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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정토석의 淨土釋疑 (정토에 대한 의심을 풀다)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5.03.09|조회수14 목록 댓글 0

정토석의 淨土釋疑

 

 

 

1.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무량수경』·『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 중에 모두 칭명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고, 신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 신심과 일향전념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답: 아미타불의 구제는 조건이 없으시고,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현재 이미 완성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현재 이미 완성된 것이라 했는데, 그럼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당신이 이 법문을 듣고 믿고 나서 끊임없이 칭명을 하되, 짧게는 열 번·다섯 번·한번, 길게는 백번·천번·만번, 하루·이레…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한다면 전부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내지 십념乃至十念’이라 부릅니다. 이 ‘염念’속에는 자연히 ‘믿음’과 ‘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것이고, ‘행’이란 바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 이것뿐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조건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염불을 적게 하고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염불을 많이 하시면 됩니다. 심지어 지금 곧 숨이 끊어지려 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아미타불의 구제법문을 듣게 되었다면, 이때에 입과 혀가 굳어서 입으로 염불을 할 수 없더라도 마음속으로 염불을 하면 마찬가지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짧다고 해도 마음속으로 한 번 염불하는 것보다 짧은 것은 없겠지요. 이 일념이 가장 짧은 겁니다. ‘내지 일념’란 바로 이처럼 가장 짧은 시간으로, 지금 당장 죽는다면 지금 당장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수명이 연장되었다면 자연히 부처님을 생각하며 염불하고 칭명염불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때는 내지 하루, 내지 일년, 내지 평생의 염불이 되는 것이지요.

 

  왕생을 구하기 위해서 이 명호를 제외하고 다시 다른 수행을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왕생주도 외워야 하고, 관세음보살도 불러야 하고, 지장보살도 불러야 하고……’라는 말을 듣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바로 선도대사님이 말씀하신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 되는 겁니다.(즉, 누군가 당신에게 왕생주를 외워야 된다고 일러주면, 당신에게 왕생주를 외우라고 일러준 이 기연을 따르고, 누군가 관세음보살·지장보살·멸정업진언 등등을 외워야 한다고 일러주면, 또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그 인연을 따라 닦게 된다면, 이것을 인연을 따르는 잡다한 선이라 부른다. ) 만약 그렇다면 아미타불의 구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기(機:중생)와 법(法:아미타불)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칭명염불을 정정업正定業으로 삼을 뿐, 다른 것은 부르지 않습니다. 하물며 다른 것들은 모두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이지 큰 선근과 큰 복덕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시간과 정력이 있을 때 그는 이 시간과 정력을 갖고 이 한구절 명호를 부를 뿐, 이 명호 외에 그 어떤 수행법문도 뒤섞지 않습니다.

 

  정토법문에서는 오로지 전수를 말하고 유일(유일무이)을 말합니다. 시방제불 가운데 오직 아미타불만이 왕이므로 유일무이한 것이지요. 아미타불의 ‘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최고여서 제불의 광명이 능히 미치지 못한다.光明最尊第一, 諸佛光明所不能及’‘가장最’·‘최고第一’가 바로 유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정토법문은 유일唯一한 법문이고 무이無二한 법문입니다. 우리의 본존은 아미타불이시고, 우리가 절하는 대상 역시 아미타불이시며, 우리가 부르는 부처님도 오직 ‘나무아미타불’뿐이고,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는 것도 단지 아미타불의 구제일 뿐이므로, 모든 게 아미타불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게 전부 아미타불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잡선雜善’(주:왕생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했을 때 전專이 있고 잡雜이 있는 것이다.)이란 여러 가지 선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잡이란 곧 갖가지, 갖가지 선이며, ‘만선만행萬善萬行’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간략히 말하면 삼학과 육바라밀이고, 자세히 말하면 팔만사천법문입니다.

 

 

2.질문: 스님, 많은 사람들이 신심이 결정됨의 문제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을 신심이 결정된 것이라 말할 수 있고, 혹은 어떻게 해야만 왕생이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답: 만약 아미타불의 자비구제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신심이 아직 결정된 게 아니고 아직 통일된 게 아니므로 두 마음 세 마음, 갖가지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마땅히 이 법을 닦아야겠다, 저 법을 닦아야겠다. 염불 외에도 여러 불보살님의 명호를 불러야 되고 또 진언도 몇 가지 외워야겠다.” 이렇게 해서 두 마음 세 마음 등 온갖 마음들이 다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아직 아미타불의 구제를 깨닫기 전에 응당 먼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바로 선도대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법문들을 버리고 오로지 이 명호만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일분이 있으면 이 일분의 시간을 가지고 명호를 부르고, 한 시간·두 시간·열 시간이 있으면 이 시간을 가지고 이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동시에, 무엇이 기機이고 무엇이 법法인지를 체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와 법을 체득하는 가운데 아미타불의 자비심이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될 테니까요.

 

  다만, 당신이 만약에 ‘오로지 부처님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일생동안 염불을 한다면 백프로 왕생하고 반드시 왕생합니다! 왜냐하면 이 법문은 타력의 법문이어서 우리가 왕생을 구할 줄도 모르고 있을 때,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 앞에서 합장하며 십겁 동안이나 우리들에게 구제를 받아달라고 요구하고 있었으니, 하물며 우리가 사바세계를 싫어하여 벗어나려하고 극락에 기꺼이 왕생하려는 마음으로 명호를 부를 때이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이 명호의 기능이 활동하여 우리로 하여금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이 점으로부터 말한다면 이미 자력이니 타력이니 하는 관념들을 던져 버렸고 이미 믿음이니 의심이니 하는 관념들도 모두 던져 버렸습니다. 믿음이란 자연스럽게 그 속에 들어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란 바로 일종의 아미타불의 활동이고 일종의 타력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선도대사님은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결같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라고 했듯이 전부 ‘한결같이一向’를 강조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전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연상인께서 말씀하시길, “한결같이 오로지 명호를 부르면 저절로 ‘삼심’을 구족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설사 당신이 모르더라도 저절로 ‘삼심’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나무아미타불’의 명호자체에 이러한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3.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믿음은 듣는데서 생겨난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답: 방금 이 들음聞의 의미에 대해 해석하였는데, 진정으로 듣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었습니다. 신심의 내용이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깨닫는 것이므로, 마음속으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들음聞입니다. 이 점은 여러분들이 생각을 해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4.질문: 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할 때 관상을 하거나 혹은 좌선하여 도를 깨치려고 하거나 또 밀종의 심주心咒를 지송하며 ‘포와’법을 닦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모두 사람마다 신심이 넘쳐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신심과 제18원에서 말하는 ‘’신락信樂‘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답: 당연히 크게 다릅니다. 제18원의 ‘믿고 기뻐하며’는 아미타불의 구제에 수순하는 것이고, 또 현재 이미 왕생의 신분을 획득하고 임종할 때 보토에 들어가 연꽃에서 화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법문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왕생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회향을 해야만 비로소 왕생할 수 있으며, 게다가 태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토법문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바로 오로지 이 명호만을 부르고, 좌선할 필요도 관상할 필요도 없으며, 밀종의 삼밀상응을 닦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방금 좌선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정좌靜坐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정좌의 방식으로 이 명호를 부르면 됩니다. 물론 당신은 당신의 정좌공부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5.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신심이 결정된 염불과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명호만 믿으면 나는 왕생할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염불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 신심이 결정된 염불과 명호를 믿는 염불,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한 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신심이 결정되었다는 내용이 바로 이 명호이니까요. 이 명호가 바로 아미타불의 원력이고, 아미타불의 원력은 이 명호 속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신심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습니다. 한 방면은 근기를 믿는 것信機이고, 한 방면은 법을 믿는 것信法입니다. 이 두 가지 방면은 사실상 한 가지 내용인데, 다만 따로 해석을 했을 뿐입니다.

 

  근기를 믿음에서 ‘기’는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자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본인은 본인에 대해 체득이 있어야 합니다.

 

  선도대사님은 깊이 믿어야 한다면서, 또

‘자신은 현재 죄악생사범부로서

오랜 세월동안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여

벗어날 기연이 없다.’는 것을 결정코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죄악이 깊고 무거운 범부이며, 세세생생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모두 삼계육도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망망대해 가운데서 수영할 힘도 없고, 또 수영할 줄도 몰라서 줄곧 그 속에 침몰하여 영원히 자신의 힘으로는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육도가 바로 고해인데, 우리 중생들은 모두 이 고해 속에 빠져있습니다. 침몰이란 곧 물속에 가라앉는다는 것으로, 물속에 빠져서 떠오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같은 중생들은 반드시 누군가 바다 속에 뛰어들어 우리를 안고서 해안가로 나와야 하겠지요.

 

  물속에 뛰어들어 우리를 해안가로 안고 나올 힘이 있으신 분이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믿음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법에 대한 깊은 믿음信法입니다. 두 번째,

  '저 아미타불께서 사십팔원으로 중생을 섭수하시니,

 의심과 걱정 없이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 는 것을 결정코 깊이 믿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깊은 믿음은 일종의 체득(깨달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물속에 빠졌을 때 아미타불께서 직접 물에 뛰어들어 우리를 안아주신다는 겁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한 진실로 충만하여 괴로움과 불안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실제체득입니다.

 

 

6.질문: 저에게는 그러한 신심이 개발되는 그 순간의 체험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한다.’,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고 행주좌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만 믿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스님, 이런 느낌은 제18원에 부합하는지요?

 

답: 이는 모두 제18원에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서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 와 행주좌와를 따지지 않고 염념마다 명호를 잊지 않고 있는 이상, 어느새 이미 제18원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생을 하는 것은 우리 중생들 쪽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생은 본래부터 아미타불의 명호의 공덕력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호를 칭념하는 사람은 그가 알고 모르고, 구하고 구하지 않고 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왕생의 기능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마치 염불하는 사람의 몸에 불광佛光이 있고 머리에 빛살毫光이 있는 것처럼 이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설사 본인이 모르고 또 보지 못했을지라도 자연히 그런 기능이 있게 되는데, 명호의 기능·명호의 자성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의 기능은 태우는 것이어서 일단 불을 붙이기만 하면 반드시 타게 되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알던 모르던, 심지어 당신의 입으로 혹은 마음속으로 불이 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타지 않기를 원해도 불은 반드시 타게 되어있습니다. 당신이 불을 붙이지 않으면 몰라도 한번 불을 붙이면 반드시 타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우는 것이 바로 불의 기능이니까요.

