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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3. 정토사상(제4강)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6.01.17|조회수33 목록 댓글 0

 3. 정토사상(제4강)



1. 사바세계의 실상

 

 

 

불교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원하는 일이 아무리 애써도 잘 안 될 때는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당하고 보면 운

명이란 우연히 결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다는 점쟁이를 만나면 미신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고,

무튼 운명에 대해 뭔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확신이 없으니까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이런가 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런가 하고 그래요." 라고 대답한다.


사실 인간의 운명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러나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건 인간의 운명이건

할 것 없이 일체의 모든 존재는 인과응보의 법칙에서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설한다.


한 예로 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이 미륵보살과 여러 대중을 모아 놓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왜 고통을 받고 사는지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재물 때문에 생기는 고통

부처님께서 미륵보살과 천신과 인간들에게 말씀하셨다.

"…… 세상 사람들은 경박해서 하잘 것 없는 세속 일로

서로 다투느니라. 그들은 세상의 모진 죄악와 고통 속에서 오

직 자신의 생활만을 영위하기 위해 허덕이고 있느니라.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

애를 쓰니, 있는 이나 없는 이나 그 시름은 마찬가지니라.

그러므로 항상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괴로워하며,

얽히고 쌓인 욕심과 근심으로 쫓기고 방황하나니,

잠시도 마음 편할 새가 없느니라.

논밭이 있으면 논밭 때문에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 때문에 걱정하며,

나 말 들의 가축이나 노비나 금전, 의복, 음식 등

여러가지 재산을 가진 사람은 또한 그것 떄문에

근심 걱정으로 시름과 두려움이 끊이지 않느니라.

그런데 재물이란 뜻밖에 수재나 화재를 만나

불에 타기도 하고 물에 떠내려가기도 가며,

도적이나 원한이 있는 이나 빚쟁이들한테

빼앗기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재물이 흩어지고 없어지면

답답하고 분한 생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날이 없으며,

옹졸한 마음에서 헤어날 수 없느니라.

이렇게 해서 마음이 멍들고 몸이 허물어져 목

숨이 다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귀한 사람이나 부자나 매한가지니라.

이와 같이 갖가지 근심과 두려움과 애타는 괴로움은 끝이 없으니,

그 고통은 마치 얼음이나 불 속의 괴로움과 같으니라.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항상 군색하여 불만이 그치지 않느니라.

그들은 논밭이 없으면 논밭을 가지려 애쓰고,

집이 없으면 집을 가지려 애쓰며,

소나 말 등의 가축이나 돈, 의복, 음식 등

재산이 없으면 또한 이를 가지려고 안달하며 괴로워하느니라.

한 가지가 있으면 다른 한 가지가 부족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부족하여 애써 이것저것을

다함께 가지려 하며, 어쩌다가 모두 갖추었다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괴로워하며 다시 찾아 헤매지만

얻을 수 없으면 부질없이 마음만 태우고

몸도 마음도 지치고 피곤하여 안절부절 못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근심과 괴로움이 끊이지 않고

그 고통은 마치얼음이나 불을 품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러한 괴로움과 근심 때문에 몸을 상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나니,

평소에 착한 일을 하지 않고 진리를 배우거나

공덕을 쌓지도 못한 채 몸을 버리고 허무히 홀로 돌아가 ,

 결국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갈 수밖에 없지만

그 선악의 업보의 길마저도 모르고 가느니라."

 

인간의 마음을 더럽히는 세 가지 번뇌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 하고,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나쁘게 물들이는 독극물과 같다고 해서

삼독(三毒)이라 부른다.

위의 내용은 이 삼독 가운데 탐욕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과 과보를 설한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나의 욕망이 성취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는 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아무리 악을 쓰고 재산을 모아 본들 인연이 없으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풍백화점 사고를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수천억 원의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날려 버릴 줄 알았겠는가.

욕심을 덜 부렸다면, 처음부터 재산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험한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찾아와 소망을 묻자,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 달라고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때 대왕은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

고 했다 한다.

부와 권력을 모두 소유한 대왕이 오히려

'무소유'의 디오게네스를 부러워한 것이다.

없는 사람은 대문을 열고 자고,

많이 가진 자는 몇 겹 담장을 치고도 불안해 한다고 하지 않는가.

