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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정토학의 실천행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2.09.13|조회수14 목록 댓글 0

정토학의 실천행  

- 元曉의 淨土思想에서 본 實踐行 -

康 東 均/東亞大 哲學科 敎授

들어가면서



 佛敎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지고,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배제한다. 그것은 釋尊의 대화가운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른바 十無記, 혹은 十四無記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釋尊께서 말씀하신 萬古不易의 眞理는 佛滅後에도 <佛敎>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으며, 행복을 주었다. 시대를 따라 지역을 따라 인간의 문화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또 엄청나게 변화하지만, <佛敎>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진리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에서 대대적인 변화와 변신을 하면서,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가리기 힘든 상태에서 신라로 전해졌다. 그리고 元曉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元曉(617-686)는 신라가 겨우 왕권을 강화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려던 진평왕 39년 말단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談捺은 奈末이란 벼슬을 했다고 하나, 분명히 어느 관직에 속해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원효가 태어난 시대는 막강한 진흥왕의 시대가 끝난 {{}}{{淨土學의 實踐行 }}지 40년쯤 후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허둥지둥하던 때다. 원효의 젊은 시절은 백제의 무왕이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절정기였으므로, 신라는 많은 영토를 빼앗기던 어수선한 시대였다. 국제적으로 중국에서는 隋나라가 멸망하고 唐의 高祖인 李淵이 황제를 칭하고 나선 것이, 원효가 태어난 이듬해인 618년이었다. 고구려는 수와 당의 공격으로 심한 고통을 겪는데 반해, 오히려 신라는 그러한 피해가 적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신라는 백제의 시달림을 심하게 받았으므로 당시 신라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신라사람들은 이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으며, 그 요청에 부응해서 원효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원효의 실천행이 부각되었다. 바꿔 말해서, 원효의 출현은 시대적인 요청이었던 것이다.

本稿에서는 원효의 정토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실천행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元曉의 淨土思想

 1) 정토사상의 의미{{정토학의 실천행 }}한국사에 있어서 정토사상의 수용, 전개 및 성쇠는 매우 다양한 우여곡절을 시사해 주고 있다. 六朝時代에 이어진 曇鸞, 慧遠, 天台, 吉藏의 영향이 신라에 정토사상을 흥기하게 하였으며, 道綽 善導의 열정적인 종교관은 新羅後代를 一變시켰다. [三國遺事]에 기술된 往生譚만 하더라도 一書를 이룰 분량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黃浿江著 [新羅佛敎說話](一志社, 1974/1980) pp.164~170, 에는 20余例  의 往生說話를 例示하고 있으나, [三國遺事]에 나타난 往生譚만 골라도  10余例를 들 수가 있다.

}} 그리고 원효가 수용한 정토사상은 대승불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印度에서 비롯된 大乘佛敎는 그대로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中國, 韓國, 日本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정착하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思想潮流의 하나가 바로 淨土思想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는 元曉이래로 신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信仰的으로도, 敎學的으로도, 괄목할 만한 思想的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密敎와 禪宗이 급진적인 발전을 하고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자 淨土思想은 후퇴하게 되었고, 주술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동시에 원효도 퇴색되었다.

淨土思想의 起源에 대하여는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1883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막스ㆍ뮐러교수와 南條文雄박사의 공동연구의 성과로서 {無量壽經}과 {阿彌陀經}의 산스크리트 原典이 간행되었으며{{) Suk vat -vy ha, Description Suk vat , the Land of Bliss, ed. by F.    Max M ller and Nanjio (Anecdota Oxoniensia, Arian Series, VolⅠ,    Part Ⅱ), Oxford, 1883, London}}, 이것은 淨土思想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근래에는 1970년에 東京大學에서 藤田宏達박사에 의해서, {原始淨土思想의 硏究}가 출판됨으로 인해서{{)  藤田宏達 {原始淨土思想硏究} 岩波書店, 1970, 東京}}, 상당부분이 밝혀지게 되었다. 불교에서 淨土思想이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어서 드러난 것은 大乘佛敎가 흥기한 시대이며, 그것은 淨土系 經典群이 편찬됨으로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淨土思想>, <淨土系 經典群>이라고 하는 것은 阿彌陀佛의 極樂淨土에 관한 思想이나 經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淨土라고 하는 用語는 대승불교 일반에서 쓰이는 술어이며, 阿彌陀佛의 極樂淨土에 한정해서 쓰이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淨土란, 十方三世의 모든 佛國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이 어느 틈에 阿彌陀佛의 極樂國土만을 淨土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印度의 龍樹, 世親과, 中國의 曇鸞, 道綽, 善導, 등의 大思想家들과, 鳩摩羅什, 玄  등의 譯經의 巨匠들, 新羅의 元曉, 憬興, 義寂, 日本의 法然, 親鸞 등의, 저마다의 지역과 시대를 주도했던 大思想家들에 의해서, 阿彌陀佛의 極樂淨土가 가장 뛰어난 大乘佛國土로 지칭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로 거의 모든 大乘經典에서 阿彌陀佛의 極樂淨土가 언급되고 있으며, 佛敎의 궁극적 목표가 往生極樂에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2) 정토사상의 두 가지 흐름佛敎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成佛이다. 成佛이란 衆生이 스스로 主體的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衆生에게 부처가 될 가능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중생 자신이 스스로 [佛性的存在이다]라는 것을 自覺하는 것이다. 그러한 대전제에도 불구하고 淨土敎의 흐름은 [佛性的存在가 아닌 自己自身]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曇鸞, 道綽, 善導의 사상체계가 그러하며, 한국에 있어서의 元曉, 일본의 法然·親鸞의 사상체계가 그러하다. 일찍이 道綽은, {安樂集} 가운데에서 불교를 크게 둘로 나누어서 [聖道門]과 [淨土門]이 있다고 규정했다. 말하자면, 전자는 聖道門이요, 후자는 淨土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大正藏]第 47 卷, p.4a.