 

  이 명호자체가 우리를 왕생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명호를 칭념하면 왕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알고 칭념을 하면 믿음은 바로 그 속에 있게 됩니다. 설사 이러한 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계속해서 칭념만 할 수 있으면 그래도 반드시 왕생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직접 운용하시니까요.

 

  신심의 개발과정을 기록하고 또 눈에 선한 사례가 바로 법연상인의 사례입니다. 법연상인께는 여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법연상인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은 43세에 이르러서야 염불에 대한 신심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셨지요. 법연상인의 말씀에 의하면, 상인께서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법문을 찾기 위해 대장경을 다섯 번이나 열람하셨답니다. “도대체 어떤 경전에서 해석한 법문이 나에게 적합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여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것인가?” 법연상인은 그 당시에 지혜제일로 불렸을 정도였는데, 지혜제일인 법연상인께서 해탈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여전히 경전 한부 한부와 논서 한부한 부를 계속 뒤지고 계속 보셨는데, 총 다섯 번을 읽고 맨 마지막에서야 선도대사가 지은 『관경사첩소』속에서 명호를 칭념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이 법문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이 법문은 모든 사람들이 전부 수행할 수 있고 간단하면서 빠릅니다. 그래서 다른 경전은 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관경사첩소』만 다시 세 번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한번을 보고나서 비록 대의와 핵심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매우 기뻤답니다. 다시 두 번째로 봤을 때는 더욱 위안이 되었지요. 다시 세 번째로 볼 때, 마침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묻지 않고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본원에 순응하는 까닭이다.

 

는 글을 보게 된 것이지요.

 

이 단락의 법어를 보고 있을 때, 법연상인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마음속에 막혀 있던 돌멩이가 그 순간 바로 떨어져 나간 것이었습니다.

 

  상인께서 무엇을 깨달은 걸까요? 그분이 깨달은 것은, 본래 우리들의 왕생에 관한 이 일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십겁이전에 우리들을 위해 전부다 미리 준비해두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준비해주신 것이 바로 이 명호입니다. 왕생이라는 이 일은 이 명호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칭명만 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한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행주좌와에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의미는, 우리가 이 명호만 부른다면 걸으면서든 서서든 앉아서든 누워서든 어떠한 시간이든 어떠한 장소든 어떠한 상황이든 전부 상관없고 전부 제한이 없어서 단지 이 명호만 칭념하면 수행시간이 길든 수행시간이 짧든 전부 왕생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묻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구제에는 조건이 없으시고,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여기에다 벌려놓았으니 우리가 발견하는 즉시 가져가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염불하는 이상, 그 누군들 할 줄 모르겠습니까! 다 할 줄 압니다. 그리고 하루에 십만 번씩 불러야 한다든지 몇 천만 번씩 불러야 한다든지 일절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반드시 출가·제가·남자·여자, 경전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거나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등을 전부 제한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이 명호만 부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신분이면 이러한 신분으로 이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단지 이 명호만 칭념하면 왕생의 여부는 우리의 어떠한 공부와 실력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칭념하고 저렇게 칭념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쪽에 있는 게 아니라 완전히 아미타불쪽에 있는 것이겠지요. 아미타불께서 염불하는 중생을 구제하시겠다고 발원하셨기에 중생이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연상인이 이 단락의 법어를 보셨을 때 그 자리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큰 소리로 염불을 하신 것이었지요.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그 때는 이미 밤이어서 사람이 없었기에 상인은 큰 소리로 염불하신 것입니다. ‘원래 아미타불께서 나를 구제해주시기 위해 십겁이전에 이미 구제할 방법을 찾아놓으셨구나.’ 이는 법연상인의 신심이 개발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선도대사에 관해서는, 선도대사가 도작선사를 뵈러 가셔서 도작선사께서 그에게 『관무량수경』을 설명할 때, 선도대사님의 마음속에 있던 의심들이 다 끊어졌는데, 그 뒤로 다른 법문을 다 버리시고 일심으로 이 명호만을 칭념하셨답니다. 

 

  어떤 사람은 ‘일념의 신심’을 추구하지만 체득할 수도 없고 해서 칭명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그 신심의 경계만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무상한데, 지금 죽으면 바로 윤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칭명만 하면 됩니다. 더군다나 칭명하는 가운데 신심은 바로 그 속에 들어있거든요. 두려운 것은 당신이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결국은 다른 법문을 닦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반드시 선지식을 따라다니면서 곁에서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신앙이 같은 연우님들과 자주 모여서 연구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견해가 다른 연우님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되도록 피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아주 연약하여 쉽게 넘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도반·선지식들과 자주 토론도 하고 자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이보다 더 큰일은 없을 테니까요.

 

 

7.질문: ‘믿음에는 필히 명호를 구족하지만, 명호에는 반드시 진실한 믿음을 갖춘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스님께서 법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바꾸어 말하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드시 칭명염불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감은하는 분이 바로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하고 계속해서 염불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는 필히 명호를 구족하는 것’입니다.

 

  그럼 ‘명호에는 반드시 믿음을 갖춘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은, 칭명을 하는 사람이 설사 칭명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 믿음이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명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또 그 분들이 모두 염불하고 있지만, 반드시 아미타불의 구제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한편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왕생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중도에서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법문이 좋고 저 법문이 좋다고 하면 따라서 다른 법문을 닦으러 가게 되어 끝까지 관철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칭명이 따르게 됩니다. 만약에 믿음은 있지만 칭명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염불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은 믿음을 염불 속에 스며들게 하여, 염불을 하는데 힘들다거나 혹은 무슨 상에 집착한다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칭명염불은 마음속으로 해도 되고 입으로 해도 됩니다. 기쁠 땐 팔짝팔짝 뛰면서 하셔도 됩니다. 이런 것들은 마음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거거든요.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듣고, 환희심에 저절로 칭명을 한다.’는 말씀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이 명호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설사 신심과 불신의 내용이 도대체 어떤 건지 몰라서 아예 그것들은 한쪽에다 던져버리고 단지 ‘설사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아미타불께서는 그래도 구제하신다.’는 것만 믿는다면, 믿음은 이미 그 속에 들어있으므로, 그 뒤로 칭명만 하면 됩니다. 오늘 하루의 시간이 있으면 하루 동안 명호를 부르고, 하루가 지나서 수명이 다 되었다면 당연히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이틀의 시간이 남았다면 이틀 동안 칭명을 하고, 칠일이 남았거나 두 개의 칠일·일곱 개의 칠일, 혹은 칠년·칠십년이 남았다면 당신은 그 시간에 한결같이 염불만 하시면 됩니다. 절대 ‘나에게 시간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이것을 닦고 저것을 닦고……’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8.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오직 믿음과 발원을 갖추고 염불하는 사람만이 아미타불의 심광心光의 섭취를 받고, 믿음과 발원 없이 염불하는 사람은 광명의 비춤만 받을 뿐 섭취되지 않기 때문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도리입니까?

 

답: 부처님의 광명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신광(身光:몸에서 나오는 광명)이고, 하나는 심광(心光:마음의 광명)입니다. 신광이든 심광이든 사실은 모두 일체一體여서 모두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기 때문에 태양과 같아서 태양이 한번 나오면 땅위의 어떠한 동식물들은 전부 햇빛이 두루 비추는 가운데 있게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아미타불의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는데, 어떠한 중생도, 선인이든 악인이든 심지어 지옥중생들까지도 아미타불 광명의 두루 비춤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명호를 부를 수 있는 사람만이 광명의 섭취를 받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이 명호자체가 아미타불의 본체이므로 이 명호를 부를 수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아미타불 심광의 섭취를 받게 되고 아미타불의 서원과 서로 감응을 하게 되니까요.

 

  아미타불의 심원心願은 이 명호 속에서 드러나 명호를 칭념하는 사람을 구제하려 하시므로 우리가 명호를 칭념하는 것은 부처님의 심원心願에 부합하여 어느새 부처님의 광명의 비춤과 섭취를 받게 되고, 그분의 심원과 감통하게 됩니다.  

 

  마치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가 전국의 방방곡곡에 보내져서 어느 한 곳에도 방송국의 전파가 없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당신이 그 채널로 바꾸지 않아서 바로 그 방송국과 서로 감응을 하여 한데 연결되지 않는다면 정보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미타불의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지만 우리가 칭명을 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심광과 감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칭명만이 아미타불의 심원이거든요.

 

  아미타불의 명호가 바로 아미타불의 본신本身인데, 바로 이 명호, 명호밖에 따로 본체가 없고 본체밖에 따로 명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면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분의 심광의 섭취 가운데서 왕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칭명을 하지 않는 자는 광명섭취의 이익이 없습니다.

 

 

9.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모습입니까?

 

답: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미타불에 대해 신심이 있고 공경심이 있으며, 자신에 대해서는 양심이 있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아끼는 마음이 있고 포용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미타불께서 본인을 아끼시는 마음을 깨닫고, 본인에 대한 아미타불의 크나큰 사랑을 느낄 때, 자신은 죄악이 있는 사람임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양심이 있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서 일단 말이나 행위상에 허물이 있으면 즉각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 예전보다 더 심각하게 반성하게 됩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아끼시는 마음과 우리들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하심은 굉장히 광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을 말한다면, 우리는 죄악이 두터운 사람들로서 다겁생 동안 무궁무진한 죄업만 지었기에, 금생에 자신을 반성해보면 자신은 시시각각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인내하고 타인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들이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바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죽어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처럼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도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십니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크고도 너그러운 용서에 감동하여 중생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생명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감시하게 되므로 우리의 반성하는 힘도 더욱 예민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9.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모습입니까?