모든 탐욕이나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그렇다고 전혀 소유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우리의 짧은 인생을

재물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 하지 말고,

정직하게 올바른 생활을 하면서

주위에 고통받고 괴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小欲知足)'을 강조한다.

욕망을 줄이면 여유가 생긴다.

여유는 물질적으로 풍부하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얻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그것이 내세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식에게 물려 주었을 때

자식이 제대로 인간 노릇을 못 하면

그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나 올바른 정신과 신체로

인간답게 사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내세를 결정짓는 요인이며,

이렇게 사는 방법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

최대 재산이라는 것을 경전은 가르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고통

"세상 사람들은 부모와 자식, 형제나 부부,

가족, 일가 친척간에는 서로 공경하고 사

랑하며 결코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있는 것 없는 것을 서로 주고받아 탐내거나 인색하지 말며,

항상 상냥한 말과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대하여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라.


혹시 다투어 분한 마음이 남으면

비록 이 세상에서의 원한은 적다고 할지라도 다

음 세상에서는 큰 원수가 되고 마느니라.

왜냐하면 이 세상일이란 서로 미워하고 괴롭혔을 때

당장은 사이가 나빠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마음 속으로 독을 품고 분한 마음을 맺어서

풀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자라서

사라지지 않으니, 결국에는 사후에 모두 같은 세상에 태어나

서로 앙갚음을 하게 되느니라.


인간은 이 세상 애욕의 바다에 홀로 태어나

홀로 죽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과 쾌락의 장소에서도

자기가 지은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는 스스로 받고 스

스로 감당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러므로 선악의 과보에 따라 각기 태어날 곳을 달리하여

착한 일을 행한 사람은 행복한 곳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재앙이 많은 곳으로,

업에 따라 엄연히 정해진 처소로 나아가는 것 이니라.


멀리 떨어진 다른 처소에 태어나면

이승에서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서로 만날 수 없나니,

와 같이 금생에 지은 선악의 행위와 내세에서 받는 고락의 과보는

변함없는 자연의 도리로서, 각기 지은 소행에 따라서 태어날 뿐이니라.

가는 길은 멀고도 어두워 서로 오랜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서글프고 아득하여 다시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느니라.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어찌하여 덧없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젊고 건강할 때에 열심히 선을 닦고 정진하여 고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진리의 대도를

구하려 하지 않는가?

도대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어떠한 즐거움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 가운데,

성내는 습관은 내세에 원수를 만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간혹 있다.

분명히 원한 맺을 일을 한적이 없는데

어처구니없이 살해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있다.

이러한 일이 생기면 우연이라 해야 할지

필연이라 해야 할지 가슴만 치는 경우가 많은데,

경전에서는 이것을 모두 자신의 업이 만든 결과라 해석하여 '

이 생에서 사소한 원한이라도 풀지 않으면

내세에는 원수로 만난다.'고 한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습관적으로 성내는 마음이 이렇게

원수를 만나는 악연(惡緣)의 과보로 돌아올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부부의 연을 악연이라 하거나,

혹은 자식을 빚 받으러 나온 빚쟁이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생에서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나거나 자

식으로 태어날 수 있는 인연이란 무한 겁 동안 쌓아온

()한 인연의 힘이다.


이것은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일 두 사람이 악연으로 만났다면

처음 만났을 때 벌써 상대방을 해치거나 상처를 주었을 것이며,

얄미운 생각만 나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에서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혼하거나 부부 사이에 사이가 심각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처음에는 서로가 좋아서 결혼했다고 한다.


선한 인연은 선한 인연끼리 모이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선한 인연으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아이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에서도

어마어마한 비율인데,

어째서 빚 받으러 나온 사람으로 해석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런 말들은 부부싸움으로 마음이 상하거나

자녀가 말썽을 일으켰을 때 나온 것이 겠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악연이 아니라

이 생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책임을 알아야 한다.

부부싸움에는 싸우는 원인이 있고,

자식의 말썽에도 말썽을 피우게 된 근본 원인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근원적인 원인을 분석해서

그렇게 된 원인 속에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참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에 불과하다.

