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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혜정법사의 『선택집(選擇集)』 편서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5.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0

 

                                『선택집(選擇集)』편서

                                                      석혜정 편서(編序)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약칭『선택집(選擇集)』이라고도 하는데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의 제83권에 실려 있다. 작자는 800년 전 일본의 고승이자 정토종의 개조이신「법연상인(法然上人:호넨상인)」(1133~1212)이다.  

 

  법연상인 이전의 일본불교는 비록 대소승의 각 종파가 있었으나 유일하게 정토종만 없었다. 따라서 정토문淨土門의 교단이 없을 뿐더러 정토문에서 정식으로 의지하는 소의경전과 교상敎相상의 이론체계가 구축되지 않았으므로, 왕생의 행체行體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비록 당시에도 서방정토 왕생을 발원한 행자들이 어느 시대건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 각 종파의 교리에 의탁하여 잡행잡수雜行雜修를 하면서 회향을 하였으니, 이른바 「종속적인 종파(寓宗)」이라 불리게 되었고, 게다가 각 종파의 교리로써 아미타의 정토를 판별하였으므로 정토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및 왕생의 정인正因은 각 종파의 종의宗義에 따라 변하게 되었다.  

 

  예컨대 천태종은 사토四土로써 아미타불의 정토를 판정하였는데, 범부가 왕생하는 곳은 가장 낮은 범성동거凡聖同居土라고 판정하였고, 또한 법상종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를 비록 높고 미묘하다고 판정하였으나 범부는 왕생할 수 없다고 여기었다. 이처럼 그릇된 해석은 아미타불의 본의가 아니므로, 선도대사께서는 이를 일러 ‘스스로를 잃고 남을 그릇되게 하여 해악이 적지 않다(自失誤他,爲害不淺)’고 말씀하셨다.  

 

  법연상인은 이 점을 고려하여 의연히 각 종파 외에 따로 정토의 종파를 개설하시고, 아울러 이『선택본원염불집』을 저술하시어 개종입교開宗立敎의 「근본교전本典」으로 삼으셨으니, 이때에 이르러서야 아미타불의 본원의 의취意趣와 왕생의 행체行體가 남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신란상인(親鸞上人)은 이 책을 정대頂戴하고 경앙敬仰하며 “진종(眞宗)의 핵심 요지와 염불의 깊은 뜻이 이 속에 다 들어있어 보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참으로 희유하고 가장 훌륭한 한문이며 더없이 깊은 보전이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무릇 정토문에 들어가고자 하는 행자는 마음을 비우고 이 책을 자세히 읽고 깊이 연구하길 바란다.

 

  겨우 두세 번을 읽는 것으로는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모름지기 여러 번을 읽다보면 반드시 깊은 믿음이 생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선도대사의 해석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5부9권의 저서는 의리義理가 방대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이 그 방침方針을 알기 어렵다. 이『선택집』은 선도대사가 저술한 5부9권의 천리내용千里來龍이 여기서 혈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5부9권의 진수眞髓가 모두 이『선택집』에 있음으로,『선택집』을 자세히 읽다보면 5부9권의 종지宗旨를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비상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비상한 일이 있다고 했다. 법연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으로 그 생전과 멸후에 영묘한 감응과 기이한 서상이 특별히 많아, 여기서 몇 가지만『선택집』앞에 적어 독자의 경신敬信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상인의 아버지 성씨는 우루마(漆間)이고 이름은 도키쿠니(時國)이었으며, 조정의 명을 받들어 촌락 하나를 관리하며 다스렸고, 어머니는 하타우지(秦氏)였다. 부모가 일찍이 나이가 마흔 살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시면서 부부가 목욕한 후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하였는데, 7일 밤낮으로 염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7일째 되던 밤에, 비몽사몽간에 한 노승이 면도칼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그녀에게 삼키도록 하였는데 그로부터 임신을 하였다. 도키쿠니는 틀림없이 아들을 낳을 거라고 하시면서 장차 출가하여 당대의 종사宗師가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그 뒤로 어머니 하타우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늘 부드럽고 착했으며, 몸에는 괴로움과 아픔이 없었고 삼보에 깊이 귀의하여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상인이 태어날 때, 두 폭의 백번白幡이 하늘에서 내려와 뜰 앞의 푸조 나무에 걸리고, 방울소리가 허공에 울렸으며, 눈부신 광채가 났다. 그래서 이 나무를「양번푸조(兩幡椋)」라 이름지었다.  

