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第 10 莊嚴淨土分 (정토를 장엄함)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3.03.27|조회수16 목록 댓글 0

10 장엄정토분(壯嚴淨土分) (정토를 장엄함)

 

정토(淨土)란 불교가 꿈꾸는 이상(理想)세계(世界)인 부처님 세계입니다. 이러한 정토를 장엄(莊嚴)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노려간다는 것입니다. 커다란 사원을 곳곳에 세우고 화려한 불상을 많이 만들어 거리에다 늘어놓아야 우리가 바라는 불국토 건설이 된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국민 모두 모두가 경을 보란 듯이 들고 큰 소리로 부처님을 부르고 다닌 다고 저절로 정토가 약속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이 진정한 불국 정토가 되려면 보살이 많아야 합니다. 그 것도 반야바라밀 실행자가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연기(緣起)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고,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보살들이 마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이 세상은 정화되는 것입니다. 정화했으되 정화했다는 마음조차 없는 그 마음이 되었을 때 우리들 세상은 아름다운 불국토(佛國土)가 장엄하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고수보리(告須菩리)하사대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如來)가 석재연등불소(昔在燃燈佛所)하야 어법(於法)에 유소득부(有所得不) 불야(不也)니이다. 세존(世尊)하 여래(如來)가 재연등불소(在燃燈佛所)하사 어법(於法)에 실무소득(實無所得)이니이다:해설””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생각하느냐,여래가 옛적에 연등불 회상에서법에 얻은 것이있느냐, “”아닙니다. 세종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실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금생(今生)의수행을 반야의 안목에서 살펴 보았는데 더 나아가 부처님의 과거 수행까지도 반야의 거울에 놓고 봅니다. 수보리는 보지도 못한 부처님의과거 일임에도 불구하고 실로 얻은 것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부처님과 제자 수보리는 진실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이루었다고 하겠슴니다. 진실로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으로 계합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 회상에서 수기(授記)르르 받았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 아주 오랜 세월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게서 보살로 잇으면서 수행을 할 때 그 댱시의 부처님이신 연등(燃燈) 부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뵈오러 갔습니다. 가서보니 연등불께서지나갈 자리에 흥건하게물이 고여 진흙이 질퍽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엎드려 머리를 플어 가지고 진흙을 덮어 연등불께서 젖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갸륵한 보살행으르 보고서ㅓ 연등ㅇ불이 수기를 주셨습니다.

“”그대는 깨달은 성자를 위하는 보살행으로 해서 장차 석가족에 태어나 출가 성도하여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예견되어 있엇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은 매우 획기적이기도 대단한 자부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등불 회상에서 수기 받은 것도 참지혜의 안목에서 보면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그 당시 부처님과 부처님의제자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 즉 깨달음, 설법, “”금강경””수행의 열매, 수보리의수행, 심지어 부처님의 과거 수행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상을 제거해 갑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우리의 경안(經眼)을 열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부처님의 명호가 연등불(燃燈佛)입니다. ‘등불을 켜신 부처님 이라는 뜻입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스승은 바로 등불을 켠 부처라는 것입니다, 이 등불은 과연 무슨 등불이겠습니까. 결국 지혜고 반야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만 뚫리면 바로 그 자리에서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지혜의 등불을 밝혔을 때에는 바로 부처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른 부처님의 명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락세계가 성취되게한 아미타 부처님은 무량광(無量光)” 부처님입니다. 한량 없는빛, 지혜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 인해 밝은 눈이 생기면 부처가 될 뿐만 아니라 극락세계(極樂世界)도 바로 뚫린다는 것입니다.