이렇게 섣불리 내뱉은 무책임한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은

결국 이 생에서 자신이 지은 업(··의 삼업)이 되어,

생에서 좋았던 선한 인연들이

생에는 악연이 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악업으로 인해 내세에는 재앙이 많은 곳에 태어나

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또한 경전은 이러한 악업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업의 과보는 자기 스스로 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죽은 후에 천도해 주면 극락왕생한다는 생각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렇다고 49재와 같은 천도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식은 이미 우리의 고유문화와 전통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은 불교의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49재를 지내는 것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적인 전통과 풍습이 융화된 불교의식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내세에 대한 희망과 안도감을 줄 뿐 아니라,

불교교리적으로 볼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선업을 쌓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에 결코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교경전에서 자신의 업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사는 동안에 선행을 쌓으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잘 지내고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돌아가시고 나면 부모는 그들 각자가 이 생에서 지은 업대로

과보를 받아 각자의 길로 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고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


교는 내세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생에서 현재의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 것을 권한다.

 

인과관계를 믿지 않은 사람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선을 행하여 안락을 얻고,

진리를 닦아 불도를 성취하는 도리를 믿지 않느니라.

또한 사람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과

은혜를 베풀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선악 인과의 엄연한 사실을 믿지 않고,

세상 일이란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잘못 생각해서

끝내 올바른 가르침을 믿으려 하지 않느니라.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오히려 이것을 더욱 옳다고

고집하고 우기는 것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 마찬가지니라.

그래서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그릇된 생각을 대대로

이어받아 부모는 자식에게 도리어 그것을 교훈으로 가르치느니라.

따라서 선배나 조상들은 선을 닦은 적이 없고,

도덕을 몰라 자손의 행동은 어리석고 정신은 더욱 혼미해져

마음은 막히고 옹졸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죽고 사는 생사의 이치와 선악 인과의 도리를 알 수도 없으며,

그에게 말해줄 사람도 없느니라.

그러나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과의 도리에 따라

어김없이 스스로 받는 것이니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 되느니라.


인간이 죽고 사는 생사의 법칙은

언제나 변함없는 도리로 영원히 이어나가는 것이니라.

부모는 자식을 잃고 슬퍼하고, 자식은 부모를 잃고 통곡하며,

형제간·부부간에도 서로 죽음을 당하여 애통해 하느리라.


그런데 죽음에는 늙고 젊은의 차례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이것이 무상(無常)한 일생의 실상이니라.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이러한 무상의 도리를 깨우쳐 주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너무나 적고,

그러는 사이에 생사는 돌고 돌아 잠시도 그칠 사이가 없느니라.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어리석고 반항적이어서

성인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고 멀리 앞을 내다보는 슬기도 없으며,

오직 각자의 쾌락만을 탐하느니라.

그래서 애욕에 미혹되어 도덕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애착과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치 승냥이처럼 오직 처자 권속과 재물만을 아끼고 탐할 뿐이니라.

그러므로 생사를 여의는 대도(大道)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져

생사윤회가 끝이 없나니,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기 그지 없느니라.


인생이란 어떤 때는 한 가족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부부간에 누군가가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은 못내 슬퍼하고 못 잊어 하느니라.

그 은혜와 사랑으로 마음이 얽매어 쓰라리고

그리운 심정은 가슴에 사무치고,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도

맺힌 마음은 풀릴 길이 없느니라.


 참된 도리를 말해 주어도 그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사람과의 정리를 생각하면서

마음은 혼미하고 답답하여 더욱 어리석은 미망에 덮이게 되느니라.

그래서 깊이 생각하여 헤아릴 아량도 없고, 마음을 돌이켜

오로지 불도에 정진할 만한 결단도 없으며,

끝끝내 덧없는 세상일을 단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한세상 허둥지둥 헤매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나니,

이미 목숨이 다하면 진리의 길은 닦을 수도 얻을 수도 없으니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느니라.

세상은 혼탁하여 인심은 어리석고 어지러워 애욕만을 탐하니,

인생의 길을 헤매는 사람은 수없이 많고 진리를 깨달은 이는 지극히 드무니라.

 그러니 세상일이란 부질없이 바쁘고 어지럽기만 하여

믿고 의지할 아무것도 없느니라.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어른이나 이이 할 것 없이 모두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지만

어쩌다 서로 이해가 충돌하면 원수같이 미워하나니,

그 사납고 표독한 마음은 마침내 불행한 재앙을 일으키느니라.