}} 그러나 淨土敎라 하더라도 반드시 佛性的存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廬山의 慧遠도 淨影寺의 慧遠도, 또한 嘉祥吉藏이나 天台智 에 있어서의 淨土思想도 佛性的存在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 天台의 常行三昧는 佛性的存在를 자각하기 위한 念佛行이다. 여기서 말하는 念佛은 自力의 修行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方便이었다. 이렇게 淨土敎 내지 淨土思想에도 크게 두 개의 흐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自力的인 淨土思想과 他力的인 淨土思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엘리트 집단의 淨土敎와 凡夫救濟의 淨土敎라고 하는 입장으로도 구별할 수가 있다. 초창기의 중국 불교에 있어서 淨土思想에 관심을 보여 淨土往生을 願했던 사람들은 闕公則(?-265-274-?), 僧顯(?-318-321-?), 支遁(327-402) 등을 들 수가 있지만, 뒤에 중국 정토교의 시조가 된 것은 廬山의 慧遠(344-413, 또는 350-409)이다. 宗曉의 {樂邦文類}(1199년) 卷三의 [蓮社始祖廬山遠法師傳]에서는 慧遠을 정토교의 시조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어서 [蓮社繼祖五代法師傳]에서는 慧遠을 이은 정토교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一曰 善導師, 二曰 法照師, 三曰 少康師, 四曰 省常師, 五曰 宗 師{{) [大正藏]第 47卷, p.192c.

}}

이것을 받아 志磐의 {佛祖統紀}(1269년) 卷二十六의 [淨土立敎志]에서는, 慧遠 - 善導 - 承遠 - 法照 - 少康 - 延壽 - 省常이라고 정토교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大正藏]第 49卷, p.260c.

}} 志磐은 宗曉의 六祖說을 계승하면서 法照의 스승 承遠(712-802)을 덧붙여 다시 禪淨融合思想을 주장한 永明延壽(904-975)를 덧붙이고 있지만, 宗曉와 큰 차이는 없다. 후대의 정토교의 계보를 보이는 자료도 똑같은 경향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문제 의식이 결여돼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같은 정토사상이라 하더라도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慧遠과 善導를 일직선상에 두었다고 하는 것은, 그 내용을 보지 않고 모양만을 취함에 지나지 않다. 迦才(生沒年代未詳, 七世紀後半에 活動)는 그의 著述인 {淨土論}의 冒頭에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上古의 先匠인 遠法師·謝靈運 등 모두 西境을 期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홀로 一身을 좋게 할뿐이다. 後의 학자는 承習할 바가 없다.{{) [大正藏]第 47卷, p.83b.

}}

불교에서는, 특히 大乘佛敎에서는, [自利利他]·[自他一時成佛道]·[自未得度先度他]라고 하는 대명제를 제외하고서 말할 수 없다. 이 대승불교의 근원을 淨土敎 내지 淨土思想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惡人凡夫의 自覺으로서 佛性的存在가 아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절망하면서도, 더욱 중생구제에 몸을 내던진 先覺者들에 대하여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원효의 정토사상   (1) 元曉의 [信]觀불교는 궁극의 목표를 깨달음(覺)에 둔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衆生인 우리들에게는 經驗內的인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世俗內的인 經驗밖에 할 수 없는 凡夫 衆生들에게는 매우 힘든 것이며, 완전한 깨달음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가령 뛰어난 善知識을 만나서 가장 자기에게 相應한 가르침을 받아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시키는 것조차 매우 힘들다. 거기에도 부단한 노력이 뒤따르지 아니 하면, 어느 틈엔가 방황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육체를 지니고 있는 한 우리들에게는 무한한 번뇌가 뒤엉키며 결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信을 成就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물러서지 않기 위해 부단의 노력을 하면서 成佛을 위해 決意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을 信成就發心이라고 한다. {大乘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信成就發心이란 어떤 사람에 의해 일으켜지는 것이며, 어떤 行을 닦아야 하는가. 또 信成就를 얻는다면 어떻게 發心해야 하는가.{{) [大正藏] 第32卷, p.580b.

}}

여기서는 信成就發心을 세 가지 측면에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어떤 유형의 사람이 發心하는가, 둘째, 어떤 行을 닦을 것인가, 셋째, 어떻게 해서 發心이 가능하게 되는가, 이다. 첫째 물음에 대하여는 不定聚衆生이라고 답하고 있다. 말하자면, 因果를 믿지 않는 邪定聚衆生은 發心할 수 없다는 말이다. 如來의 가르침을 믿고, 如來를 믿고 歸依하는 不定聚의 사람이 信心을 修行해서 發心하여 正定聚로 나아가는 것이다. 둘째 물음에 대하여는 熏習과 善根力에 의해서 비로소 수행이 가능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本覺의 內熏과 外緣의 聞熏習에 의해서 수행이 가능해지며, 기본적으로 前世의 善業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게 善根力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조건이 된다.