 

답: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미타불에 대해 신심이 있고 공경심이 있으며, 자신에 대해서는 양심이 있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아끼는 마음이 있고 포용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미타불께서 본인을 아끼시는 마음을 깨닫고, 본인에 대한 아미타불의 크나큰 사랑을 느낄 때, 자신은 죄악이 있는 사람임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양심이 있고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서 일단 말이나 행위상에 허물이 있으면 즉각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 예전보다 더 심각하게 반성하게 됩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아끼시는 마음과 우리들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하심은 굉장히 광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을 말한다면, 우리는 죄악이 두터운 사람들로서 다겁생 동안 무궁무진한 죄업만 지었기에, 금생에 자신을 반성해보면 자신은 시시각각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인내하고 타인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들이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바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죽어도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처럼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도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십니다! 우리는 아미타불의 크고도 너그러운 용서에 감동하여 중생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생명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감시하게 되므로 우리의 반성하는 힘도 더욱 예민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10.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도 괴로움은 있습니다. 평소에 염불하면 법희가 있다고 하셨는데 괴로울 때 염불해도 법희가 있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답: 아미타불의 자비하신 구제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염불이 좋다고 말하면 그 사람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역경이 들이닥친다거나 번뇌가 생겨난다거나 병통이 있다거나 하면 이 명호는 33천 밖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만약에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듣고서 믿고, 이 명호의 원리에 대해 듣고서 믿는다면 번뇌가 오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법희가 있을 것이고 괴로워서 소리 내어 염불할 수 없더라도 위안이 있을 것이며, 역경이 닥쳐 올 때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번뇌가 왔을 때 번뇌를 번뇌라고 여기지 않고 고통이 왔을 때도 고통으로 근심하지 않으며, 이 명호를 부를 수 없더라도 마음은 항상 안온한 상태일 것입니다. 동시에 그 사람이 만약에 염불을 할 수 있다면 본래 괴로워서 “아야! 아야!”하던 소리 대신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듣고서 믿는 사람은 심성도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구제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는데, 우리와 따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통크게 우리들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셨거든요. 통크게 우리를 용서해주실 때 우리는 감동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남들과 이것저것 따지지 않게 됩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것은, 비단 우리의 생명을 구제하여 다시는 육도윤회를 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무량수의 생명과 무량광의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무연대자와 동체대비’의 생명을 주시며, 우리에게 부처님과 같은 지혜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생명만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그토록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동시에 우리에게 극락세계를 주십니다. 보세요, 이런 것들은 얼마나 풍부하고 얼마나 고귀합니까! 찰나 간에 이 모든 것을 갖게 되었으니, 찰나 간에 온화하고 점잖으며 귀티가 나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면하여 그들이 필요한 게 있다면 나에게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베풀어서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마치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며 우리를 만족시켜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있을 겁니다.

 

  이런 변화들은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려는데, 이 사람이 만약에 좋은 사람이면 그가 잘못한 일에 대해 우리가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쉽게 용서해줄 수 없는 사람을 우리가 용서하려면 반드시 우리의 마음속에 일종의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아미타불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셨고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포용해주셨기 때문이지요.

 

  우리 스스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떤 중생들입니까? 이 마음은 아주 비천하고 아주 더러워서 남에게 말할 수 없고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아미타불께서는 조금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아미타불의 이러한 자비를 느낄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전부 포용하고 용서를 해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게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방중생들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변화시키는 기능이 존재하기에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토법문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이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부드러워지고 나면 그다지 따지지 않고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나타나게 되며,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주게 되고 일종의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겁동안 우리가 중생들에게 아직 갚지 못한 빚이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고, 또 여태껏 모르다가 지금 아미타불이 비추시는 광명에 닿고서야 ‘내가 본래 이런 중생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따라서 정토법문이 자력법문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력법문은 자신이 육도만행을 닦고 자신이 보시와 인욕의 행을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베풉니다. 비록 베풀더라도 우리가 보시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자신이 죄악생사범부임을 알고, 자신이 지은 공덕은 모두 유루이고 모두 거짓된 마음이고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고 공리심이 존재하여 전혀 진실한 베품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미타불께서 극락세계를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고 성불의 공덕을 우리에게 보시해주셨기에 우리가 자연스럽게 베풀려는 마음을 내게 되고 또 베풀면서도 오직 보답만을 바라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공덕을 아미타불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기에 우리는 다시 공덕을 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인욕을 놓고 말한다면, 예전에는 전부 자신이 인욕하고 또 인욕하고, 남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일들도 인욕하고 모든 역경도 인욕하고 남들의 비방과 때리고 욕하는 것도 인욕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는 단지 상대방이 우리들을 인욕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남들에게 빚졌던 것, 남을 모욕했던 것, 심지에 금생에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용서와 인내를 구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고 인내하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변화가 있을 겁니다.

 

  제18원의 내용이 바로 근기를 믿고 법을 믿는 것입니다. ‘근기’는 시방중생이고, ‘법’은 아미타불의 구제입니다. 시방중생은 바로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중생들이고, 시방중생은 죄악이 깊고 무거운 윤회에서 벗어날 기연이 없는 중생들(죄악이 많기 때문에 ‘벗어날 기연이 없음’)입니다. 만약에 죄업이 없다면, 그렇다면 성인이고 완벽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죄업이 없고 또 삼계로부터 벗어날 힘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는 오직 사람들이 그들이 베푸는 은혜를 입을 뿐, 그분들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이 그들의 감화를 받을 뿐, 그들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의 죄업이 깊고 무거워서 벗어날 기연이 없는 이상,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빚을 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심정에는 이러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중생들의 근기가 제각기 달라서 습기가 비교적 심한 사람은 갑자기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번개가 치듯이 자신의 습관이 나오게 되겠지요. 하지만 사후에는 즉각 반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우리는 근기를 깊이 믿고 법을 깊이 믿는 사람이므로 기와 법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매우 심각하고 매우 예민하니까요. 그러므로 그 당시에 알아차리지 못했다하더라도 사후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11.질문: 방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관경』의 요점은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一向專稱彌陀佛名’에 있으므로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칭명은, 한 가지 이론의 해석에 의하면 칭명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만 불퇴전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인가요? 스님께서 이 두 가지 칭명의 구제적인 함의에 대해 해석해시기 바랍니다.

 

답: 제가 방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것 같은데, 응당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는 이 ‘칭명’에 대해, 그리고 몇 가지 칭명이 있는지, 그 몇 가지 칭명에 내포된 함의와 성격 또한 어떤 것인지에 대해 덧붙여서 해석을 하겠습니다.

 

  칭명은 자력의 칭명과 타력의 칭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력의 칭명은 바로 일반적인 칭명입니다. 어떤 것이 자력일까요? 바로 ‘타력 중의 자력’입니다. ‘타력’이란 아미타불의 구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아미타불의 구제는 아미타불의 힘이어서 모든 공덕을 전부 구족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원리를 몰라서 아미타불께서 비록 우리를 구제하려 하나, 그분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멀리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므로, 우리들은 여기서 머리 숙여 정례해야 하고 여기서 멀리 기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비록 왕생을 구하려고 하지만 반드시 공덕을 쌓아야 한다거나 혹은 칭명의 실력과 공덕을 쌓아서 회향을 해야만 아미타불의 구제와 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또 ‘비록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려 하지만 우리가 만약에 어떤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구제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력 중의 자력’ 으로, 아미타불께서 조건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18원에서 말하는 ‘내지 십념’의 칭명염불이 아닙니다.

 

  타력의 칭명이란 곧 제18원의 칭명염불로서 진정한 ‘내지 십념’의 염불이며, 또한 선도대사님이 해석하신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입니다. 이런 염불은 완전히 조건이 없고 완전히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이는 염불이어서 염불을 하는 자체에 계산이 없고 헤아리고 분별함이 없습니다.

 

  만약에 ‘마땅히 「사리일심事理一心」이 되도록 염불해야 하는데, 「이일심理一心」이 안 되면「사일심」이라도 되어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최소한 공부성편工夫成片·몽매일여夢寐一如·정념상계淨念相繼’정도는 되어야 만이 임종할 때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현생에 만약에 그러한 공부가 되지 않으면 임종 시에 어떻게 정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평소에 먼저 「흐트러지지 않는不亂」능력을 배양해야만 임종이 되었을 때 정념이 있게 되고 그 때에 부처님께서 영접을 해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임종할 때 정념이 없어서 부처님이 영접하러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것이 바로 자력의 관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자명호의 원리와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소치입니다. 이런 관념들은 마치 아미타불의 가슴에다 비수를 꽂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본의는 전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시방중생들 가운데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아주 드물 것이다.) 아미타불은 무연대자·동체대비여서 그분은 우리를 그분자신처럼 보시거든요. 게다가 우리를 구제할 공덕을 이미 다 완성해놓으시고 오직 우리에게 당신의 구제를 받아달라고 부탁하시는데, 그런 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조건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이라도 내세운다면 시방중생들이 왕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텐데, 아미타불의 대자대비하신 지혜의 마음에 그걸 모르고서 억지로 어떠한 조건을 내세우시겠습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애로운 부모님이 일찍이 가장 아끼던 어린 자식을 잃었다가 지금에서야 아들의 소재를 발견했는데, 거기서 비바람을 맞으며 고통 받고 있고 하루 세끼조차 해결할 수 없는 이런 아들의 모습은 자애로운 부모님이 보자마자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아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그의 가난과 어려움을 면해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줄곧 어리석고 성품이 저열하여 부모님이 가지고 계신 부귀영화는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면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최소한 어떻게 어떻게 해야만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바깥에서 오래 살다보니 스스로 일종의 비열한 생각을 갖게 되어 부모의 자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모의 마음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미타불에 대해 그러한 관념을 갖고 있다면, 아미타불의 가슴에다 비수를 꽂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것은 일종의 자력적인 염불을 하는 마음상태입니다.