이렇듯 천지의 올바른 도리를 거스르고

인간의 참다운 본심을 따르지 않아

저절로 그릇된 악업은 앞뒤를 다투어 거듭하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다만 그 죄업의 결과만을 기다릴 뿐

달리 어찌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미처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죄업의 힘은 별안간에

그의 목숨을 빼앗아 악도에 떨어뜨리고 마니,

몇 생을 거듭하며 지독한 괴로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느니라.

사나운 악도 가운데서 돌고 돌며 몇천만 겁의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올 기약이 없고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나니,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일이니라."

 

어리석어 인과관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과보에 대해 설한 것이다.

상 만물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라거나 '내 것'이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생긴다는

인과관계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인과관계를 믿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여 결국은 그 악업으로 인해 악도에 떨어져

기약 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이치를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업장이 두꺼운 사람'이라 한다.


'업장이 두껍다' 란 과거에 저질은 악습이 원래의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뒤덮고 있어 좋은 말을 들으면 이 악습이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그 순간뿐,

결코 믿고 실천하려 하지 않으며 돌아서면 다른 짓을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쇠 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바로이런 것이다.


경전에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과의 도리에 따라

어김없이 스스로 받는 것이니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불법의 도리를 믿고 선업을 쌓아 돌고 도는 육도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믿는 목적이다.

 

 

 

2. 의지와 노력이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킨다

 

 

 

경전에서 설한 사바세계는 바로 우리들 삶의 실상이다.

2500여년 전에 설한 부처님 말씀이

현대에 사는 우리들 삶의 실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회나 환경이 변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앞에서 본 경전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인간의 운명은 과거에 지은 자신의 업(행위)이 좌우하는 것이므로

현재 한 순간 한 순간 행하는 행동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변화해 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 결정된 것도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돌발적으로 결정되거나

신이 있어 신의 뜻대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인과의 법칙에 따리 결정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 나의 모습이나 생활은

모두 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해 받게 된 결과라 했다.


이렇게 말하면, 전생에 지은 업이 현재의 삶을 결정한다면

결국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현세의 행복이나 불행은 모두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현세에서의 행위는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일 없이

모두 내세 운명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전생에 지은 업' 이라는 말과

'과거에 지은 업'이라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 두고 싶다.


일반적으로 '전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세상을 말하고,

'과거'는 현재를 기점으로 지나간 모든 시간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생의 업'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은 업만을 말하지만,

'과거의 업'이란 전생의 업은 물론이고

내가 태어난 후부터 현재를 기점으로 조금 전까지 지은 모든 업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전생의 업''과거의 업'은 의미가 다르다.


그런데 ''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라 하면 괜히 고리타분하게 생각해서

전생에 지은 업보가 어쩌고 하면서 중언부언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과거에 내가 행한 모든 행위가 다 ''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행한 모든 행위는 물론

내가 태어난 후부터 조금 전까지 행한 모든 행위들,

즉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한 선악의 모든 행위들

(이것을 ··意 三業이라 한다)은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몸 속에 사진의 필름처럼 남아 일종의 잠재세력을 형성하여

우리에게 걸 맞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것을 업이라 한다.


업은 우리들의 지능·성격·습과·체질 등을 형성하여

개개인의 현재 삶(상태)을 결정하고

또한 새로운 선악행위를 추가함에 따라 끊임없이 선이나 악으로 변해 간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가다 장난으로 상점의 물건을 슬쩍 훔쳤다고 했을 때

비록 장난이라 하더라도 훔친 행위()

하나의 악의 종자로써 우리의 제8 아라야식

(심리학 용어로는 무의식이라고도 함) 속에 보관된다.


아라야식 속에 저장된 악의 종자는

언제나 의식화될 수 있는 인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훔칠 기회만 주어지면 곧바로 행동으로 나타나

또다시 훔치며, 이로써 아라야식 속에는 악의 종자가

두 개로 늘어나고, 다시 네 개, 여덟개로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드디어는 생각지도 못한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다.