 

  상인의 머리 정수리 쪽에 우묵 들어간 곳에는 이랑이 있었고, 눈은 겹눈동자이었며 누렇고 빛이 났다. 유년시절에 툭하면 서쪽을 향해 우러러 공경하였고, 또한 스스로 「세지勢至」라 불렀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위해「세이시마루勢至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네 다섯 살 이후의 식견은 성인과 같았다. 아홉 살 때 부친이 적에게 살해당했는데, 임종 전에 「세이시마루」에게 분부하여 말하였다.

 

  “이는 나의 숙업宿業이니, 절대로 적에게 원한을 품지 말라. 원한으로써 원한을 그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복심을 품고 있으면 세세생생 태어나는 곳마다 서로 싸우고 죽여 끝없는 윤회를 초래할 뿐이다. 내가 나의 고통에 아파하듯이 다른 사람도 그들의 고통에 아파하고, 내가 나의 목숨을 아끼듯이 다른 사람도 그들의 목숨을 아낀다. 사람마다 다 한 마음이니,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면 다른 사람도 알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히 생명을 죽이게 되고 다음 생에 또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 금생의 망연妄緣을 단절하고 저 원수怨敵를 잊기 바란다. 만약 원수를 잊지 못한다면 어느 생에 생사의 굴레를 끊을 수 있겠는가. 네가 성인이 되면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나와 남의 평등한 이익을 생각하거라” 유언을 다 분부한 후에 그는 곧 서방을 향해 고성으로 염불하며 잠자듯이 숨을 거두었다.  

 

  상인은 보살의 방편화현權化이시니,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 역시 교화하고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세상은 무상無常하고 인생은 고苦라는 것이다. 또한 소년이 곧바로 도를 향한 뜻을 일으키고, 세간의 명리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으니, 역시 자비로운 아버님의 최후 유언을 잊지 않은 것이었다.  

 

  삼계三界를 유전하는 가운데 은혜와 사랑을 끊을 수 없으니, 은혜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드는 것이 진실로 보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해에 상인은 그 지방의 보리사菩提寺에 출가하여 관각(觀覺)법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지혜로운 이해능력이 민첩하고 영리하여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는 식견이 있었다. 관각 법사는 남다른 그의 기량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변두리에 묻히게 놔둘 수가 없어서, 곧바로 상인을 교토京都 불학佛學의 중심지인 히에이산(比叡山)에 보내어 원광源光법사의 문하(座下)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도중에서 우연히 법성사法性寺의 충통忠通을 만났는데, 충통은 특별히 수레에서 내려와 경의를 표하였다. 이에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자 충통은 “이 아이의 눈빛이 사람을 비추는 것을 보니, 필히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에이산에 올라와서 오래지 않아 원광법사는“이 아이는 천리마이니, 썩은 새끼줄로 얽맬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천태종의 철인인 황원皇圓아사리의 처소로 보내셨다. 아사리는 상인의 기품이 출중함을 보자마자 큰 법기임을 알아채고는 매우 기뻐하며 “내가 어젯밤 꿈에 보름달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징조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곧 제자로 삼으시며 계단에 올라 계를 받게 하였으니, 이때가 상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3년이 채 되지 않아 천태의 교리를 전수 받아(秉受) 조석으로 훈습하고 익혀서 오묘한 뜻을 철저히 궁구하였다. 황원법사는 그를 천태종의 동량으로 기대하였으나 상인은 명예를 생각지 않고 견고한 마음으로 벗어나기를 원했다.

 

  열여덟 살에 구루다니黑谷에 은거하면서 예공법사叡空法師를 스승으로 모시었다. 예공법사는 일승원계一乘圓戒를 지닌 화상이자 삼밀三密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전수받은 대 아사리로, 비록 상인이 나이는 어리지만 출리심은 책려策勵하는 사람이 없어도「법이 그러하듯이 자연스럽게法爾自然」생겨나는 것을 보시고는 깊이 찬탄하며 상인에게「법연法然」이라는 호를 주시고 원공源空」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니 즉, 최초의 스승이신 원광의 「원源」자와 뒤의 스승인 예공의「공空」자를 취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돈대계圓頓大戒를 받고 그 정통을 계승하였으며 또한 요가(瑜伽)의 비법을 전수 받았다.  

 

  상인은 배우길 좋아하여 피곤함을 몰랐고 모든 경·율·논 삼장을 깊이 연구하느라 잠을 잊었으며, 자타 종파의 장소章疏를 열람하는데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이 밖에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전기傳記 및 고금의 모든 고덕의 비서秘書를 두루 읽었고, 각 종파의 뛰어난 대덕들을 직접 방문하여 의리義理를 따지고 제가諸家의 깊은 뜻을 탐구하여 모두 인가認可를 받았다.