셋째 물음에 대하여는 먼저 初信부터 十信까지 一萬劫동안의 수행이 끝난 다음 비로소 信心이 성취한다고 한다. 중도에 發心하드라도 그 發心은 失敗할 수 있다. 一萬劫의 信心修行이 끝나서 時機가 익었을 때에 諸佛菩薩이 가르쳐 發心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發心이 굳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初信부터 十信까지의 十信位의 修行에 本 論에서는 一萬劫의 時間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며, 그 機가 익었을 때에, 信滿한 까닭에 諸佛菩薩이 가르쳐 發心하게 한다. 혹은 그 밖의 방법으로도 發心하여, 十住의 初位인 初發心住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信成就發心이다.{{ ) 平川彰 {大乘起信論}(大藏出版[佛典講座]22. 1983, 東京) p.303. 參照.

}}       佛典에서 자주 쓰이는 <信>에 대한 원어는 < raddh >, , 등의 세 가지가 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語義는 藤田宏達博士의 뛰어난 硏究成果가 있으며,{{) 藤田宏達{原始淨土思想の硏究} (岩波書店, 1970, 東京) pp.586-618,參照.

}} 또한 근래 편집된 如來藏에 관한 論文에서도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으니,{{) 水谷幸正[如來藏と信]{講座大乘佛敎} 6,(春秋社,1982,東京) pp.125-128, 參照.

}} 本稿에서는 간략하게 요약하기로 한다.

<信>에 대한 原語로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  raddh  이다. 五根(信, 精進, 念, 定, 慧), 五力에서 말하는 信, {俱舍論}이나 {唯識三十頌}의 心所法가운데에서 말하고 있는 信, {無量壽經}, {阿彌陀經}의 여러 가지 用例에서 보이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다.

raddh  의 특징으로는,  첫째, 極樂淨土에 往生하기 위한 根本이라는 것, 둘째, <慧>와 함께 言及된다는 것, 셋째, 그 반대 개념으로 <疑>가 상정된다는 것, 등을 들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信>, <淨信>, <聞信>, <信受>, 등으로 漢譯되고 있다.

pras da 는 [진정시키다], [淨化하다], [기뻐하다], [만족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본래 <信>의 의미는 없다. 古代印度의 用例로는, [恩寵을 주다], [犧牲物을 바치다], [이익을 주다], 등의 의미도 살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상 <信>의 의미로 많이 통용되고 있다. 漢譯으로는, <澄淨>, <歡喜>, <淨信>, 등으로 쓰이고 있다. 그 용례를 몇 가지 보면, {俱舍論}에, [信( raddh )은 마음을 澄淨(pras da)하게 한다]고 표현된 것은,  raddh  란 마음이 pras da 로 되는 것을 말하니,  raddh  와   pras da 는 同義語가 된다는 것이다.{{) [大正藏] 第29卷, p.19b. 參照.

}} 또 {無量壽經}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가 되는 <念佛往生>의 근거인 第十八願에서의 <至心信樂>{{) [大正藏] 第12卷, p286b. 參照.

}}는, pras da 를 매개로 해서 信과 念佛의 相卽을 說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藤田宏達[前揭書] pp.593-595. 參照.

}} adhimukti 는, [거기에 마음을 傾注하다], [거기에 마음을 解放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漢譯으로는 [信解], [勝解], [明信], 등으로 쓰이고 있다. 주저함이 없이 沒入하는 것, 그 信에 의해서 마음이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raddh  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며, {無量壽經}에서는, [歡喜踊躍乃至一念]이라고 번역된 것이, [가령 한번이라도 마음의 pras da를 얻는 자는, 뒤떨어진 adhimukti 를 가진 자로는 되지 않는다]{{) 藤田宏達[前揭書] p.592, p.597. 參照.

}}고 原文에는 제시되고 있다.   raddh , pras da, adhimukti 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佛敎敎理上에서의 信은 心所法가운데의 大善地法의 하나로서의 信이다. 그 信이, 이른바 信賴라든가 信用이라고 하는 대인관계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釋尊의 말을 信賴하고 信用한다고 하는 것이, 釋尊의 인격과 인품을 믿고, 그 가르침을 신앙한다고 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信이라고 하는 心的態度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보다 심원한, 말하자면 차원이 높은 철학적인 견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리적으로는, {俱舍論}에서 心所法가운데의 [大善地法]의 하나로서 지적하고 있으며,{{) 前揭 註 11).參照.

}} 大乘의 心所法으로서의 信은 {唯識三十頌}에서 善法가운데 첫 번째 心所로 강조하고 있으며,{{) [大正藏] 第31卷, p.60b.

}} 그것을 {成唯識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信이라고 하는가. 實과 德과 能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忍), 바라고(樂), 마음을 淸淨하게 하고자 함을 性으로 한다. 不信을 對治하고 善業(선업)을 바라는(樂) 것을 業으로 한다. 그러나 信은 세 가지로 差別할 수 있다.

 첫째는, 實有를 믿는 것이다.(中略)  둘째는, 有德을 믿는 것이다.(中略)  셋째는, 有能을 믿는 것이다.(中略)忍이란 勝解를 말한다. 이것은 곧 信의 因이다.(中略) 마음을 淸淨하게 함을 性으로 한다.(中略) 이것(信)은 性澄淸하여 능히 마음 등을 청정하게 한다. 마음이 殊勝하기 때문에 心淨이라 이름한다. 水精珠가 능히 濁水를 맑게 하는 것과 같다.{{) [大正藏] 第30卷, p.29c. 參照.