이와 같이 비록 처음에는 장난으로 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결

과는 어처구니없는 악한 행동(악업)을 초래하므로

한 순간 한 순간의 행동을 결코 무심히 해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전생의 업이 현세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우리들이 행한 선악행위나 노력 여하에 따라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자식의 운명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현실에서의 의지나 노력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때문에 수행으로 현세에서 고통을 해결하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수행의 노력도 무의미하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스스로 업론자(行業論者)임을 설하고,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숙명론이나

인간의 길흉화복은 신()의 뜻이라는 신의론(神意論)에 대해,

각자의 행위의 자발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숫타니파타"인간은 출생에 따라 천민이 되는 것도 아니며,

출생에 의해 사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따라 천민도 되고 사제자(司祭者)도 된다."고 한 것처럼,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행위의 질적(質的) 의의를 문제시하고,

행위의 내적 동기를 중요시하였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튼 현재 나의 모습이나 생활의 모두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라면 미

래의 삶을 위해 우리는 이 업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장소멸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업장이란 과거의 나쁜 행위에 의해 형성된 습관이나

성격·체질 등이 현재 올바르게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형성되어 온 좋지 않은 습관이나

체질·성격 등을 잘 파악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요인들이 현재의 삶을 지배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나쁜 행위들을 추가함으로써 현재보다 더 좋지 않은

미래의 삶을 가져 오게 된다.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업장소멸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왕사성의 비극

 

 

 

관무량수경에서는 위제희라는 한 왕비의 삶을 통해

업의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그녀가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는 자세를 설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만년에 기사굴산(영취산)에 계실 때,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현재의 파트나 시 남쪽 라즈기르)

큰 비극이 일어났다.

 태자 아자세가 석가모니의 사촌인 제바달다의 꼬임에 빠져

부친 빈비사라왕을 유폐하고 굶겨 죽일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 관무량수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대반열반경에서는 아자세가 태어나기 전에

빈비사라왕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얻고 싶었던 왕은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점쟁이는 산 중에 한 선인이 살고 있는데,

그 선인이 천수를 다한 후에는 다시 이 왕궁에 태어나 왕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면 선인이 언제 세상을 떠날 것인지를 묻자

아직 3년이 남았다고 했다.

그러자 왕은 3년을 기다릴 수가 없어 선인이 있는 곳으로 사신을 보내어

곧 세상을 떠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선인이 응하지 않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명령이라 전하고

선인을 살해했다.

 그런데 선인은 죽는 순간에

 "아무리 왕이라도 수명이 다하지 않은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왕궁에 태어나 왕자가 되면 언젠가는 신하에게 명하여 왕을 살해하게 할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선인이 죽자 점쟁이가 말한 대로 왕비는 임신을 했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하니,

"대왕이시여, 왕비는 분명히 옥동자를 임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나쁜 징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왕자가 성장하면 대왕에게 해를 입힐 것이 틀림없습니다."

 라고 했다.

 왕의 기쁨은 일순간에 공포로 변해 버렸다.

왕은 즉시 왕비에게

 "앞으로 태어날 왕자는 자라서 나를 살해하게 될 것이라 하오.

겨우 얻은 옥동자지만 태어나면 높은 누각에 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땅에 던져 버리면 좋겠소. 그러면 아이는 죽을 것이고 내가 살해될

염려는 없어지지 않겠소." 하며 의논했다.


왕비는 왕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태자가 태어나자

높은 누각에 올라가 땅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나 아이는 행인지 불행인지 손가락 하나만 다쳤을 뿐 무사했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아자세였다.


석가모니의 사촌인 제바달다는 아자세태자를 꼬드겨서

부왕을 살해하고 태자에게 하루라도 빨리 왕위에 오르라 했으며,

자신은 석가모니를 배반하여 교단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교묘히 속였다.

태자는 처음에는 부왕을 살해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제바달다에게서 자신의 출생 비밀을 듣고 제바달다와 결탁하였다.


먼저 부왕 빈비사라를 죽이기 위해 왕을

일곱 겹의 담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유폐하고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게 했으며, 물과 음식물도 제공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인 왕비 위제희부인만은 왕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위제희부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왕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깨끗이 목욕한 후 꿀에 밀가루와 우유를 반죽해서

몸에 바르고 구슬 목걸이 속에는 포도주를 넣어 가지고 들어가

왕에게 주었으므로 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왕은 평소에 부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돈독했으므로

날마다 식사가 끝나면 기사굴산을 향해 석가모니께 예배하고

팔계(八戒)를 받기를 원했다.

석가모니의 제자인 목건련존자와 부루나존가가 신통력을 부려

공중으로 날아와 팔계를 줄고 설법을 해 주어 왕은 감옥에서도 건강하였다.