 

  상인은 일찍이 “나는 책을 세 번만 읽으면 의취意趣가 저절로 드러나므로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각 종파의 경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모두 저절로 요지를 터득할 수 있었다.

 

  상인은 대장경藏經을 모두 합쳐서 다섯 번을 읽었으니, 불가사의한 지혜(神智)는 더욱 늘었다. 또한 내전內典에만 정통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모든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읽어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함이 당대에 독보적인 까닭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존경하여 그를‘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불렀다.

 

  상인은 여러 종파의 교리를 다 깊이 알 뿐만 아니라 수행 역시 영험이 많았다.

  삼칠일을 기한으로 정하고「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는데, 이에 감응하여 보현보살이 흰 코끼리를 타고 오시어 증명해주신 적이 있었고, 또한 산왕山王 다이곤겐(大權現)이 모습을 드러내 호위를 하기도 했다.  

 

  또한 『화엄경華嚴經』을 펼쳐 읽을 때 작은 푸른 뱀이 책상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어 법제자 신공信空이 이를 보고서 너무 무서워 그 뱀을 잡아 밖으로 내보냈으나 돌아와서 보니 그 뱀이 여전히 원래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신공의 꿈에 큰 용 한 마리가 와서 “나는 화엄경을 수호하는 용신龍神이니 그대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또한 매번 진언종의 비밀스런 관법에 들 때 마다 늘 연화와 갈마羯摩, 보주寶珠와 같은 서상瑞相을 감응하였다.

 

  또한 밤에 독경을 할 적에 불을 켜지 않아도 실내가 환하게 밝아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기어 방안에 들어가 보니 등불이 전혀 없었는데, 다시 바깥에서 보니 광명이 환하게 비추었으므로 매우 불가사의함을 느끼면서 수희隨喜의 눈물을 흘렸다.  

 

  또한 독서를 할 적에 이마에서 빛을 놓아 등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으며, 야간에는 실내에 등이 없어도 저절로 밝아 마치 대낮과 같았는데,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관경觀經』에서 이르길 “대세지보살의 또 다른 이름이 무변광無邊光이시니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를 두루 비추신다”라고 하였다. 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應身인 까닭에 늘 광명을 나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상인의 마음은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셨는데, 오직 선도대사의『관경소觀經疏』만큼은 특별히 우러러 믿으시며 다시 세 번을 거듭해서 읽은 후 홀연히 아미타불의 세간을 뛰어넘는 서원의 뜻을 깨달으시고는 “무거운 죄와 어지러운 생각을 갖고 있는 범부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을 강한 인연으로 삼아 결정코 극락의 보토報土에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환희용약歡喜踴躍함이 마치 어두운 밤에 크게 밝은 등불을 만난 것 같았다. 이에 즉시 여태껏 익혔던 성도聖道를 버리고 오르지 정토의 염불왕생을 계승하여 사방통달의 나루(通津)로 삼았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선도대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당나라 선도이니라. 그대가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크게 유통하는 까닭에 증명하러 왔노라. 이 후로 홍법弘法이 막히지 않아 널리 사방의 멀리 떨어진 곳까지 미칠 것이니라”고 하였다. 선도대사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는 까닭에 증명을 해주러 오신 것이다.

 

  상인은 43세에 구로다니黑谷를 떠나 낙동길수洛東吉水에 주석駐錫하며 정토종을 개창開創하여 전수염불을 크게 펼치시니 멀고 가까운 사부대중이 감복하여 귀의함이 마치 모든 하천이 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다카쿠라(高倉) 천황은 상인의 도예(道譽)를 듣고 특별히 숭상崇尚하여 궁내로 초청하여 정토종의 요지를 강의하게 하였으니, 왕비와 궁녀·고위 백관의 권속에 이르기 까지 모두 그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서 태후(西太后)가 상인에게 서문원西門院에서 칠일 간의 설법을 청했더니, 뱀이 문짝 위에서 가지 않고 또아리를 틀어 청법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법연法筵이 원만한 날에 이 뱀은 홀연히 죽으면서 뱀 머리가 갈라졌다. 대중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 뱀의 신식身識이 흡사 천인과 같았으며 날아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수상인 후지와라노 가네자네(藤原兼實)는 상인에 대한 공경심이 돈독篤敬하여 상인을 월륜전月輪殿으로 모셔서 정토종의 요의(淨宗要義)를 여쭈어 의심을 끊었던 적이 있었는데, 상인이 강의를 마치고는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면서 월륜전 다리 위에 도착하자 후지와라노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서야 비로소 좌우의 시종들을 향해 물었다.