, 화엄경으 주된 부처님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바로 ‘’광명변조(光明遍照)부처님’’’’대일여래(大日如來)입니다. 광명이 두루비추인다는 뜻이며 동시에 거대한 태양과 같은 빛덩어리의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도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이이만 번이나 반복하여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전 곳곳에서 밝은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멀리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만 있으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보고 자기 인생에서 이익이 되는 것만 집어 와서 행ㅇ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의 밝은 지혜만 있으면 바로 그 자이세서 부처가 되고 화장 장업 세계도 펼쳐지고 극락 세계도 곧바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면서 이렇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면 더욱 버 바르고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연등불이 몇 천년 전의부처님이고 어느 지방에서 교화하였을가, 석가모니 부처님의스승이니 더 훌륭하겠네 등 중요하지 않는 말에 좇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돌보다는 사람을 쫓아오고, 삽살개는 돌을 쫓아가는 법입니다 그래서 ‘’의의불의어(依義不依語)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순수한 신앙에다 이런 올바른 안목을 가진 다면 가장 바람직한 불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보살(菩薩)이 장엄불토부(莊嚴佛土不)아 불야(不也)니이다 세존(世尊)하 하이고(何以故)오 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는 즉()비장엄(非莊嚴)일새 시명장엄(是名莊嚴)이니이다 :해설””” 수보리야,어덯게생각하느냐. 보살이 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금강경은 삼십이분으로 되어 있지만 더 세분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느느 부처님의 과거 수행을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정토 장엄의 문제를 제기합니다.ㅏ 부처님의 과거 수행을 이야기하다가 화제를 바꾸어 국토 장엄으이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과거 연등불 회상에서 보살로 있을 때 그 국토를 장엄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같은 보살이 연등 부처님의 세계에서 부단히 수행하여 그 연등불의 세계를 빛나게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이 사바세계를 장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너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보살이 국토를 장엄하느냐고 물은 까닭은 일반적으로 국토를 장엄하기 위해 유리 금, 은 등의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들로써 장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부처님께서는 이 단계는 이미거쳤다고 생각하고 보살 즉, 훌륭한 사람이 많이 살아야 국토를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경제 성장이 잘 되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높은건물이 세워지고 고속도로가 전국으로 통했다고 해서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아닌 것입니다. 화장 세계가 되려면 우선 좋은 사람이 많이 살아야 합니다.그렇지 못하니 우리들이 차마 뉴스르르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온갖 궂은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볼 것 같으면 이런 부처님의 과거생에 있어서 국토를 장엄한 것이나 보살들이 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혜의 안목에서 볼 것 같으면 이런 부처님의 과생에 있어서 국토를 장엄한 것이나 보살들이 국토를 장엄한 것이다는 것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살이 장엄한다는 상을 낼래야 낼 수가 없고 또, 내어지지도 않으므로 수보리가 아닙니다하고 부정을 합니다. 일차적인 물질로서의 장엄과 나아가 보살들의 청정행을 통한 장엄을 뛰어넘어서 가지가지 사변을 떠난 텅 빈 마음으로 장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심정토(唯心淨土)라 하겠습니다.

지혜의 안목에서 보면 외사대인 바깥사물과 내사대인 이 몸이 텅 비었고 더 나아가 오온(五蘊)마저 비어 그야말로 몸도 마음도 텅 텅 빈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는 것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실상이 그러합니다.

무엇이 있을 것 같으면 그 잇는 것에 걸려 넘어져 힘을 쓸 수 가 없고, 또 그 있는 만큼 밖에 쓸 수가 없고 또 그 있는 만큼밖에 쓸 수가 없고 언젠가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부처와 보살로서 지혜의 보배를 가지고 밝고 힘에 넘치는 반야의 삶을 한없이 한없이 펼쳐 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의 삶이 됨으로써 원력(願力)과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활기찬 삶이 될 수 있음을 금강경 곳곳에서 밝혀 놓고 있습니다.

 

시고(是故)로 수보리(須菩提)가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何薩)이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이니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무소주(應無所住)하야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니라.:해설”””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국를장엄하느냐””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4에서 마음을머무르는 법에 대햐어 이야기하다가 그동안 계속하여 부처님의 성도(成道)와 교화(敎化)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여기서 마음을 머므르는 문제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들도 긴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어 나갔다가 “”무슨 이갸기 하려고 했지? 하면서 본 죽기를 찾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마음을 머무르는 문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청정(淸淨)한 마음이란 바로 텅 빈 마음, 물에 지친 달과 같은 마음, 거울과 같은 마음입니다. 사상(四相)과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모두 다 떠나 보낸 수승한 마음입니다. 물질이나 육진 경계에 머물러 주착하여 마음을 내어서는 그 마음밖에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 머문다는 것은 바로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 반대로 상이 있으니까 머물게 됩니다. 상이 없다면 머물러지지 않습니다.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위의 온갖 물질이나 현상, 감정에 치우쳐 살아가는데 우리들이 믿는 만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무심히 안 넘기도 전부 다 보고 생각을 붙이고 시비를 걸어서 스스로 상처받고 가슴 아파합니다.