삼주일이 지나자 아자세는 왕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간수를 찾아가 왕이 어떠한지를 묻자

간수는 어쩔 수 없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아자세는 크게 화를 내며

왕에게 설법한 승려는 악당들이고,

원수인 아버지와 내통한 어머니는 역적이라 하며,

곧바로 칼을 뽑아 어머니를 해치려 했다.


그때 총명하고 지혜 많은 월광이라는 대신과

왕국의 명의로 이름난 의사 기바가 급히 달려와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신들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베다성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성전에 의하면 개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위를 탐하여

부왕을 살해한 나쁜 왕은 무려 일만 팔천 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아직 일찍이 무도하게 자기 어머니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왕께서 어머니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왕께서 어머니를 해치려 하시니

이는 왕족을 더럽히는 일로 신하로서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짓은 천한 백정만도 못한 짓이오니

저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라며

허리의 칼에 손을 대고는 뒤로 슬슬 물러나며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이 말을 들은 아자세는 뉘우치며 두 대신에게 사과하고 도와주기를 청했다.

 그리고는 이내 칼을 버리고 내관에게 명령하여

어머니를 왕궁 깊은 곳에 가두고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방에 갇힌 위제희부인은 슬픔과 시름으로 몸은 점점 수척해지고

마음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멀리 기사굴산을 향에 석가모니께 예배하고

"세존이시여, 지난날 부처님께는 언제나 아난존자를 보내어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깊은 시름에 잠겨 있지만 거룩하신 부처님을 뵈올 길마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목련존자와 아난존자를 보내어 저를 위로하게 해 주십시오."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멀리 부처님 계시는 곳을 향에 다시 예배드렸다.


위제희부인이 미처 머리를 들기도 전에

부처님께서는 곧바로 목련존자와 아난존자를 보내고

자신도 위제희부인이 유폐되어 있는 방안에 몸을 나투었다.

위제희부인은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우러러 예배하고 스스로 몸에 걸친 모든 장식품을 벗어 버리고

온 몸을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석가모니께 호소했다.

"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 숙세에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악한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까?

 또한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제바달다와

 같은 악한 자와 친족이 되셨습니다?


부디 원하옵건대 저를 위해 괴로움과

번뇌가 없는 세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저는 그곳에 태어나 다시는 이 염부제와 같은 악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악하고 혼탁한 세상에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 가득 차 있으며

선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원하옵건대 미래에는 나쁜 소리를 듣지 않고,

악한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세존을 향해 오체투지하여

세존의 자비를 바라며 참회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원하옵니다.

중생의 태양이신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여 주십시오."


이에 석가모니는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들의 불국토를 보여 주고

특히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세 가지 복(三福)과 열여섯 가지 관법을 설해 주었다.

 

 

4. 업장소멸은 참회하는 마음에서

 

 

 

인간은 한치 앞을 모른다.

그래서인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이 있다.

 더구나 현실에 문제가 있으면 있으면 있을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라도

미래를 알고자 한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고,

인공심장을 이식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현재'에 관한 것이고

물질 세계에 국한된 것이다.

 미래에 관한 것, 특히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아무리 컴퓨터에 물어 보아도 정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의지하는 것이 점()이다.

점성술이 유행하고 운세판단이 인기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과연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래나 내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석가모니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무한한 것인지 유한한 것인지,

깨달은 자는 사후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등

갖가지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러한 물음에 무기로 대답했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은

인생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식능력 범위 밖의 문제이므로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기 세상은 영원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영원하지 않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므로 석가모니는 초경험적인 것을 판단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코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침묵에 대해 집요한 추구가 있으면

석가모니는 드물게 적절한 비유를 들어 답하였다.

잘 알려진 독화살의 비유가 그렇다.

 

석가모니가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있을 때,

말룽카풋타라는 한 바라문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형이상학적인 여러 가지 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철학자와 종교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라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불교교단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러나 주위의 비구들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논하는 일 없이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말룽카풋타는 불만으로 가득 차

만일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단을 버리고 세속생활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어느 날 저녁 석가모니를 찾아가 해답을 구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설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을 바른 화살을 맞고 매우 위독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나 친척들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그를 구하기 위해 곧바로 의사에게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화살을 맞을 사람이 자기를 쏜 이가

사성계급 가운데 어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인지,

이름은 무엇이고, 신장은 얼마나 되며,

출신지는 어디고, 독화살의 종류가 무엇인지 등이

하나하나 판명되지 않으면

결코 독화살을 빼지 않겠다고 우긴다면,

그것들이 판명되기 전에 독은 전신에 퍼져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룽카풋타가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도의 수행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고 우긴다면,

그는 수행에 들어갈 기회도 없을 것이며,

윤회를 벗어나 고뇌로부터 해 탈을 얻는 일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말룽카풋타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고뇌의 해결을 위해 성실히 불도의 수행을 닦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현재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고 시급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위의 관무량수경의 경우는 미래를 아는 것이

도리어 해가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한 예이다.