 

  타력의 염불에는 이런 것들을 일절 말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이러한 근성에 따라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일심이 되던 안 되던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목표로 삼고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니라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아들이며 이 명호를 칭념하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공덕의 보배구슬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소리소리마다 모두 이 보배구슬로부터 나오는 광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염불소리는 보배구슬이고 저 염불소리는 보배구슬이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다. 소리소리마다 전부 이 보배구슬의 광명입니다. 왕생은 이 명호의 보배구슬이 우리를 왕생케 하는 것이지 우리의 입으로 부르는 칭념의 실력이 우리를 왕생케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 아미타불의 명호의 보배구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시시각각 칭명을 하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비록 이렇게 나타나서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하고 칭명하지만 마음속에는 일종의 실력을 쌓는다든지 아니면 ‘사리일심事理一心’에 도달해야 한다는 그런 관념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아미타불로부터 구제를 받은 사람이고 이미 극락세계의 왕생이 결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의 염불은 마음속의 그 밝은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명이며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가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에 대해 해석을 하실 때,

 

  ‘행주좌와에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고,

  염념마다 버리지 않는다.’ 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가운데 우리의 이 마음은 산란한 것입니다. ‘행주좌와’이기 때문에 단지 조용히 좌복위에 앉아서 정좌염불을 하는 게 아니라 걸을 때도 염불하고 서서도 염불하고 누워서도 염불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당신이 수행을 한 시간이 길고 짧음과 상관없이 일 년을 염불하던 십년·이십년을 염불하던 ‘시간이 오래고 가깝고’를 상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내지’의 의미입니다.

 

  ‘내지’란 바로 당신이 출자자든 재가자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지혜롭든 어리석든 현명하든 현명하지 않던 간에 모두 ‘내지’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지’가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출가하고 발보리심하여 내지 십념’으로 한정하여 말했다면 큰일 나겠지요. 출가를 한 사람은 적은데다가 또 발보리심까지 해야 한다면 보리심을 발할 수 있는 중생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지’라는 것은 신분상에도 ‘내지’이고 숫자상으로도 ‘내지’이며, 심정상·심리상에서도 모두 ‘내지’이기 때문에 이 ‘내지’의 함의는 굉장히 넓습니다.

 

  ‘내지’라는 두 글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염불이 바로 그런 ‘내지 십념’의 칭명염불입니다. 그리고 ‘내지 십념’의 칭명염불을 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이미 아미타불의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본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력·타력염불의 다른 의미입니다.

 

 

12.질문:스님께서 법조대사님의 ‘저 부처님의 인중에서 세운 크신 서원’이라는 게송에 대해 해석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답: 좋습니다! 전체 게송은 이렇습니다.

 

저 부처님의 인중에서 세운 크신 서원,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전부 내영하니,

彼佛因中立弘誓,聞名念我總迎來,

빈부귀천 가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음과 뛰어난 재능 가진 이 가리지 아니하며,

不簡貧窮將富貴,不簡下智與高才,

많이 듣고 청정지계 한 이 가리지 아니하고, 파계하여 죄업 깊은 이 가리지 아니하며,

不簡多聞持淨戒,不簡破戒罪根深,

다만 마음 돌려 염불만 많이 하면 깨어진 와륵瓦礫도 금으로 변할 수 있다네.

但使迴心多念佛,能令瓦礫變成金。

 

  이 게송은 바로 제18원을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18원에서 아미타불께서 구제할 대상이 바로 시방중생이기에 시방중생의 범위는 매우 넓어서 시방중생 속에 포함되지 않는 중생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대사께서 이 게송으로써 해석하신 것입니다.

 

  ‘저 부처님의 인중에서 세운 크신 서원’: ‘저 부처님’이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인지因地에 계셨을 때 48대원을 세우셨는데, 그 중에 가장 크고 넓은 원이 바로 제18원이므로 제18원은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원입니다. 제18원에서 설하기를,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전부 내영한다.”고 하셨지요.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모두 내영한다.’: ‘나를 부름’이 바로 ‘내지 십념’인데, ‘내지 십념’으로 염불한 중생을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게 아미타불의 본원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말씀하시길, “만약에 나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을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할 수 없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내지 십념으로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른바 ‘이름 듣고 나를 부르면 모두 내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방중생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간簡’은 간별한다, 버린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간별하여 버리고서 부귀한 사람만 영접하지 않고 ― 부귀한 사람만 귀하게 여기고 빈천한 사람은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귀’하던 ‘빈궁’하던 간에 그 사람이 아미타불의 명호만 칭념한다면 전부 구제해주시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전부 왕생할 수 있어서 따로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와 뛰어난 재능 가진 이 가리지 않는다.’: ‘하지下智’는 지혜가 없고 글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어리석고 우둔하고 용렬한 사람을 말하고, ‘고재高才’는 가장 영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상근기인 영리한 사람이든 하근기인 우둔하고 용렬한 사람이든 전부 평등하게 구제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듣고 청정지계한 이 가리지 않는다.’: 경장經藏 속에 깊이 들어간 사람이든 많이들은 사람이든, 혹은 지계가 청정한 사람이든 계를 받고 계를 범한 사람이든, 심지어 죄악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단지 마음만 돌린다면 전부 구제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마음 돌려 염불 많이 하면’: 단지 마음만 되돌려서 ― “제가 이전에 지은 죄악에는 본래 과보가 있는 것이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인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참회하고 그다음에 이 과보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직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여야 하므로 ‘마음 돌려回心’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 뒤로 염불을 많이 해야 하는데, 여기서 ‘많이’라는 것이 바로 ‘내지 십념’의 ‘내지’이므로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면 오직 칭명만 하라는 것입니다.

 

  ‘와륵을 금으로 변하게 한다.’: ‘와륵瓦礫’ 이란 사람들이 버린 벽돌과 돌덩이 등의 물건들을 말합니다. ‘와륵이 금으로 변한다.’는 것은 이른바 ‘쇠를 금으로 변화시킨다.’‘범부가 성인으로 바뀐다.’는 것으로, 당신이 마음을 돌려서 염불만 한다면 범부의 지위에서 벗어나 성인이 될 수 있고, 쇳덩어리를 황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반드시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본래 윤회하며 고통 받아야 할 생명이 현재 왕생하여 부처의 몸이 되므로, 범부의 지위를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 청정하고 오염되지 않은 열반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와륵과 황금은 천지 차이지만 마음만 돌려서 염불하면 쇳덩이도 황금으로 변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명호의 불가사의한 공덕입니다.

 

 

13.질문: 『관경』에서는 ‘마음이 부처를 짓으면 마음이 곧 부처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해석에는 이를 자성이 청정한 불성의 각도에서 해석하셨습니다. 스님께서 여기에 대해 법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자력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극락세계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여기지 않고, 또 아미타불을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로 여기지 않고서 이를 ‘자성미타, 유심정토’로 간주합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청정한 불심, 청정한 그 자리가 바로 아미타불의 본신이고, 청정할 때 보이는 일체에는 고통과 즐거움·좋고 나쁨·아름답고 추함 등의 상대적인 분별관념이 없으므로 그 자리에서 자신은 이미 정토 속에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자력법문을 닦는 사람들이 마음속의 불성을 미타로 여기고 마음속의 청정을 극락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를 지으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는 말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런 해석은 일종의 유식관으로서, ‘만법이 유식이요, 삼계가 유심이다萬法唯識,三界唯心’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만법유식이므로 설사 극락세계라 하더라도 설사 아미타불이라 하더라도 역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에 유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력의 법문에서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수행하여 성불해야 하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수행하여 최종적으로 불과를 증득해야 합니다. 그들이 일단 불과를 증득하게 된다면, 산하대지란 그들에게 있어서 정토가 아닌 곳이 없고 전부다 정토입니다. 왜냐하면 청정과 더러움을 모두 초월했기 때문에 어디에 무슨 정토니 예토니 하는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토종에서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시종 ‘지방입상指方立相’위에 세운 것이어서 극락세계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가 바로 방향이고, 아미타불은 형상이 있으며, 오직 서방의 아미타불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지방입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구경의 입장에서는 극락세계가 광대무변하고, 아미타불 역시 형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인의 경계여서 우리가 반드시 그러한 경계를 추구할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는 단지 방향이 있고 지방입상을 한 정토의 아미타불만 추구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저절로 자성미타와 유심정토를 증득할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마음이 부처를 짓으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는 말은 마음이 염불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짓다作’는 무엇을 짓습니까? 바로 염念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칭명염불을 하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마음이 염불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 ‘염’에는 믿음과 행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마음이 염불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절대 아미타불을 떠나서 따로 부처님을 찾고 부처님을 뵙기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다시 성도문의 자력의 범주에 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 부처를 지으면 마음이 바로 부처다.’가 곧 ‘마음이 염불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는 의미입니다.

 

 

14.질문: 스님께서 ‘실상신實相身’과 ‘위물신爲物身’에 대해 해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당신이 설사 ‘실상신’이 무엇인지, ‘위물신’이 무엇인지를 몰라도 당신이 아미타불의 구제만 믿는다면 이미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행주좌와에 시간의 오래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으며’ 염념마다 칭명을 한다면, 실상신과 위불신은 바로 그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해석하자면 ‘위물신’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몸이고, ‘실상신’은 성불하신 몸입니다. ‘실상신’은 아미타불께서 자리自利의 행을 원만히 하신 측면으로부터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자리를 통해 성불하였다면, 정각正覺을 취하신 것이고 실상신을 성취한 것이어서 반드시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따라서 동시에 ‘위물신’도 되겠지요.

 

  ‘실상신’은 자신의 자리自利를 원만히 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자리를 원만히 하신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아미타불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물신’은 ‘만약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이타행이 원만해진 각도에서 말한 것이지요. 그런 것입니다.

 

  ‘실상신’은 아미타불 자신으로부터 말한 것이므로 아미타불의 자리이고, ‘위물신’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므로 아미타불의 이타利他입니다.