}}      

{成唯識論}에서 말하는 信이란, 勝解를 因으로 하며, 본질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淸淨하게 하는 능력을 지니며, 機能하고 있는 것이다. 방황(迷)으로부터 깨달음(悟)으로 나아가게 하는 原動力이라는 말이다. 특히 {成唯識論}에서 信을 三相으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四信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佛敎에 있어서 信은, 단순히 法에 이르기 위한 條件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主體에 있어서 <法>의 나타남으로서의 <信>, 本來淸淨心 그 自體의 自覺으로서의 <信>이다. 그것은 결코 <法>을 窮極의 對象으로 하는 對象的 <信>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窮極의 <法> 그 自體가 거기에 이미 現前해 있는 主體的인 <信>인 것이다.{{) 阿部正雄, [現代における<信>の問題] {佛敎における信の問題},(平樂寺書店,1963, 京都) pp.21-22.參照.

}} <信>은 그대로가 <成佛>인 것이다.

佛敎에서의 窮極的인 목표는 成佛에 있다. 成佛을 위한 方法으로 三阿僧祗劫동안 修行을 하고, 비로소 五十二段階의 階位를 넘어서 成佛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經論에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결점이나 장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앞에서 말한 修行이 가능한 것인가. 가령 前世에 많은 善業을 쌓아 그 功德으로 理想的인 能力을 갖추어 태어난 자다 하드라도 과연 成佛이 가능할 것인가. 역사상 釋尊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이라도 完全한 覺者라고 自他가 함께 인정한 사람은 없다. 知德兼備하여 修行에 專念하여, 小釋迦라고 불리운 天台大師마저도 第五品의 弟子로서 別敎의 十信과 같다고 한다.{{) 松濤誠廉, [佛敎における信の地位], {佛敎における信の問題}(日本佛敎學會年報)p.53. 參照.

}} 이런 사실들을 본다면 실제로 가능한 한계는 十信까지이며, 그 이상 부처에까지 이르는 位는 修行의 理想, 信仰의 對象, 敎學의 所産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복잡다단한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더더욱 成佛의 不可能이 실감된다. 여기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限界狀況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衆生, 이것이 바로 元曉가 대상으로 삼은 衆生인 것이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중생에게 할 수 있는 길은 <믿는 것>밖에는 없다. 如來의 말씀을 믿고, 如來의 本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元曉는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思量의 境界가 아니니 바로 우러러 믿어야(仰信) 한다. 經에서 說하는 바를 스스로의 천박한 識見으로 판단하지 말아라. ({無量壽經宗要}){{) [大正藏] 第37卷, p.130c.

}}

스스로 천박한 식견을 가지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지하면 할 수록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自力으로 부지런히 기어서 一由旬을 가려면 여러 날 걸리겠지만, 그가 만일 남의 배(他力)를 타고 바람에 의지하면서 간다면, 하루에 千里를 갈 수 있다.  이때에도, [앉은뱅이 몸으로 어떻게 하루에 千里를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겠는가. 世間의 뱃사공도 오히려 판단을 초월하는 일을 할 수 있거늘, 하물며 如來法王의 힘으로 不思議한 일을 할 수 없다 하겠는가. ({無量壽經宗要}){{) 上同.

}}  

또, {大乘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마땅히 알라. 如來에게는 勝方便이 있어 信心을 攝護하여 주신다. 그것은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부처를 念하는 因緣으로, 如來의 願에 따라 他方 佛土에 往生하여, 언제까지나 부처를 만나 聞法할 수 있으며, 영원히 惡道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修多羅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사람이 만약 오로지 西方極樂世界의 阿彌陀佛만을 念하고, 닦은 바의 善根을 廻向하고 極樂世界에 往生하고자 願求한다면, 곧 往生할 수 있다. 언제까지나 부처를 만나 聞法할 수 있으니 마침내 물러서지 않는다.{{) [大正藏] 第32卷, p.583a.

}}

無限한 時空가운데 있는 것이 有限한 自己이며, 有限한 自己를 통해서만이 無限한 時空도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如來의 大悲속에 存在하는 自己의 모습을 통해서 如來와 自己와의 願心이 相卽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고, 如來와 自己라고 하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한 것들이 相卽하는 것이야말로 成佛이며 往生이다.{{) 拙論 [念佛往生의 根據][漢林鄭樹鳳博士華甲紀念論叢} 1988, 釜山. pp.146 -150. 參照.

}}     불교에서는 信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大乘佛敎에서는, 信없이는 깨달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 근본 입장이다. 말하자면, <信>은 煩惱에 染汚된 우리들의 마음을 本來의 淸淨心에 이르게 하기 위한 精神作用(心所)의 일종으로 간주되었으며, <信>은 佛法에 들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 되기도 한 것이다. {智度論}에서는, [佛法의 大海는, 信을 能入으로 하고, 智를 能度로 한다]{{) [大正新脩大藏經] 第25卷, p.63a.

}}고 하였으며, {華嚴經}에서는, [信은 道의 바탕이요, 功德의 어머니이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다.

원효에게는 믿음 없이 불교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淨土往生觀如來의 本質은 無限한 慈悲와 無限한 智慧에 두어진다.{{) [前揭拙論] p.136. 參照.

}} 앞에서 말한 {智度論}의 <信과 智慧>는, 바꾸어 말해서,  <慈悲와 智慧>의 다른 표현이며, 同質的인 의미를 가진 말이다. 如來의 편에서는 <慈悲>이지만, 衆生의 편에서는 <信>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如來가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如來의 慈悲의 顯現이며, 그 목적은 衆生濟度에 있다. 如來의 慈悲의 구체적인 양상은 중생 제도를 통해서 들어 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如來의 德相을 具備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중생인 것이다. 중생에게 그것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 如來의 목적이며, 그것은 진실한 가르침을 통해서 중생에게 베풀어진다. 따라서, 如來가 法을 설하여 가르침을 펴는 것은 慈悲의 不可思議妙用인 것이다.{{) [前揭拙論] p.134. 參照.