아들의 부모에 대한 반역 행위는

당시의 사회불안, 인간관계의 위기, 윤리 도덕적 타락 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고대 인도의 국왕 빈비사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인간으로서 사회생활,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인간심리의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잠재해 온 근원적 욕구에서 나온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사회현상이다.


불교학자들은 이 사건이 희랍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프스 전설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본다.

오이디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베의 왕 아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이 아들의 탄생에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다'

불길한 신의 예언이 있었으므로 버림을 받고

다른 나라의 왕자로 자란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자신에 관한 예언을 알게 되고,

언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어떤 사람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자기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죽여 버린다.

그때마침 테베에 괴물 스핑크스가 나타나

시민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걸고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었는데

오이디프스가 그 수수께끼를 풀어 난을 해결하자

테베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왕으로 삼고

여왕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주었다.

그들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생기지만,

왕가에서 생긴 불륜으로 인해 테베에는 괴질이 발생한다.


나중에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 오이디프스는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뽑고 왕비는 자살하고 만다.

이것이 오이디프스 전설의 줄거리다.


이 전설도 결국은 자신의 업보는 피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위제희부인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근본 원인도

위제희부인 자신이 남편인 빈비사라왕과 모의해서

아들을 낳은 후 죽이려 한 것에 있으며,

더구나 자식을 원한 나머지 선인을 살해한 것과

점성술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자면 모든 원인은 위제희부인 자신에게 있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긴다.


러므로 석가모니는 위제희부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청정한 업을 닦는 방법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제희부인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석가모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온몸에 땅을 엎드려 통곡하며,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 숙세에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악한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까?

또한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제바달다와 같은

악한 자와 친족이 되셨습니까?" 하고 투정을 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불행해진 것은 전적으로 제바달다가

내 아들을 꼬득였기 때문이며,

 제바달다만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 불행의 책임을 제바달다의 사촌인 석가모니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자신의 불행과 슬픔을

석가모니에게 전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위제희부인이 비극의 원인을

석가모니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이외의 사람들 책임이나 원인으로

돌리려 하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행소년·소녀 들이 곧잘 쓰는 변명 중에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라는 말이 있다.

들은 나는 나쁘지 않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게 만든

부모와 사회가 나쁘다며 본인 이외의 것에 원인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환경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주위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잘못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라도 전혀 다른 성격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같은 자극이나 같은 환경에 처해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반응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개성이 있고 주체가 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훌륭하고 청순하게 살아온 자도 있다.


환경이 지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물리적·생리적인 면에

국한된 것으로서, 인간에게는 그러한 조건에 맞서서

이것을 뿌리치고 변혁할 수 있는 고도의 정신력과 문화 능력이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자기 자신에게 있다.


문제는 자신의 업, 즉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부터의 좋지 않는 습관이나 성격 등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는냐다.


불교에서는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게 한다.

서원이란 기필코 목적을 이루고 말겠다는 맹세를 말하고,

참회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이다.


 깨달음을 이루려면 먼저 업장을 소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필코 이 업장을 소멸하겠다는 서원이 필요하며,

이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참회가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참회가 깊으면 그 동안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이 생긴다.

참회할 줄 아는 자만이 불교를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고로 관무량수경에서는 아자세가 어머니 위제희부인까지도

유폐해 버린 이야기로 끝나며,

그 후 아자세가 부왕을 살해해서 왕위에 오른 후부터의 이야기는

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아자세는 부왕을 살해한 죄의 가책으로

전신에 피부병이 생겨 가렵고 아프고 악취로 밤낮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위제희부인은 아자세를 열심히 간호했지만 잘 낫지 않았다.


결국 아자세는 왕실의 의사인 기바의 권유로 석가모니를 찾아가 설법을 듣고

진심으로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하니

죄의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병도 완전히 나았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에는 명왕(名王)으로 오랫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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