 

  “상인의 머리 위로 금색 원광이 나타나고 발은 연꽃을 밟으며 땅에 닿지 않고 가시는 그 모습이 대세지보살과 같았는데 너희들도 보았는가?” 목격한 사람도 있고, 목격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다리를 「원광교圓光橋」라 불렀으며, 상인을 살아있는 부처로 여기면서 존숭尊崇하는 마음은 더욱 돈독해졌다.  

 

  또한 영산사靈山寺에서 21일간 불칠佛七 법회를 거행한 적이 있었는데, 5일째 되는 한밤중에 한 두 사람이 대세지보살이 대중을 따라서 경행염불經行念佛하는 것을 보고서 앞으로 나아가서 절을 하며 한참동안 우러러보니, 보살의 모습이 비로소 법연상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소 상인이 대세지보살勢至菩薩의 응화신應化身임을 알게 되었다.  

 

  7일째 밤이 되어 도량의 등불이 다 꺼졌으나 실내는 여전히 환하게 밝으니, 대중들이 기뻐하고 불가사의함을 느끼며 더욱 더 정진하였다.

 

  또한 공윤승정公胤僧正의 꿈에 상인이 오셔서 설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는 ‘원공源空의 본지신本地身은 대세지보살이니, 중생을 교화하는 까닭에 여러 번 이 세상에 오셨노라’라는 게송이 있었다.  

 

  상인이 몰래 본지의 밀인密因을 흘림은 대중의 근기에 따라 달랐지만 대세지보살의 응화신應化身을 나툰 증거가 가장 많았다.

  제자 승법勝法이 상인의 상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상인에게 직접 초상화의 제찬題贊을 청하니, 상인은 생각도 않고 즉시『세지원통장勢至圓通章』의 ‘나는 본래 인지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증득하였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염불인을 거두어 정토에 돌아가게 하니라(我本因地,以念佛心,入無生忍;今於此界,攝念佛人,歸於淨土)’라는 글을 적어서 주셨다.

 

  또한 산슈讚州의 생복사生福寺에 계실 적에 상인은 손으로 직접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하여 복장에 들어가는 게송 한 편을 지어셨다. 게송에는 ‘법연의 본지신本地身은 대세지보살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에 이 도량에 몸을 나투어 안치顯置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또한 제자 직성直聖이 쿠마노산에 있을 때 병이 도진 적이 있었는데, 상인이 너무 그리워서 서둘러 교토京都에 돌아가서 찾아뵈려 하였다. 그런데 꿈에 다이곤겐(大權現)이 나타나 그에게 “그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것은 좋지 않다. 법연상인은 대세지보살의 응신이시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상인은 80세가 되던 해, 2월 25일 정오에 왕생하셨는데, 왕생하기 수일 전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전신은 인도의 성문승聲聞僧이었는데, 항상 두타행을 닦았었다. 이번에 본국에 와서 천태종을 배우고 나중에는 정토문을 열어 오로지 염불법을 선양하였다”라고 하셨다.

 

  제자 세관勢觀이

  “성문승 가운데 어떤 분이셨습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사리불이네”라고 답했다.

 

  또 어떤 제자가

  “스승님께서는 지금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상인은

  “나는 본래 극락의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극락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사리불은 석존釋尊의 10대 제자 중에 ‘지혜제일’이었으며, 부처님께서『아미타경』을 설하실 때, 사리불을 36번 부르면서 그를 대고중(對告衆;경을 설하는 대상)으로 삼았었다. 사리불 존자가 대세지보살의 응화신이었고, 대세지보살 역시 아미타불의 지혜의 나툼인 까닭에 똑같이‘지혜제일’이라 불리고, 똑같이 ‘정토법문’을 계승한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지금의 법연상인 역시 그러하다. ‘대세지보살이 다시 오심’이고, ‘지혜제일’이시며 ‘정토문을 개설’하셨으니, 가히 ‘먼저 오신 성인이나 뒤에 오신 성인이 그 도리는 하나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제자들이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상인에게 바라보시길 청하자 상인은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부처님께서 진신眞身을 나투셨는데, 너희들은 보았는가? 내가 십몇 년 동안 늘 불보살의 진신과 정토장엄을 보면서도 절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 임종을 맞이하여 너희들에게 일러주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22일 제자들이 모두 쉬러 가고 오직 제자 세관 한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때에 한 귀부인이 수레를 타고 와서 혼자 상인과 대면하기를 요청하고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부인이 돌아갈 때 세관은 자못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를 따라 나섰지만 멀리가지 않아 홀연히 사라졌다. 세관이 돌아와서 상인에게 여쭈어보니 상인은 “그녀는 위제희 부인이시다”라고 회답하셨다.  