}}  一切衆生이 모두 如來의 德相을 具備하고 佛性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 그대로의 상태로 곧 成佛하는 것은 아니다. {維摩經} 등에 [裟婆卽淨土], [生死卽涅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眞如의 세계는 중생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중생은 곧 覺者인 것이다. 동시에 중생은 중생인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는 근거는, [釋尊이 說法하신 法門]에 있는 것이지 [衆生의 知解]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如來의 金口聖言에 대한 [믿음]이 먼저이며, 成佛에 대한 [知解]는 모두 [가르침(法)]에 의거해서 성립되어지는 分別智이기 때문에, 如來의 無限한 慈悲에 포용되는 것만이 곧 성불의  길인 것이다.

인간은 현재라고 하는 時空의 制限된 범위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행동하고 있다. [人間의 價値]는 언제나 현재라고 하는 시대상을 통해서 [普遍의 價値]를 추구하게 된다. 예를 들면 善과 惡이 그것이다. 그것은 다시 현재의 [나의 行動]에서 분별되지만, [나의 生活] 속에서는 보수적인 의미의 가치체계가 형성된다. 현재라는 시대상을 통해서 나의 행동은, 혁신적이고 고답적인 가치체계가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양상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오히려 부자유를 초래하고 만다. 阿毘達磨佛敎를 구축한 出家比丘들이 그랬으며, 三毒煩惱를 떨쳐 버리려고 더욱 三毒煩惱속에 沈淪하게되는 韋提希夫人이 그랬다. 생활은, 무수한 가치의 엄습으로 인해 內向的인 보수적 가치 체계를 指向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 사회 가운데서 수용과 반발을 통해, 安穩함이란 없는 것임을 覺知하게 할 뿐이다. 거기에서 시대적인 不安과 挫折이 대두하여 [나의 괴로움]이 형성된다. 그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할 때, 하나의 價値指向이 나타난다. 괴로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은 專一한 것으로 凝結된다. 이 때 [救濟의 機緣]이 성립된다. 마치 {涅槃經}에서 [阿 世王을 위하여 釋尊이 열반에 들지 않겠다]{{) {大般涅槃經}[梵行品]第五([大正新脩大藏經]第12卷, p.723c.)}}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如來의 本質은 無限한 智慧와 無限한 慈悲에 있다. 如來의 慈悲를 感得할 수 있는 機緣은, 현재라는 시대의 제한 속에서 三毒煩惱를 覺知하는 데에 있다. 바꿔 말하면, 如來의 救濟하겠다는 慈悲와, 衆生의 救濟받지 않을 수 없는 切迫함이 만남을 가질 때, 機緣은 成立하는 것이다. 이때의 慈悲의 根據는 [願]으로서 表象된다. 如來는 모두가 다 菩薩因行時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發願하였고, 그 願이 圓滿成就되어서 佛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阿彌陀佛의 四十八願, 藥師如來의 十二願, 普賢菩薩의 十願, 등이 그것이다. 한편 중생이 발원하는 수도 있다. 중생의 원은 貪瞋癡의 三毒煩惱의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래의 원과는 구별된다. 如來의 그것은 願行滿足, 自利利他, 自覺覺他, 覺行窮滿인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여래의 원을 [本願]이라고 한다. 如來의 慈悲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중생 제도에 있으며, 그것은 [本願]을 통해서 성취된다. 元曉가 추구했던 劣惡衆生에 대한 救濟原理도 결국은 그 근거를 [本願]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如來의 衆生을 救濟하지 않을 수 없는 本質的인 慈悲이며, [大悲願力]인 것이다.

元曉는 {大乘六情懺悔}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諸佛의 不思議熏을 內因으로 하고, 諸佛의 大悲願力을 外緣으로 한다.{{) [大正新脩大藏經] 第45卷, p.922b.

}}

또 {無量壽經宗要}에서도 如來의 大悲願力을 강조하고 있다.

淨土란 모두가 如來의 願과 行이 이루는 바이며 저 정토에 왕생하는 자의 自力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穢土 등의 器世界가 오직 중생의 共業만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上揭書] 第37卷, p.126b.

}}  

무릇 왕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힘으로 능히 正報莊嚴(아미타불)을 感得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依報淨土를 感得할 수 있는 것(往生)도 아니다. 결코 自業因力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上揭書] p.128b.

}}

如來의 慈悲는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언제나 時空을 초월하여 작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信]이 成就되는 순간에 妙用되는 것이다. 여기서 元曉는 [人間의 自力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如來의 大悲願力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元曉는 無量光 無量壽의 無限智慧와 無限慈悲를 如來를 통해 분명히 본 것이며, 그 모든 것은 劣惡衆生을 향해 있는 것임을 確信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큰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2. 元曉의 實踐行

 1) 실천행으로 본 한국불교불교의 실천이라고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찰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과제는 [禪]과 [念佛]이다. 念佛에 대한 觀念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新羅의 元曉에게까지 소급되어지는데, 그 사상적인 전개는 {三國遺事}를 비롯하여 元曉·法位·憬興·法一·義寂 등에 의해서 찬술된 일련의 淨土系 典籍을 통하여 살펴 볼 수가 있다{{) 이 部分에 관한 硏究로서는    o 安啓賢 {新羅淨土思想史硏究}서울, 1976. 5.

   o 源弘之 {韓國淨土敎硏究序說}京都, 1978.4.