 

  ‘실상신’과 ‘위물신’은 모두 아미타불, 다시 말해 보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모두 법장보살이 48대원을 세워서 48대원이 성취됨과 동시에 아미타불이 성취된 것이니까요. 따라서 ‘실상신’이 성취됨과 동시에 ‘위물신’도 이루게 된 것이므로 이를 보신이라 부르고 아미타불이라 부르며, 또 무애광여래라고도 부릅니다. 오직 ‘실상신’과 ‘위물신’을 성취해야만 비로소 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방제불과 같은 부처님이 되는 것은 그나마 쉬운 것이지만(물론 성불을 한다는 것은 모두 어려운 것이다. 다만 아미타불의 원력과 비교했을 때 전부 쉬운 것이다.) 실상신과 위물신인 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물신이 바로 중생을 구제하는 몸이어서 중생을 구제하는 몸, 다시 말해 시방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세계에 가서 성불하게 하는 몸, 이런 몸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성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방중생 가운데 한 중생이라도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줄 능력이 없다면, 그렇다면 아미타불은 아직은 성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시방삼세의 그 어떤 부처님이 되는 것은 모두 쉬운 일이지만 실상신·위물신을 성취하신 아미타불이 되는 것은 쉬운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물론, 시방제불들도 모두 중생구제하시길 발원하였지만 아미타불의 원력은 세간을 초월하는 발원이고 시방삼세의 제불을 초월하는 발원입니다. 다시 말해 ‘시방중생 가운데 어떤 중생은 다른 부처님께서도 구제할 수 있지만, 우리처럼 사바세계에서 윤회하는 중생들은 탐진치가 심해서 시방제불도 모두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오직 아미타불만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발원하였으며,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당신의 수행공덕으로 우리의 죄업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업을 갚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이야말로 실상신·위물신을 갖춘 부처님이시고, 오직 그 분에게만 시방중생을 구제하는 ‘세간을 초월하는 서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의 제불 가운데 아미타불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제될 기회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아미타불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윤회할 수밖에 없겠지요.

 

  실상신과 위물신에 대해 우리는 조금만 이해하는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실상을 체득하고 위물을 체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던 모르던 간에 당신이 이렇게만 한다면, 모르고 구하지 않는 가운데 공덕은 저절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중의 원리는 심오하다고 말하면 굉장히 심오하고 한없이 심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간단하고 쉽게 칭념할 수 있는 명호만 받아들이고서 칭명을 하셔야 합니다.

 

 

15.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서 칭명염불을 하고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다. 어떤 규정이 있습니까?

 

 

답: 왕생에 대해 의심이 없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대해 의심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여실하게 칭명하는 것이고, 의심이 없는 염불이 바로 여실한 수행입니다.

 

 

16.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생사의 정원과 번뇌의 숲에 들어가 신통놀이를 한다.’는 것은 왕생하고 나서 다시 돌아온 뒤의 일인가요?

 

답: 그것은 왕생한 뒤 원력의 배를 타고 다시 오고 나서의 일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정토법문은 대승의 법문이어서 왕생하여 성불한 뒤에 시방세계로 가서 중생구제를 하게 되는데, 시방세계로 가는 것을 ‘생사의 정원과 번뇌의 숲에 들어감’이라 말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일은 아닌 것이지요. 현재 우리는 단지 인연·본분·능력·근기에 따라서 ‘스스로 믿고 남도 믿도록 가르칠’뿐, 아직은 자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자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난 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제가 말씀드렸듯이 설법하여 중생제도를 못할까봐 걱정할 게 아니라 오직 왕생하지 못할까봐 걱정해야 하고, 왕생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게 아니라 당신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의심하는 것을 걱정해야 하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의심하는 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칭명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하고, 왕생하면 당연히 성불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성불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전부 반드시 성불하게 됩니다. 마치 강물이 이미 바다로 흘러든 이상, 바다와 같은 맛이 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겠지요. 모든 강물은 최후에 반드시 바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강물의 귀착점이 바로 바다이니까요! 지면위에 있는 물들은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러우며, 어떤 것은 신맛이 나고 어떤 것은 단맛이 나서 각각 다릅니다. 마치 우리 중생들의 근기와 선악의 정도·번뇌의 정도가 각각 다른 것과 같지만 일단 극락세계에 도착하면 전부다 같게 됩니다. 마음은 무량한 광명이고 수명은 무량한 수명이어서 저절로 얻어지게 되는데, 당신이 싫다고 해도 반드시 얻게 될 뿐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그 속에 있게 됩니다. 절대 “아! 내가 극락세계에 왕생한 이유는 단지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나 그 곳에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뿐이다. 나는 다른 세계에 가서 중생구제를 하지 않을 거고, 나에게는 그만한 능력도 없고 또 그런 의향도 없고……”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곳에 가면 당신은 저절로 그런 넓고 광대한 마음이 생길 것이고 또 그러한 힘이 생겨서 중생구제를 할 것인데, 그런 힘은 저절로 갖게 됩니다.

 

 

17.질문: 스님께서 ‘사게삼선四偈三選’에 대해 해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법연상인의 『선택집』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을 있습니다.

 

  속히 생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두 가지 수승한 법문가운데 잠시 성도문을 내려놓고 정토문을 선택하여 들어가야 한다.

  정토문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정잡이행 가운데 잠시 여러 가지 잡행을 버리고 응당 정행을 선택하여 들어가야 한다.

  정행을 닦고자 한다면, 정조이행 가운데 잠시 조업을 옆에다 내려놓고 마땅히 정정업을 선택하여 전념해야 한다.

  정정의 업이란 곧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므로,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하니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이 네 수의 게송은 『선택집』의 총결總結과도 같아서 『선택집』 각장의 함의가 모두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 게송:

 

  ‘속히 생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 속히 육도의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기를 발심하는 것으로서 세세생생 계속해서 죄업을 지어 피차 서로 원수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지요.

 

  ‘두 가지 수승한 법문 가운데’ : 그 사람이 육도의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반드시 불법에 의지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 가운데 이 세상 속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오직 불법만이 우리를 생사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에 달성하게 할 수 있고, 오직 불교만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인과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또한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인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내부에도 성도와 정토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수승한 법문 가운데 잠시 성도문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요.

 

  ‘잠시 성도문을 내려놓고’ : 성도문은 난행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문을 잠시 한쪽에 내려놓고 성도문을 닦지 말아야 합니다.

 

  ‘정토문을 선택하여 들어간다.’ : 정토문은 이행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난행도를 버리고 이행도로 들어가야 합니다.

 

  두 번째 게송:

 

  ‘정토문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정잡이행 가운데 잠시 여러 가지 잡행을 버리고 응당 정행을 선택하여 들어가야 한다.’ : 다시 말해서 현재 정토문 속으로 들어가 오로지 극락세계의 왕생만을 구하고 있으나 정토의 법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다섯 가지 정행이고, 하나는 다섯 가지 잡행입니다. 그러므로 갖가지 잡행(다섯 가지 잡행)을 버리고 ‘응당 정행을 선택하여 들어가야 한다.’, 다섯 가지 정행을 선택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다섯 가지 정행’이란 바로 독송정행·관찰정행·예배정행·칭념정행·공양찬탄정행입니다.

 

  첫째, 독송정행: 산만하게 아무런 목적 없이 각종 경론을 독송하는 게 아니라 오직 정토삼경을 독송하는 것을 독송정행이라 부릅니다. 정토삼경을 떠난다면 바로 독송잡행이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넓은 의미에서의 해석이 있으니, 정토종 조사들의 논서를 독송함으로써 정토삼경을 이해하는 것도 독송정행에 속하지요. 그리고 인과를 모른다면 인과에 관한 교리들을 보시고 기본적인 인과 관념을 구비하는 것, 이것도 독송정행으로 귀납할 수 있습니다.

 

  둘째, 관찰정행: 당신이 만약에 상상을 하신다면 극락세계만을 상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는 우리의 미래 귀착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극락세계의 수승한 장엄과 청정하고 안락함과 미묘하고 향기롭고 깨끗함에 대해 상상을 함으로써 흠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므로, 이것이 바로 관찰정행입니다.

 

  셋째, 예배정행: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을 제외한 다른 불보살님들은 우리가 예배를 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배정행입니다. 극락세계에 왕생을 하기 위해 만약에 다른 불보살님들도 전부 예배한다면 어찌 예배잡행이 아니겠습니까?

 

  넷째, 칭념정행: 극락세계의 왕생을 위하여 칭념하려면 ‘나무아미타불’만 칭념하고 다른 제불보살은 칭념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찬탄공양정행: 극락세계의 왕생을 위해 아미타불께만 찬탄공양하고 다른 제불보살들은 찬탄공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섯 가지 정행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잡행입니다. 따라서 잡행을 버리고 정행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시·인욕 등, 더 나아가서 부모님께 효순하고 형제들과 우애하는 것, 이런 것들은 도대체 정행일까요, 아니면 잡행일까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당연히 실천해야할 윤리를 돈독히 하고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좋은 일들이어서 무슨 잡행이니 잡행이 아니니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비록 그렇게 실천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착한 일의 공덕을 극락세계의 왕생에 회향하지 않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유루의 마음이고 집착이 있는 마음이어서 이런 것들은 모두 원만하지 않고 백분의 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 번째 게송:

 

  ‘정행을 닦고자 한다면 정조이업 가운데 잠시 조업을 옆에다 내려놓고 마땅히 정정업을 선택하여 전념해야 한다.’ : 그럼 이미 이 다섯 가지 정행 속으로 들어가 오로지 이 다섯 가지 정행을 닦고 있다지만, 다섯 가지 정행에도 네 가지는 도와주는 역할로서 인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가 가장 주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네 가지를 잠시 옆에다 내려놓고 오로지 그 가장 근본이고 가장 주요한 것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칭명입니다. 이 말의 뜻은 당신이 정토삼부경을 독송하는 목적이 독송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경전의 뜻을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므로, 이 경의 목적을 이해하셨다면 우리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럼 정토삼부경, 내지는 방금 말씀드린 『왕생론주』 등에서 모두 우리에게 아미타불의 원력에 기대어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실천하려면 평생을 다해서 칭명염불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정정업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다섯 가지 정행은 모두 정정업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정정업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점을 아신다면 네 가지 조업은 정정업 속에 융화될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예전에 시간이 나면 바로 독경을 하였지만 이제 경전의 뜻을 알고 보니 그 목적은 우리에게 염불을 하라는데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 염불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관찰정행에서 극락세계의 장엄을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예배정행에서 아미타불께 예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여서 전부 칭명가운데 융화되어 칭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찬탄공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칭명이 가장 쉬워서 하루 24시 중에 모두 칭명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이 어디를 가든 간에 전부 칭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공양을 하려면 법당 안에서만 할 수 있고, 예배를 하려면 불상이 계신 곳에서만 할 수 있는데, 불상이 없다면 어떻게 공양하고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칭명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상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전부 염불할 수 있기 때문에 칭명의 정정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게송:

 

  ‘정정의 업이란 곧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므로,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하니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 게다가 이 칭명정정업이 바로 아미타불의 본원에 순응하는 것이고, 기타의 것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이 아닙니다. 선도대사께서 설하시길,

 

  “크신 서원이신 사십팔원에

  오직 염불만이 가장 가깝다.”고 하셨지요.