거울이 온갖 사물을 비추지만 애착(愛着)이나 의지(意志)를 갖고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예쁜 사람이고 거부 장자라 하여 더 많이 비추어 주고, 못났고 비천하다 하여 적게 비춰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서 있을 동안 무심히 비출 뿐입니다. 꽃이 오면 꽃을 그대로 비추어 주고 꽃이 가 버리면 가 버리는 대로 또 그 대로 있습니다.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청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없어 컴컴하거나 거울에 대와 먼지가 쌓여 있다면 가까이 오는 것을 비추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그 어떤 것에 집착을 해 있다면 먼지가 쌓인 거울처럼 지혜가 드러날 수 가 없습니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떠 오르는 법이고 어제 오늘의 태양만 있는 ㄱ것이 아닙니다. 초생달이면 초생달만큼만 반달이면 반달만큼만 보름달이면 보름달만큼 빛을 갖고 살아갈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엔가 머물러 고정 관념을 갖고 살아갈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맞게 슬기를 발휘하여 언제나 적극적이고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응당 머문 바 없이(應無所住)  그 마음을 낼지니라(而生其心)””

 

이 구절은 제 2사구게로서 육조 慧能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육조 스님이 낫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시절, 나무를 팔아 홀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어렵게 꾸려 갔습니다. 어느 날 손님에게나무를 배달하고 복도를 걸어나오다 어느 수님이 방 안에서 금강경중 바로 이 대목을 독송하는 소리를 등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그것이 見性인지 成佛인지 육조 스님 자신은 그 말조차 몰랐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스님의 소개로 황매산으로 가서오조 홍인 대사를 찾아 뵙고 거기서 더욱 금강경에 정진하여 마음밭을 활짝 일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사와 발우를 전수받아 우리가 아는 육조 혜능대사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 뒤부터 더욱더 이 금강경이 禪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었습니다 구 뒤에는 일화오엽(一花五葉)이라 하여 육조 스님 밑으 우수한 제자들에 의해 선()의 오종 가풍이 열매를 밎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항상 육조 스님의 일화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수보리(須菩提)야 비여유인(譬如有人)이 신여수미산왕(身如須彌山王)하면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시신(是身)이 위대부(爲大不)아 수보리(須菩提)가 언()하사대 심대(甚大)니이다. 세존(世尊)하 하이고(何以故)오 불설비신(佛說非身)이니 시명대신(是名大身)이니이다.:해설””수보리야,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만 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수보리가 말슴드리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이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실 작은 것을 부정하기는 쉽습니다. 가난하고 옹색한 살림살이는 빨리 벗어 던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거대하 것, 또 억만장자 같은 살림살이를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래서 수미산 같은 몸뚱이를 가져다가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한 없이 큰 수미산만한 몸에다 왕()자까지 붙여 큰 것을 더욱 강조합니다. 수미산만한 몸이니 당현히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보리가 매우 큽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익혀온 바로는 아무리 아무리 몸이 수미산만큼 크다고 해도 역시 한계가 있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몸 아닌 것은 유루의 몸, 즉 육신이라는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입니다. 이처럼 한계가 없이 무한히 큰 몸이기 때문에 온 우주 편만(遍滿)해 있으므로 실로 그 몸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으로 된 것이 안ㄴ 마음의 몸인 까닭에 상이 없고 툭 트였으므로 진실로 큰 몸이라 이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히 깊고 큰 마음의 몸이 참으로 큰 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불국토르르 장엄한다는 것은 사원을 크게 짓고 요란하게 장식을 하고 불상을 천만 개씩 만들어 늘여 놓고서는 예배를 올리는 그런 장엄이 아니고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 마음의 몸으로 시원하고 크게 사는 것입니다.

………..불기 2557년 정월21일 늘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불자 심광거사합장……..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남진혁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