     를 비롯해서 많은 硏究報告가 있다.

}}. 그러나 新羅末에 流入되어진 禪의 觀念이 [九山禪門]을 형성하고 高麗末에 [臨濟宗]의 宗致를 계승한 普照·太古의 [曹溪宗]이 그 극성을 이룬데 반하여 念佛은 끝내 宗派를 이루지 못하고, 高麗時代에 있어서는 독립된 典籍마저 단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굳이 찾는다면 禪師들의 典籍가운데서 간혹 비난과 비판을 전제로 하여 논급되어지거나, 天台나 密敎의 典籍에서 부수적인 실천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엿볼 수가 있을 따름이다. 新羅에서는 貴族佛敎·護國佛敎로서 군림했던 佛敎가, 元曉 이후에는 일반서민에게까지 이르는 大衆佛敎·信仰佛敎로서 新羅王朝와 新羅人의 精神的 支柱가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大衆佛敎·信仰佛敎의 구체적인 전개양상은 元曉가 小乘戒律을 破棄하고 大乘菩薩의 길을 選擇한 데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大乘菩薩의 길이란 菩薩의 願과 行이 일치되는 실천을 뜻하며, 그것은 絶對的인 信仰을 통한 衆生救濟가 첫째 요건이 된다. 그것은 元曉가 많은 典籍에서 중시하고 있는 [一心]이, 단지 觀念의 世界가 아닌, [衆生救濟]라는 실천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信仰心의 발로라고 하는 점을  直視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信仰을 통한 價値觀 設定이 可能한 宗敎로서의 佛敎, 그것이 大衆佛敎이며, 信仰佛敎이며, [淨土信仰]인 것이다. [淨土信仰]은 新羅가 가장 바라던 理想國家 ― 佛國土建設을 可能케 하였으며, 後代에도 精神的으로 많은 영향을 남겼다. 淨土信仰이 이와 같이 新羅의 精神的 支柱가 되었지만, 高麗王朝에서는 무슨 緣由로 독립된 典籍마저 남기지 못하고 다른 宗派의 부수적인 실천항목이거나, 혹은 非難과 批判의 대상이 되었는지 조차 검토되지도 않는 것이 現實이다. 그것은 현대의 韓國佛敎가 놓인 位相이 普照·太古의 延長線上에 있으며, 元曉의 大乘佛敎的인 廻心이 信仰的으로도 敎理的으로도 계승되어 이해되어지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2) 실천행으로서의 大乘佛敎佛敎란 佛陀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통해서 모든 衆生이 佛陀임을 自覺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된 종교이다. 佛陀임을 自覺한다는 것은 [成佛]을 의미한다.

佛敎가 佛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데에는 아무런 異見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衆生이 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데에는 많은 異見이 제시되며, 또 多義의 解釋이 가능하여진다. 다시 말해서, 成佛이란 人間 釋迦가 깨달음을 成就했다(bodhima  a-ni adana)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모든 人間이 覺者(Buddha=佛陀)로 되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것은 佛敎의 思想的인 始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목표이다. 특히 大乘佛敎에 있어서는 成佛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形而上學的인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衆生救濟와 직결되어 있다는데에 중점을 두고 관찰할 때 大乘의 意義가 더욱 명백하여진다. 다시 말해서, 成佛이란 釋尊이 過去因行時로부터 現世의 樹下成道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難行.苦行이 論理的으로 究明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樹下成道에서 鹿苑說法으로 移行하게 되는 大乘的인 轉廻를 통해서 얻어지는 無上等正覺(anuttara-samyaksa bodhi)에서 그 意義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成道한 [佛陀](Buddha)에서 說法하는 [如來](Tath gata)로 이어지는 大轉廻로 說明되어진다. 龍樹가 {中論}의 [歸敬偈]에서 歸依의 대상으로 삼았던 [戱論(prapa ca)을 寂滅시키는 吉祥한 緣起(prat tyasamutp da)를 가르치신 正覺者, 가장 殊勝하신 說法者]{{) [大正藏]第30卷.

   本稿의 引用은 月稱釋 'Prasannapad '의 梵文에 依據했다.

}}가 바로 그 [如來]인 것이다. 佛敎의 入信은 歸依三寶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앞에서 龍樹가 말하였던 [緣起를 說하신 佛陀에 歸命]하는 것으로서 成立되어진다. 佛陀가 樹下成道로 끝날 때에 거기에는 단지 [獨覺(Pratyeka- buddha=緣覺)]만이 存在하게 되지만, 說法하는 如來는 곧 說하신 法과, 그 法을 聽聞하는 弟子를 그 안에 포함하게 되니 저절로 [三寶]를 갖추게 되어 歸依三寶를 成立시키게 된다고 하는 말이다. 如來하고 하는 말의 語義는 大乘佛敎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如來란 그 原語 tath gata에서 [如來](tath + gata)와 [如去](tath +gata)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說明되어 진다. {十住毘婆沙論} 卷一에서는 [如란 이름하여 實이라고 한다. 來란 이름하여 至라고 한다. 眞實中에 이르는 故로 이름하여 如來라고 한다]라고  述하면서 眞實을 열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如來者, 如名爲實, 來名爲至, 至眞宋中, 故名爲如來, 何等爲實.

   ① 所謂涅槃, 不虛 故, 是名爲實.

   ② 如名不壞相, 所謂諸法實相是, 來名智慧, 到實相中 通達其義, 故名爲如來.