 

  아미타불께서 널리 48대원을 세우셨으나 그 중에서 오직 제18원의 칭명염불만이 가장 근본이고, 또 아미타불과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가깝다.’고 설한 것입니다. 또 설하시길,

 

  “오직 염불하는 자만이 광명의 섭취를 받나니

  마땅히 본원이 가장 강함을 알라.” 고 하셨습니다.

 

  오직 칭명염불을 해야 만이 아미타불의 광명의 보호와 섭취를 받게 된다는 것인데,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것이 당신의 본원(제18원――염불왕생원)이어서 일체 인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우리를 가장 잘 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연强緣이기 때문에 ‘마땅히 본원이 가장 감함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염불왕생’이 48원 가운데 제18원이기 때문에 제18원이 바로 ‘본원’이고 바로 ‘칭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도대사의 말씀에 의하면 오직 제18원의 칭명염불만이 광명의 비춤과 섭취와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명호가 바로 광명이어서 명호는 광명을 떠날 수 없고 광명 역시 명호를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과 입으로 이 한 구절 명호를 칭념하면 우리의 마음과 입이 아미타불의 명호와 하나가 되어 바로 아미타불의 광명 속에 있게 됩니다.

 

  선도대사님께서 또 말씀하셨지요.

 

  “중생이 행을 일으켜서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부처님은 바로 이를 들으시고,

  몸으로 자주 부처님께 예배하면 부처님은 바로 이를 보시며,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은 바로 이를 아신다.

  중생이 부처님을 억념한다면 부처님 역시 중생을 억념하므로

  피차의 삼업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과 아미타불의 삼업이 함께 있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미타불과 친근하게 지내야 할까요, 아니면 소원하게 지내야 할까요? 당연히 아미타불과 친근하게 지내야 하겠지요. 아미타불과 친근하게 지내면 현재 이미 왕생의 신분을 구족하게 되고, 아미타불과 소원하다면 계속해서 윤회를 해야 합니다.

 

  이 네 수의 게송에서 주로 강조하신 것은 우리가 칭명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아미타불의 인중의 서원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삼중의 폐립 三重廢立’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외의 폐립 內外廢立’입니다. 이른바 ‘내’는 불교이고, ‘외’는 외도입니다. 우리가 생사로부터 벗어나려면 외도수행을 버리고 불교수행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내외의 폐립’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와 정토의 폐립 聖淨廢立’입니다. 비록 불교수행을 선택하였으나 불교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이 있고, 간략히 말해도 팔대종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타 수행법문들을 버리고 정토법문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정의 폐립’입니다.

 

  세 번째는 ‘정행과 잡행의 폐립 正雜廢立’인데, ‘믿음과 의심의 폐립 信疑廢立’이라고도 부릅니다. 정토법문 내에도 기타 잡행을 하는 게 있고, 오로지 명호를 부르는 것도 있으므로, 우리는 기타의 잡행을 버리고 오로지 명호를 부르는데 들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정행과 잡행의 폐립’이라 말할 수도 있고 ‘믿음과 의심의 폐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8.질문: 어떤 사람들은 『관경』에서 설하신 ‘세 가지 마음만 일으키면 바로 왕생한다.’는 말씀에 대해 이것은 발원만 있고 행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시는데, 스님께서 법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리가 칭념하는 육자명호 속에는 신·원·행이 전부 다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방금 질문하신 ‘오직 발원만 있고 행은 없다.’는 것은 당나라 이전에 『섭대승론』을 배우던 학자들이 『섭대승론』의 관점으로 『관경』을 해석하신 것인데, 선도대사께서 이러한 잘못된 관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사첩소』의 첫 번째 「현의분」속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셨지요. 여기서 주요한 설명은 이 육자명호에 대한 해설이셨습니다. 대사님이 해설하신 이 육자명호에는 신·원·행이 구족되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 ‘나무’가 바로 귀명인데, 귀명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미타불의 칙명에 귀순하고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기에 ‘나무’가 바로 믿고 따름이요, 바로 귀명입니다. 동시에 발원회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과 ‘발원’은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 ‘아미타불’이라는 네 글자가 바로 귀명을 하는 자들의 행이고, 귀명을 하는 자들의 공덕입니다. 이 말의 뜻은 아미타불께서 발원하고 수행하시어 이 공덕을 전부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 속에 넣어서 우리 중생들이 ‘나무’를 하는 마음을 낼 수 있도록 하신 것이고, 일단 ‘나무’하는 마음을 내었다면 아미타불본신이 당신의 공덕을 이러한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공덕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전부 ‘아미타불’ 넉자 속에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나무’하는 중생은 자연히 ‘아미타불’속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신·원·행은 전부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발원이 있고 행도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원·행이 하나도 빠지지 않았기에 반드시 왕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내지 십념’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자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육자홍명에 의지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 여섯 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마음이 가는 데로 어떤 물건의 이름을 불러서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왕생할 수 없습니다.

 

 

19.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고덕의 말씀에 제18원은 왕본원이고, 19원과 20원은 방편원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 19원·20원과 제18원이 어떤 관계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아미타불의 근본원이 바로 제18원으로, 제18원의 대상인 시방중생을 평등하게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방중생에게는 시방의 근성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비록 제18원을 들었다하더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고, 또 어떤 중생들은 아예 제18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중생들도 역시 구제해야 하는데,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그 방법이 바로 제19원과 20원에 있습니다.

 

  제19원은 삼배구품에 속하는 것으로, 삼배구품과 수행방법은 각자 다릅니다.

 

  이는 제18원을 모르기 때문인데, 만약에 제18원을 알았다면 그 사람은 삼배구품의 신분이 아니고, 또 여러 가지 법문을 수행하겠다는 그런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 모두 제18원의 ‘내지 십념’의 염불로 들어오게 됩니다.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출가의 신분에 집착하지 않고, 재가자일지라도 재가의 신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전부 제18원의 ‘시방중생’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러 가지 품위와 계급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컨대 ‘상배’의 사람은 출가하여 발보리심을 하였고, ‘중배’의 사람은 출가를 못했지만 발보리심을 할 수 있고 갖가지 착한 일의 공덕을 닦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출가도 못하고 근기 역시 하열하며, 게다가 또 매우 가난하여 갖가지 행을 닦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착한 일의 공덕도 지을 수 없으니, 이런 사람이 바로 ‘하배’입니다.

 

  ‘삼배구품’은 자신이 닦은 각자 다른 법문의 공덕을 회향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것으로서 역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여전히 이런 중생들도 구제하십니다만 제18원에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제18원은 선천적으로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열반의 명호가 있는 발원이기 때문에 오직 이 원만이 열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19원으로서는 당연히 그러한 과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태생이지 화생이 아닙니다. 따라서 삼배구품의 차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18원과 19원은 ‘당생원當生願’에 속하여 금생에 극락세계에 왕생합니다.

 

  20원은 ‘결연원結緣願’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염불도 하고 극락도 그리워하지만(이른바 ‘나의 명호를 듣고 나의 나라를 끊임없이 생각하여’), 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아 금생에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미타불과 인연을 맺었기에(이른바 ‘여러 가지 공덕을 근본을 심고’―― 이미 종자를 심었기에 미래의 결과를 기다림) 아미타불께서는 이러한 기연으로써 그 사람이 미래세에 반드시 왕생하도록 해줍니다.(이른바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지만, 이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않겠다.) 따라서 20원을 ‘계념정생원繫念定生願’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삼생과수원三生果遂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고덕이 이 원을 비유하며 말씀하시기를, ‘마치 바늘을 삼킨 물고기가 물에서 오래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20.질문: 많은 불자들이 인과응보의 문제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 그들의 인과응보에 대한 상황은 어떠한가요?

 

답: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곧 ‘기에 대한 깊은 믿음機深信’과 ‘법에 대한 깊은 믿음法深信’을 구족한 사람입니다.

 

  ‘기에 대한 깊은 믿음’을 구족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은 죄악이 두터운 생사범부로서 자신의 수행으로 자신의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없고, 자신이 빚진 채무를 다 갚지 못한다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기에 대한 깊은 믿음’이라 부릅니다.

 

  ‘법에 대한 깊은 믿음’이란 바로 우리와 같이 죄악이 두터운 중생들이 칭명만 하면 반드시 왕생하므로, 지금 당장 아미타불의 조건 없는 구제에 대해 듣고서 믿는다면 지금 당장에 왕생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법에 대한 깊은 믿음’이라 부르는데, 선도대사께서는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한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결정된 깊은 믿음이 있는 사람의 인과는 어떨까요?

 

  불법은 인과의 기초위에서 세운 것이어서 어떠한 법문이라도 전부 인과를 위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력법문(즉 성도문)은 ‘자인자과自因自果’입니다. 즉 자신이 지은 것은 자신이 받는다는 것으로서 자신이 착한 원인을 지으면 자신이 즐거운 과보를 받게 되고, 자신이 악한 원인을 지으면 자신이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것을 ‘자인자과, 자작자수自因自果,自作自受’라 부릅니다. 선에는 선한 과보가 있고 악에는 악한 과보가 있어서 반드시 자신이 받아야 합니다.