 

  23일부터 25일까지 고성염불高聲念佛을 하시니 인연 있는 승려와 속인(道俗)들이 뜰 안에 가득 모여 다 같이 염불을 하였다.

  25일 정오가 되자 상인은 승가리僧伽梨를 입고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서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으시네(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라는 게송을 읊으시며 기쁜 기색으로 입적을 하시니, 세수世壽 80세, 승납僧臘 66세이었다.

 

  입적하시기 5일 전(2월 20일)에 짙은 자줏빛 구름이 지붕 위를 덮었는데, 안색이 선명하여 그 모습이 마치 탱화(圖繪) 속 불상과 같았으니, 승려와 속인·귀한 자와 천한 자·먼 곳과 가까운 곳의 승려와 속인(緇素)들이 보는 이마다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듣는 이마다 그 기이함을 찬탄하였다.

 

  제자들이

  “이미 자줏빛 구름의 상서가 있었으니 스님께서 왕생할 때가 다가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상인은

  “그렇다! 지금 보고 듣는 이들은 신근信根이 증장增長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23일 낙하洛下로부터 “동산에 자줏빛 구름의 서상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24일 자줏빛 구름이 크게 일어 서산을 덮었고, 나뭇꾼 수십명이 모두 보았다.

 

  또 어떤 비구니 스님이 광륭사(廣隆寺)로 가는 길에 자줏빛 구름을 보고는 곧 이 기이한 서상瑞相을 대중에게 알렸다.

 

  왕생하신지 16년 후에 제자들은 유체遺體를 모신 돌로 된 감실을 열어보았는데, 온 몸은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기이한 짙은 향기가 났다. 승려와 속인 천여 명이 유골을 호송하여 서쪽 교외로 옮겨서 다비荼毘을 할 때, 기이한 향기가 풍기고 자줏빛 구름이 소나무에 드리웠기에 ‘자운송紫雲松’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 건물을 짓고 오랫동안(長行) 염불을 하였으니, 지금의 광명사(光明寺)가 그 유적이다.

 

  법연상인이 왕생할 때 채색 구름의 기이함과 다비荼毘를 할 때 유골의 수승한 모습은 간략히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지만, 평생동안의 영묘한 서상(靈瑞)과 입멸후의 감응感應은 더욱이 다 기록하기가 어렵다.

 

  이 같은 모든 상서로운 감응의 곳곳에서는 법연상인이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생사 범부가 아니라 중생구제를 위해 자비의 배를 타고 다시 오신 대권大權보살로서 오탁의 어리석은 범부들을 불쌍히 여겨 무변광無邊光의 힘으로 사바세계에 온바가 없이 오시고, 정토문을 열어 ‘일향전념一向專念’의 뜻을 보이시며, ‘모든 선악 범부가 반드시 보토에 왕생한다’는 이치를 밝히셨음을 나타낸다.

 

  마치 석가세존께서 80년 동안의 응화應化를 마치신 것과 같이 (상인께서는) 머리는 북쪽으로 하고 얼굴은 서쪽을 향해 ‘광명이 두루 비춘다光明遍照’는 게송을 읊으시며 돌아감이 없이 정토로 돌아가신 것이다.  

 

  만약 감응을 논한다면 기타 종교, 내지는 민간의 귀신에 대한 신앙도 역시 적지 않다.

  만약 불교도 감응으로 숭상을 받는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단 사람들을 이끌고 미신의 길에 들어서기 쉬울 뿐만 아니라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사마외도의 구렁텅이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그러므로 영험의 사례 뒤에는 반드시 교리로써 보충설명을 하여 구경해탈을 할 수 있는 광명대도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치에 밝고 믿음이 깊으면 감응의 유무에 조금도 집착하는 장애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단 교화하여 인도하는 방편이 아닐 뿐더러 더욱이 침륜沈淪하게 만드는 악연이 되고 만다.

 

  담란曇鸞 대사는 사론四論의 강설을 버리고 한 마음으로 정토에 귀의하셨고, 도작道綽선사는 열반의 광업廣業을 제쳐놓고 오직 서방의 행을 선양하셨다.

 

  혜정慧淨은 어리석고 우둔한 무리와 극악한 최하의 부류에 속하나, 뜻밖에 이 같은 극선極善이며 최상의 수승한 법을 만났으니 가히 천생억겁에도 만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감읍感泣한 나머지 말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 이 글을 보신 이는 잘 헤아려 주시고 아울러 잘못된 점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시길 바란다.

 

                                                        1993년 10월 23일

                                                  석혜정釋慧淨 삼가 서문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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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순정시대 (純淨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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