   ③ 空無相無作, 名爲如, 諸佛來至, 三解脫門, 亦令衆生, 到此門, 故名爲如來.

   ④ 如名四諦, 以一切種, 見四諦, 故名爲如來.

   ⑤ 如名六波羅蜜, 所謂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 以是六法, 來至佛也, 故       名爲如來.

   ⑥ 諦捨滅慧, 四功德處, 名爲如來, 以是四法, 來至佛也, 故名爲如來.

   ⑦ 一切法名爲如, 是如來至諸佛, 故名爲如來.

   ⑧ 一切菩薩地, 喜淨明炎, 難勝, 現前, 深遠, 不動, 善慧, 法雲, 名爲如, 諸菩       薩, 以是十地, 來至阿 多羅三 三菩提, 故名爲如來.

   ⑨ 以如實八聖道分來, 故名爲如來.

   ⑩ 權智二足來至佛, 故名爲如來.]({十住毘婆沙論}卷一, [大正藏]第26卷,        p.25a b)}}. 이것은 분명히 [如來]를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그 다음에 이어서 [如去不還인 故로 如來라고 이름한다{{) [如去不還, 故名爲如來]}}]고 하는 표현은 [如去]를 意圖하고 있는 것이다. {大智度論} 卷二에 [法相처럼 알고 法相처럼 說한다. 諸佛이 安穩道에서 오는 것처럼 佛도 또한 이와 같이 와서 다시 後有中에 가지 않는다. 그런 故로 多陀阿伽陀라고 이름한다{{) ① [如法相解, 如法相說. ② 如諸佛安穩道來, 佛亦如是來, 更不去後有中, 是故名多陀阿伽陀] ({大智度論}卷二,  [大正藏]第25卷, p.71b)}}]고 [如來]·[如去]의 二義를 설명하고 있으며, 다시 卷五五에서도 거의 같은 뜻으로 如來를 정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或以佛名, 名爲如來, 或以衆生名字, 名爲如來, ......佛名如來者, 如定光佛等, 行六婆羅密, 得成佛道, 釋迦文佛亦如是來, 故名如來, 如錠光佛等, 智知諸法如, 從如中來, 故名如來, 釋迦文佛亦如是來, 故名如來] (上揭註 p.454b C)}}.

이상에서 如來란 [眞如가 來至했다]고 해석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다시 모든 衆生이 如來의 德相을 具備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衆生이 모르기 때문에 法을 說하여 가르침을 펴게 되는 필연적인 如來의 不可思議妙用을 뜻하기도 한다{{) {華嚴經}(60卷本)[寶王如來性起品]第32, {涅槃經} 등의 [佛身常住, 悉有佛性]을 통한 永遠相으로서의 如來의 出現을 提示함으로서 衆生이 곧 如來임을 確約하고 確信하는 不可思議妙用을 말하는 것이다.

}}. 하지만 一切衆生이 모두 如來의 德相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 그대로의 상태로 곧 [成佛]하는 것은 아니다. {維摩經}을 비롯한 많은 大衆經典에서 [娑婆卽淨土]·[生死卽涅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眞如의 세계는 중생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衆生은 곧 覺者인 것이다. 동시에 衆生은 衆生인 것이다. 왜냐하면 一切衆生이 成佛할 수 있는 근거는 釋尊이 說法하신 敎法에 있는 것이지 衆生의 知解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如來의 金口聖言에 대한 [믿음]이 먼저이며, 成佛에 대한 [知解]는 모두 [敎法]에 의거해서 成立되어지는 分別智이기 때문에 모두 [棄捨]하여야 하며 오직 如來의 無限한 慈悲에 包容되는 것만이 곧 成佛의 길인 것이다.

說法에 의해서 모든 衆生이 救濟되어야 한다는 것은 一切衆生의 요청이며, 그 요청을 무시해서 佛陀가 樹下成道만으로 끝나 버린다면 그것은 小乘의 깨달음에 지나지 않는 獨覺(Pratyeka-buddha)인 것이다. 佛陀가 小乘의 범주를 벗어나서 鹿野苑으로 나아가게된 轉機가 [發菩提心]이며 說法으로까지 이끈 힘이 [本願](p rva- prani h  a =vow, prayer)이며 [菩薩行]인 것이다. 이 [發菩提心]→[菩薩行]으로 연결되는 방정식이 바로 大乘불교의 實踐行이 되는 것이다.



 3) 元曉의 實踐行원효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였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 상태로든지 간에 무언가의 실천을 하였으며, 그렇다고 모두가 다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의 사상적인 근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원효의 실천은 그것이 사회에 기능하는 역할을 했다는 데에 그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종교는 언제나 반드시 그 나라 그 사회에 기능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실천행은 매우 진지하고도 소중하게 궁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사를 이야기할 때에 반드시 종교를 분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의 역사를 다룰 때에는 이것이 무시되는 이유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종교는 그 어떤 종교이든 지간에 그 사회에 기능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치의 정점이어야 한다. 그럴 때 종교가 사회에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人性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한국사 연구에 종교가 무시되는 것은 반성해야만 한다.

元曉의 실천행은 그 사상적 근거가 淨土思想에 있다. 앞에서 지적하고 분석한 것처럼, 불교란 정토신앙이 궁극적인 것이다. 원효는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원효의 모든 행의 근거는 정토사상에서 출발한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慈悲라고 한다. 慈悲는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慈悲의 실천은 慈悲의 주체와 慈悲의 대상에게 共通의 場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如來의 大悲願力과 衆生의 仰信으로 규정된다.