 

  정토타력법문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자작타수自作他受’입니다. 우리가 다겁생래에 자신이 진 살인의 빚·투도의 빚·사음의 빚·망어·악어의 빚·오역과 십악 등의 온갖 빚을 우리는 다 갚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줄곧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겁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들을 가엾이 여겨 우리를 위해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공덕을 쌓으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빚을 갚아주시기 때문에 ‘자작타수’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죄업의 과보를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위해 받아주시고 우리를 위해 갚아주시며, 아미타불자신이 지은 공덕을 우리가 함께 나누고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량수경』에서

 

  “중생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짊어져 주신다.”고 설하신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의 무거운 짐을 당신의 무거운 짐처럼 짊어져 주십니다. 당신이 부담해주시고 갚아주시기 때문에 “중생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짊어져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또 말씀하시기를,

 

  “중생을 위해 법의 창고를 열어

  널리 공덕의 보배를 베푸신다.고 하셨지요.

 

시방중생들을 위해 육도를 벗어나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는 ‘법의 창고法藏’, 다시 말해 육자명호를 완성해 주셨기 때문에 ‘중생을 위해 법의 창고를 열어서’ 널리 이 육자명호의 공덕의 보배를 베풀어 주시고, 또,

 

  “항상 대중들 속에서 사자후로 설법하신다.”

 

고 설하셨으니, 늘 시방세계 가운데서 이 육자명호의 구제법문을 선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자작타수’입니다.

 

  우리의 정토법문 역시 인과 속에 있습니다.

 

  그럼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해서 득의양양하여 남들에게 교만해도 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부터 인과응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악을 버리고 선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만 악을 버릴 힘이 없고 선을 실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과의 관념이 있고 선악의 관념이 있는 이상,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포용하고 용서해주셔서 우리가 큰 포용과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설사 다른 사람들을 크게 포용하고 크게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려 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용서받지 못하고 포용 받지 못하며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아미타불께서 뜻밖에 우리를 포용하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많든 적든 간에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용서하려 할 겁니다.

 

  게다가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 생명은 단지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생명만이 아니라 무량수의 생명이어서 아미타불과 똑같은 무량수·무량광을 구족하고 지혜가 똑같이 고명하며 신통은 똑같이 통달하고 원력은 똑같이 무량무변하기 때문에 단지 금생의 생명만 얻는 게 아니라 풍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아미타불께서 극락세계를 공짜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료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럼 우리도 이러한 훈습을 받아서 남들에게 보시하게 됩니다. 남들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가서 그들을 위해 설법을 해주는데, 마치 아미타불께서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의 기원과 부탁·요구 등을 거치지 않으셨으니, 이는 완전히 아미타불의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의 자비심을 받아들인다면 아미타불의 자비심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훈습되고 발효될 터인데, 우리가 어떻게 도리어 남들에게 교만하고 상대방을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도리어 인색하고 함부로 나쁜 짓을 저지르며 자신의 습성을 방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부처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해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해탈할 능력이 없음을 가엾이 여겨서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우리가 부지런히 계선戒善을 지키고 세간에서 윤리를 돈독히 하고 직분을 다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불법 가운데서 불교의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아끼는 것처럼 자녀들이 현명하고 재능이 있든 아니면 어리석고 비열하든 간에 부모의 자비심은 모두 평등하게 그들을 아낄 것입니다. 설사 아들이 밖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심지어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죄를 저질렀다하더라도 부모가 만약에 부유하고 또 지위가 있으시다면, 부모는 자신의 재물과 지위를 이용하여 이처럼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죄를 해결해 주실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그가 또 “내가 설사 하늘에 닿을 만큼의 큰 죄를 지어도 여전히 무사하니 내가 마음대로 다시 저질러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부모로써 당연히 이 아들에 대해 뼈와 살처럼 아끼겠지만 그래도 부모의 마음속에는 그가 정정당당하게 사회에 발붙이고 공무를 중히 여기고 법을 지키는 도덕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겁니다. 아들이 만약에 부모에게 효경을 한다면 부모의 뜻에 순종하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이점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절대 “나는 얻었지만 당신들은 전부 얻지 못했어!”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에게 교만하고, 또 자신의 악질적인 근성을 본래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여 도리어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심지어 더욱 크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방종하여 악업을 짓는다면 기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정토법문은 본래부터 죄악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어서 선악의 과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악에 대해 삼갈 것입니다.

 

 

21.질문: 많은 사람들이 회향과 발원 이 두 문제에 대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데 스님께서 법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정토법문에서는 우리가 아미타불께 회향해드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회향해 주시는 겁니다. 아미타불께서 당신의 진실한 공덕을 우리에게 회향해 주셔서 우리가 사바세계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고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진실――성불을 얻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는 아미타불께서 당신의 공덕을 우리에게 회향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공덕을 아미타불께 회향해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진실한 공덕이 없기 때문인데, 우리가 닦을 수 있는 공덕은 모두 유루이고 독이 섞인 선이며 거짓되고 부실한 행이어서 아미타불의 열반의 진실한 경계와 상응하지 않아 회향할 공덕이 없습니다. 따라서 회향할 수도 없고 회향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공덕을 닦아낼 수 없기 때문에 회향할 수가 없고, 동시에 아미타불의 진실한 공덕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회향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로 회향할 필요도 없고 또 특별히 회향할 필요도 없겠지요 ――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이상, 당연히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역시 일종의 발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이미 이러한 의미를 갖췄기 때문에 매일 반복해서 발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조석으로 기도를 할 때 맨 마지막에 이어서 ‘발원문’을 한 번 읽는데, 이 ‘발원문’이 바로 『회향게』입니다. 우리가 출판한 모든 책의 뒷면에 전부 선도대사님이 지으신 『회향게』가 있는데, 이 『회향게』는 일반적인 회향발원과는 다릅니다. 이 『회향게』는 이렇습니다.

 

  원컨대 이 공덕으로 평등하게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나니, 願以此功德,平等施一切

  다함께 보리심을 내어 안락국에 왕생할지어다. 同發菩提心,往生安樂國。

 

  이 『회향게』는 완전히 아미타불의 회향입니다.

 

  ‘원컨대 이 공덕으로’ : 이는 아미타불의 자비원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쌓으신 공덕으로,

 

  ‘평등하게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나니’ : 평등하게 시방의 일체 중생에게 보시합니다.

 

  ‘다함께 보리심을 내어’ : ‘보리심’이 바로 성불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왕생만 하면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정토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이 곧 정토법문의 보리심이 되는 것이지요. 정토법문에서는 따로 보리심을 낼 필요 없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마음을 돌려 왕생발원만 한다면, 이런 마음이 바로 우리의 보리심입니다.

 

  ‘안락국에 왕생할지어다.’ :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극락세계는 안온하고 즐겁고 육도윤회가 없으며, ‘모든 괴로움이 없고 온갖 즐거움만 누리는’ 국토이기 때문에 ‘안락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조석기도의 끝부분에 이 게송만 읽으시고 기타 특별히 읽어야할 회향문이 없고 따로 왕생발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미타불의 자비를 받아들인 이상, 항상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 내가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아직 초보단계에 있어서 아직 아미타불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미타불의 자비를 받아들였다는 게 바로 근기를 믿고信機 법을 믿는 것信法입니다.

 

  기를 믿고 법을 믿는다는 이런 믿음은 아주 심각한 믿음이어서 ‘깊은 믿음’이라고 부르는데, 깊은 믿음이 바로 결정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께서 ‘첫째 결정코 깊이 믿음’ ‘둘째 결정코 깊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믿음은 깊은 믿음이고, 또한 결정된 믿음입니다. 이미 결정된 이상, 영원히 결정된 것이지요. 근기의 측면에서 이미 자신은 죄악생사범부여서 벗어날 기연이 없다는 것을 결정코 깊이 믿기 때문에 ‘의심과 걱정 없이 저 원력을 타고 반드시 왕생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신·원·행이 이미 전부 구족된 것이지요.

 

  당신이 시시각각 칭명을 한다면 염념 가운데 모두 발원하는 것이고 모두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구절의 명호마다 전부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회향해 주시는 공덕이 흘러나오는 것이고, 우리에게 당신의 구제를 받아달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한 전부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에 수순하고 믿고 따르고 당신의 공덕을 받아들이며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따라서 명호를 한 번 한번 부를 때마다 모두 이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념이 상응하면 일념이 부처요, 염념이 상응하면 염념이 부처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호법신장님들께 회향하고 또 무엇 무엇에 회향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염념마다 칭명을 하는 가운데 따로 기원하지 않고 또 무엇을 기원해야 할지를 모르더라도 자연히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향할 필요 없이 호법신장들이 저절로 오셔서 우리의 법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자연히 ‘위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삼악도의 고통을 제도’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모의 은혜·스승의 은혜·국가의 은혜·중생의 은혜, 이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려면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한다면 당신이 모르고 또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조상을 천도시키고 자손들을 보우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비록 보답을 하느냐 보답을 하지 않느냐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도 불력이 있는 까닭에 자연히 보답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22.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염불에 사자염불과 육자염불이 있는데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염불해야 합니까?

 

답: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두 자, 혹은 넉 자 혹은 여섯 자를 부르더라도 모두 아미타불의 구제에서 벗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자가 많고 적고를 가지고 따져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아미타불 본신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두 자도 당신의 본신이고 넉 자도 당신의 본신이며 여섯 자도 당신의 본신이어서 전부 서로서로 융통되고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칭념을 한다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로 칭념하는 게 비교적 완전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제18원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제18원에서 설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과 발원이고 바로 ‘나무’입니다. ‘내지 십념’, 이것이 바로 넉 자이고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제18원자체가 바로 신·원·행이고 바로 ‘나무’이며,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나무’는 우리 중생을 가리키고 ‘아미타불’은 구제자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제18원 속에 ‘시방중생들이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나무’하는 시방중생들이 이미 성불하신 ‘아미타불’과 제18원에서 하나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자명호를 부르는 게 제18원에 부합하는 것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나아가 선도대사께서도 해석하시길, ‘나무’가 바로 믿음과 발원이고, ‘아미타불’이 바로 믿고 발원한 자의 공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육자명호를 칭념해야 합니다.

