정의 경제가 불투명하다. 불확실한 직장생활에서 일년이나 평생의 경제적인 설계를 세우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국민들은 불확실하다. 우리들이 믿고 선택한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는 날로 밝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인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政敵에 대해서는 모략과 중상을 하기 일쑤이다. 정치인들의 말을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들의 말은 거짓과 허풍과 모략과 중상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불확실한 정책을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인 장래는 대단히 不確實 하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정세도 안정적이지는 못하다. 국제간의 경쟁은 과거 제국주의에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자행되고 있다. 강대국에서는 약소국을 자신의 시장인양 생각하고 부당한 요구를 강요하고 있다.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갖은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가간의 무역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침략은 이미 시작 된지 오래 되었다.
인간의 수명도 연장되긴 하였으나 과거와 같이 自然死로 마치는 경우가 적다. 전체적으로는 인간의 평균연령이 길어졌지만, 언제 우리들에게 죽음이 찾아올지 모른다. 과거에는 60살이나 70살이 되면 자연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한다. 미리부터 회갑을 한다든지 古稀를 하여 이웃들과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생을 마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回甲이나 고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고희를 지나고도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회갑이 되면 고희로 미루고, 고희가 되면 米壽로 미룬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죽음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젊은 직장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저녁에 잠을 자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많다. 즉 스트레스형 심장마비라고 한다. 같이 잠을 자던 부인도 모르고 아침에야 죽은 줄 아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또 불치의 병인 암이나 성인병도 이제는 성인만의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병들어 있는지 조차도 모르다가 이미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삶이 언제까지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지만, 수많은 미래를 설계해놓고 앞만 보고 뛰던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은 無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또한 교통의 발달이나 기계문명으로 인하여 목숨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 교통사고 인구는 1000명당 33.5명으로 세계에서 라트비아에 이어 2번째라고 한다. 아침에 많은 꿈을 안고 출근하였다가 교통사고로 저녁에는 싸늘한 몸이 되는 경우가 이렇게도 많다. 과거에 말이 교통수단이었을 때는 마차에 치어서 죽는 숫자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한 만큼 위험이 따르고 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의 교통수단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대형사고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대단히 불확실하다. 반드시 나의 삶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보장받는다고는 할 수 없다.
즉 인간의 미래는 대단히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이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인간생활이 불안하고 불만이 누적되다가 보면 이것이 사회적으로 위기의식을 유발하여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자들의 삶은 현생만이 아닌 영원한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현생은 다겁생의 목숨 가운데 한 과정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인생관을 가진다면 일시적인 불안이나 불만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으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염불행자들에게는 미래의 삶이 더욱 영광되고 희망차며 아름답다고 한다. 즉 아미타불께서 극락국토를 건설하여 우리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자이면서도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경전을 自意的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대승경전에서는 이상적인 정토의 세계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그러나 불자들은 이것을 믿으려고 들지 않으며, 특히 禪佛敎에서는 이를 모두 마음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없이는 정토교학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도 정토학자들 중에도 이를 唯心的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염불행자가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정토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들에게는 내세에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正覺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다. 그러므로 염불행자의 미래는 대단히 確實하며, 희망적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할 수 있다.


Ⅵ. 맺음말

흔히 대승불전에서는 현세나 미래에 대한 시대적인 史觀으로 末法時代라고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말보다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4가지로 분류하였다. 즉 이를 四不時代라는 新造語를 만들어 보았다. 四不時代란 4가지가 不在한 시대라는 뜻이다. 첫째 不信時代, 둘째 不安時代, 셋째 不滿時代, 넷째 不確實時代를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삼보에 대한 믿음이 부재하므로 不信時代를 가져오고, 둘째 眞如自性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不安時代를 초래하며, 셋째 인과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不滿時代를 만들며, 넷째 극락정토와 아미타불의 존재에 대하여 믿지 않기 때문에 不確實時代를 초래한다고 본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4가지의 믿음이 있었을 때 安心立命이 되리라고 본다. 불교를 믿는 참된 목적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행복을 찾기보다는 衒學的이고 이론적인 종교만을 추구하다보니 논리적으로는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어 가는데 반해서 신앙적으로는 점차 나약해 지고 있다. 신앙은 이론적인 체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참으로 안심입명할 수 있는 믿음의 세계관을 갖기 위한 것이다.
특히 정토 염불행자들의 신앙생활은 머리로서 이해하는 이론적인 정토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체험적인 신앙이 요구된다. 신앙적인 체험을 가졌을 때 확고부동한 믿음이 우러나올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대상을 三寶와 自性과 因果와 阿彌陀佛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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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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