한 중생도 모두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如來의 無限한 智慧와 慈悲가 不思議 願力으로 중생을 향해 있고, 중생의 절박함은 안으로 懺悔하고 밖으로 仰信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罪業 衆生으로서의 自覺이 여래를 향해 있는 것을 말한다. 元曉가 {大乘六情懺悔}에서 천명하였던 [大悲願力]도, {無量壽經宗要}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如來의 大悲願力]도 모두가 다 衆生의 [仰信]의 대상인 것이다.   元曉가, 불교란 모든 중생을 구제해야 할 慈悲의 실천이라고 자각을 하였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스스로 더러움을 마다하지 않는 慈悲行을 실천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마치 물이 더러움을 씻기 위해서 스스로도 더러워지는 것처럼, 慈悲란,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진정 중생의 아픔을 직시하고,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여야 하는 것이다. 그 아픔은 衆生이 衆生임을 거부하는데서 오는 아픔이다. 그 실천은 [南無阿彌陀佛]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衆生이 衆生을 자각하기 위한 실천은 [南無阿彌陀佛]에 의해 성취된다.{{) [前揭拙論] pp.148-150.參照.

}} 元曉는 그것을 중생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 아픔을 같이 하며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元曉의 無碍行이다.



元曉가 이미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뒤로는 속인의 옷을 갈아입고 스스로 卜性居士라 했다. 우연히 배우들이 춤추며 노닥거리는 커다란 바가지를 얻으니(中略). 그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중생을 교화하였으니, 가난뱅이 거지나 더벅머리 무지랭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의 명호를 알았으며, 南無佛을 칭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원효의 교화는 크기만 하네.{{) {三國遺事} [元曉不羈]條. 參照.

}}

여기서 [부처님의 명호를 알고, 南無佛을 칭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南無阿彌陀佛]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念佛의 실천이다. 念佛이란 元曉의 말을 빌리자면,  생활 전반에 걸친 진지한 마음을 말한다. 그것을 원효는, [至心](至誠心)이라고 하였다.{{) {無量壽經宗要} [大正新脩大藏經]제37권. pp.129a-b. 參照. }} 그것은 바로 [凡夫의 自覺]을 의미한다. 인간은 진지하면 할 수록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앞장에서 여러 가지 用例를 들면서 서술하였지만, 그로 인해서 [凡夫의 自覺]을 하게 되며, 이 [凡夫의 自覺]을 통해서 비로소 [如來의 大悲願力]과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驚異이며, 感動이며, 歡喜이다. 念佛의 실천은, 驚異와 感動과 歡喜가 수반된 力動的인 行이다. 그것은 無限한 如來의 本願力에 포용되고자 하는 行이며, 本願力에 대한 [信]에서 비롯되는 歡喜인 것이다.





나가면서



[南無阿彌陀佛]은,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信仰心이 요구하고 있는 엄밀함이 自然法爾하게 顯現한 [力用]이다. 그것은 결코 理智的인 관심에 의해서 조립된 精密함이 아니다. 그리고 그 [力用]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自力]이 아니다. 그 [力用]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自力]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永遠일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마치 [思惟하는 나의 存在는 있다]고 하는 理智的이며 精密하기만 하는 思辨哲學일 뿐인 것이다. 信仰心은 觀念의 戱論이 아니라, 絶對歸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는 자와 믿음의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믿는 자는 [나]이며, 믿는 대상은 [阿彌陀佛]이다. [나]와 [阿彌陀佛]의 관계에서 [나의 믿음]을 매개로 하여 동질성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阿彌陀佛]의 大悲願力을 매개로 하여 [나]를 內省할 때, 대립은 동질성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말하는 內省은 [凡夫의 自覺]이다. 이는 卑下慢을 조장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凡夫다 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할 때의 이야기다. [凡夫의 自覺]을 통하여, 阿彌陀佛의 大悲願力이아니면 구제될 수 없다고 하는 [나의 省察]이, 미들 수밖에 없는 [凡夫의 自覺]을 하게 되는 것이다. 元曉는, 믿을 수밖에 없는 중생이, 왜 믿을 수가 없는지를, [自力]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탓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중생의 思量心이다.      

그것은 思量의 境界가 아니니 바로 우러러 믿어야(仰信) 한다. 經에서 說하는 바를 스스로의 천박한 識見으로 판단하지 말아라. ({無量壽經宗要}){{) [大正新脩大藏經] 第37卷, p.130c.

}}스스로 천박한 식견을 가지고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지하면 할 수록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自力으로 부지런히 기어서 一由旬을 가려면 여러 날 걸리겠지만, 그가 만일 남의 배(他力)를 타고 바람에 의지하면서 간다면, 하루에 千里를 갈 수 있다.  이때에도, [앉은뱅이 몸으로 어떻게 하루에 千里를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겠는가. 世間의 뱃사공도 오히려 판단을 초월하는 일을 할 수 있거늘, 하물며 如來法王의 힘으로 不思議한 일을 할 수 없다 하겠는가. ({無量壽經宗要}){{) 上同.

}}

元曉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실로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를 돌아 보라. 마음이 열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如來만을  우러러 한결같은 마음으로 엎드려 믿어라. 이와 같은 사람은 그 行業에 따라 반드시 마음이 열릴 것이니라. 결코 삿되지는 않으리라. ({無量壽經宗要}){{) [大正新脩大藏經]第37卷. p.131b.

}}

여래를 향한 專一하고 순수하고 절대적인 신앙이야말로 원효의 실천행의 가장 밑바닥에서 버티고 있는 사상적인 근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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