 

  만약에 육자명호를 어떤 상황 속에서 완전하게 칭념할 수 없더라도 당연히 아미타불의 제18원에서 벗어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 융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상황 속에서 칭명을 하고 싶지만 육자명호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비교적 불편하다면, 그렇다면 넉 자를 부르든 두 자를 부르든 똑같습니다. 심지어 칭명을 하지 않고 그 때의 그런 심리상태만으로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섭취하시는 광명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작선사의 『안락집』에서는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임종을 하는 사람이 임종 시에 염불을 할 수 없어도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다는 것만 안다면 이런 중생들도 똑같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임종 시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 ‘나’만 부르고 뒤의 글자를 아직 부르기도 전에 왕생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임종 시에 위급할 때 ‘아미타불’을 부르는데, ‘아’하는 소리만 나오고 뒤의 세 글자를 부르기도 전에 즉각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자든 넉 자든 모두 아미타불의 본신이어서 당신이 아직 부르기도 전에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입으로 비록 말을 하지 않았어도 부처님은 이미 아신다.’고 했듯이 우리가 아직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위해 다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을 때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대만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든가 아니면 전화를 걸 때 흔히 모두 넉 자(아미타불)를 부릅니다. 대만에서 인사를 한다든가 전회를 할 때 모두 넉 자를 부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어서 저도 일반인들의 이러한 습관에 따라 넉 자로 부릅니다. 그러나 제가 혼자서 염불할 때는 정좌를 하던 길을 걷든 모두 육자로 염불합니다.

 

  다만 ‘미타’본신은 두 자가 바로 여섯 자이고, 넉 자도 역시 여섯 자여서 두 자든 넉 자든 전부 아미타불의 본신이므로, 불가사의함이 바로 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한 예로 옛날에 법려법사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은 매우 가난해서 토굴을 지으려는데 띠풀이 부족하여 산위에 사는 아무개에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 사람에게 화주를 하여 소달구지 하나에 실을 만한 띠풀을 얻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너무 피곤하여 그 자리에 누워서 잠이 들었지요. 이때 마침 인근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게다가 달구지가 바로 바람이 부는 방향에 있어서 불이 이미 가까이까지 타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깨어났을 때 이미 늦었지만 평소에 관세음보살을 불렀기 때문에 서둘러 관세음보살을 불렀는데, ‘관’자가 입에서 나오자마자 불이 꺼졌습니다.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불의 자비의 화현임을 알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존재이유는 중생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제해 주시기 위함이지만, 절대적으로 고난에서 구제할 수 있는 게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의 존재이유는 방편으로 우리를 접인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게 함으로써 아미타불께서 구제하시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관세음보살께서 세세생생 우리를 위해 구원의 소리를 들으시고 고통에서 구제해 주셔야 하는데, 그것은 철저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불의 자비의 화현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감응에 대해 이해하였다면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던 것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23.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우리가 현재 이미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았다면, 그럼 우리는 현재 도대체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답: 우리는 현재 아직 범부입니다. 다만 범부이면서 보살의 자격을 갖추었기에 고덕이 ‘범부보살격凡夫菩薩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였으나 아직은 탐·진·치와 같은 번뇌와 습기들이 남아있고, 심지어 아직 사리사욕을 챙기는 비열한 생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중생일지라도 육도에서 윤회하는 중생이 아니라 이미 극락세계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정취正定聚’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 ‘취’가 바로 극락의 성중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반드시 성중 속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정정취에 든다.’고 말한 것이고, 극락의 성중은 반드시 성불하게 되므로 정정취 역시 반드시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을 정정취의 중생이라 부르기 때문에 격위格位의 측면에서 우리는 더 이상 범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육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루가 바로 범부가 존재하는 하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게 “나는 보살이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범부이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범부이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 이때에 어떡해야 할까요? 역시 염불해야 합니다. 이른바 ‘염념마다 칭명하여 항상 참회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적을 때 전부 ‘항상 참회함’·‘항상 부끄러운 아무개’, 또는 ‘부끄러운 아무개’라고 적으시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사실상 부끄러움조차 없습니다. ‘항상 부끄러운’이라 불릴 수 있는 분은, 인광대사님이라면 자격이 됩니다. 인광대사님은 조사의 근성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근성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범부로써 성인을 자처하게 되고 함부로 범부를 성인이라 부르게 되니까요.

 

24.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현재는 아직 범부의 몸이지만 나중에 왕생하면 범성동거토에 왕생합니까, 아니면 부처님이 계시는 상적광토에 왕생합니까?

 

답: 선도대사께서는 보토라고 말씀하셨는데, 극락세계는 보토입니다.

 

  그리고 범성동거토·방편유여토·실보장엄토·상적광토에 관해서는 그건 정토종의 판석이 아니라 천태교에 의해 극락세계를 판별한 것으로, 이런 판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그런 국토가 아니라 보토입니다. 이른바 보토란 바로 아미타불께서 발원하고 수행해서 성취한 국토를 보토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곳에 가면 전부 아미타불과 같은 과보를 얻게 되어, 아미타불의 과보가 무량수면 우리도 무량수고, 아미타불의 과보가 무량광이면 우리도 무량광이며, 아미타불의 과보가 32상이면 우리도 32상이여서 모두 아미타불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토입니다. 그러므로 정토법문은 간단하면서도 공덕은 수승합니다.

 

  따라서 이 법문을 만난 것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물론 다행스럽다고 강조할 필요는 없겠지만 진정으로 안다면 자연히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다.)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 법문은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힘, 자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미타불의 자비에 대해 듣고 나서 그 자비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우리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위에 떠있는 밝은 달이 연못 속에 비쳐지는 것과 같아서 이 연못을 가지고 당신은 연못이 밝은 달을 끌어들였다고 말할 건가요, 아니면 밝은 달이 스스로 연못에 들어왔다고 말할 건가요?

 

  물론, 연못이 없었다면 달의 그림자도 없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우리의 이 심성이 없었다면 아미타불의 자비도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신심의 근원은 분명히 바깥에서 들어온 것으로, 그게 바로 아미타불의 본신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십겁 동안에 끊임없이 운용하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시방제불로 하여금 모두 명호를 칭찬하도록 하신 게 바로 우리들의 온갖 의심을 깨트려서 이 공덕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자비가 우리들의 마음을 건드려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신심이 되도록 하신 것이고, 믿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신 것이지요.

 

25.질문: 스님께 여쭙겠습니다. 『관경』에서 하품하생의 ‘십념왕생’은 산선散善에 속하는 염불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바로 열반을 증득하게 됩니까, 아니면 드러난 의미대로 연꽃의 포태胞胎 속에 있게 됩니까?

 

답: ‘하품하생’으로 왕생한 자는 연꽃 속에서 12대겁을 지내야 할까요, 아니면 곧바로 꽃이 피어 부처님의 친견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할까요? 여기에는 드러난 뜻과 은밀한 뜻이 있습니다.

 

  드러난 뜻으로는 연꽃 속에서 12대겁을 지내야 하는 거고, 은밀한 뜻으로는 꽃이 피어 부처님의 뵙고 무생법인을 깨닫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거죠. 그런데 여기서 왜 12대겁이라고 설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사람이기 때문인데, 만약에 그가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짓지 않았다면 12대겁 동안 연꽃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이 단락의 말씀을 가지고 제18원의 ‘오직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는 말씀을 증명해보겠습니다. 왜 ‘오직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오역과 정법을 비방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직 제외한다唯除’는 두 글자를 덧붙인 것인데, 만약에 그가 오역과 정법을 비방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오직 제외한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 겁니다.

 

  시방중생은 어떠한 근기들입니까? 오역과 정법을 비방한 죄를 지은 사람도 포함될까요? 시방중생자체에 오역과 정법비방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로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극락세계가 바로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사람들도 그곳에서 모두 성불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12대겁과 오직 오역과 정법비방은 제외한다는 말은 은밀한 뜻의 측면에서는 똑같습니다. 그건 무슨 함의일까요? 여기에 세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가 무겁기 때문에 당신에게 ‘오직 제외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12대겁’이란 우리에게 이런 죄업은 너무나 무거워서 절대 저지르면 안 된다고 매섭게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죄를 저지를 수가 있는데, 만약에 저질렀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맨 마지막에 설사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돌려 염불만 하면 역시 왕생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마치 하품하생의 중생들도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것처럼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만 하면 육도윤회는 바로 끊어지게 됩니다.

 

  비록 하품하생에서 오역만 설하고 정법비방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지만 오역 속에는 정법비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역 중에 아라한을 죽이고 승단의 화합을 깨트리며 부처님 몸에 피가 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게 바로 정법비방입니다. 만약에 정법비방이 아니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니까요. 따라서 또 다른 함의가 바로 이런 중생들도 역시 구제한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함의는 이런 것입니다. 시방중생들의 본성은 어떤 중생들입니까? 바로 오역과 정법비방의 근성으로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을 수 있는 중생들입니다. 그래서 이 오역과 정법비방으로써 시방중생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의심하며 말합니다. “오직 조사대덕만이 왕생할 수 있고, 오직 보살만이 왕생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왕생할 수 없을 거라는 열등감을 갖게 되겠지요. 어떡해야 할까요?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바로 우리와 같은 오역과 정법비방의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중생들을 구제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방중생이 어떤 중생인지 더욱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맨 마지막에 ‘오직 오역과 정법비방은 제외한다.’는 말씀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총괄하여 말씀드린다면, 이 ‘오역과 정법비방’은 우리에게 모든 중생들을 전부 구제할 것이며 구제의 범위 내에 없는 중생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드러난 뜻으로는 12대겁이 있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보토의 측면에서는 12대겁이 없는 것이지요. 도대체 12대겁이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이 문제는 극락세계에 직접 가봐야만 알 수 있을 뿐, 우리가 여기서는 알 수 없습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12대겁이란 없는 거지만, 만약에 12대겁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에게 12대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극락세계만 가면 묻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요.

 

계속...

 

출처/순정시대 (純淨時代) http://cafe.daum.net/sunsujeong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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