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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아미타경 (阿彌陀經) 탈자 21<한자(漢字)글자>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6.12.23|조회수67 목록 댓글 0

탈자 21<한자(漢字)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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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명호(名號)아미타불(阿彌陀佛)를 수지(修持)하여 부르면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죄()를 소멸(消滅)하는

곧 이에 다선근(善根) 다 복덕(福德)의 인연(因緣)에 나아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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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 (阿彌陀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천 이백 오십 인이나 되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사위국 기원정사1)에 계시었다.

그들은 모두 덕이 높은 큰 아라한으로 여러 사람들이 잘 아는 아들이었다.

, 장로 사리불, 마하목건련, 마하가섭, 마하가전연, 마하구치라,

리바다, 주리반타가, 난다, 아난다, 라후라, 교범바제, 빈두로파라타, 가루다이,

마하겁빈나, 박구라, 아누루타와 같은 큰 제자들이었다.

이 밖에 법의 왕자인 문수사리를 비롯해 아일다보살, 건타하제보살, 상정진보살 등

큰 보살과 제석천 등 수많은 천인(天人)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장로 사리불2)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간 곳에 '극락'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거기에 아미타불이 계시어 지금도 법을 설하신다.

사리불이여, 저 세계를 어째서 극락이라 하는 줄 아는가?

거기에 있는 중생들은 아무 괴로움도 없이 즐거운 일만 있으므로 극락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 세계에는 일곱 겹으로 된 난간과 일곱 겹 나망(羅網)3)

일곱 겹 가로수가 있는데, ··청옥·수정의 네 가지 보석으로 눈부시게 장식되어 있다.

극락세계에는 또 칠보로 된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여덟 가지 공덕이 있는 물로 가득 차며, 연못 바닥은 금모래가 깔려 있다.

연못 둘레에는 금··청옥·수정의 네 가지 보석으로 된 네 개의 층계가 있고,

그 위에는 누각이 있는데 금··청옥·수정·적진주·마노·호박으로 찬란하게 꾸며져 있다.

그리고 그 연못 속에는 수레바퀴만한 연꽃이 피어, 푸른 빛에서는 푸른 광채가 나고,

누른 빛에서는 누른 광채가, 붉은 빛에서는 붉은 광채가,

횐 빚에서는 흰 광채가 나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롭고 정결하다.

사리불이여, 극락세계는 이와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졌느니라.

사리불이여, 또 저 불국토에는 항상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고,

대지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밤낮으로 천상의 만다라 꽃비가 내린다.

그 불국토의 중생들은 이른 아침마다 바구니에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꽂을 담아 가지고

다른 세계로 다니면서 십만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반 전에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산책한다.

사리불이여, 극락세계는 이와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졌느니라.

또 그 불국토에는 아름답고 기묘한 여러 빛깔을 가진 백학·공작·앵무새·사리새

·가릉빈가·공명조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화평하고 맑은 소리로 노래한다.

그들이 노래하면 오근(五根)4)과 오력(五力)5)과 칠보리분(七普提分)6)

팔정도(八正道)7)를 설하는 소리가 흘러 나온다.

그 나라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며 스님들을 생각하게 된다.

사리불이여, 이 새들이 죄업으로 생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불국토에는 지옥·아귀·축생 등 삼악도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지옥이라는 이름도 없는데 어떻게 실제로 그런 것이 있겠는가?.

이와같은 새들은 법문을 설하기 위해 모두 아미타불께서 화현으로 만든 것이다.

그 불국토에서 미풍이 불면 보석으로 장식된 가로수와 나망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마치 백천 가지 악기가 합주되는 듯하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문을 생각하며

스님들을 생각할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사리불이여, 극락세계는 이와같은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졌느니라.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을 어째서 '아미타불'이라 하는 줄 아는가?

그 부처님의 광명이 한량없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도

조금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인민의 수명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므로 아미타불이라 한다.

아미타불이 부처가 된 지는 벌써 열 겁[十劫]이 지났다.

사리불이여, 그 부처님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문(聲聞)8) 제자들이 있는데 모두 아라한들이다.

어떠한 수학(數學)으로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으며,

보살 대중의 수도 또한 그렇다.

사리불이여, 극락세계는 이와 같은 공덕장업으로 이루어졌느니라.

사리불이여,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다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들이며,

그 가운데는 일생보처(一生補處)9)에 오른 이들이 많아 숫자와 비유로도 헤야릴 수 없고,

다만 우량 무변 아승지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서원을 세워 저 세계에 가서 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 가면 그와 같이 으뜸가는 사람들과 한데 모여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조그마한 선근이나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가서 날 수 없느니라.

선남자·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만 이야기를 듣고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렛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되,

조금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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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명호(名號)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를 수지(修持)하여 부른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죄()를 소멸(消滅)하는 곧 이에 다선근(善根) 다 복덕(福德)의 인연(因緣)에 나아가게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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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이

여러 거룩한 분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가 목숨을 마칠 때에 생각이 뒤바뀌지 않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러한 도리를 알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니

어떤 중생이든지 이 말을 들으면 마땅히 저 국토에 가서 나기를 원하라.

사리불이여, 내가 지금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한 것처럼,

동방에도 아촉비불·수미상불·대수미불·수미광불·묘음불이 계신다.

이러한 수없는 부처님들이 각기 그 세계에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실한 말씀으로 법을 설하신다.

"너희 증생들은 '불가사의한 공덕의 칭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보호함'이라고 하는 이 법문(法門)을 믿으라".

사리불이여, 남방세계에도 일월등불·명문광불·대염견불·수미등불·무량정진불이 계신다.

이러한 수없는 부처님들이 각기 그 세계에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실한 말씀으로 법을 설하신다.

"너희 증생들은 '불가사의한 공덕의 칭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보호함' 이라고

하는 이 법문을 믿으라".

사리불이여, 서방세계에도 무량수불·무량상불·무량당불

·대광불·대명불·보상불·정광불이 계신다.

이러한 수없는 부처님들이 각기 그 세계에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실만 말씀으로 법을 설하신다.

"너희 중생들은 '불가사의만 공덕의 칭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보호함' 이라고 하는

이 법문을 믿으라".

사리불이여, 북방세계에도 염견불·최승음불·난저불·일생불·망명불이 계신다.

이러한 수없는 부처님들이 각기 그 세계에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실한 말씀으로 법을 설하신다. "너희 중생들은 '불가사의한 공덕의 칭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보호함'이라고 하는 이 법문을 믿으라".

사리불이여, 하방세계에도 사자불·명문불·명광불·달마불·법당불·지법불이 계신다.

이러한 수없는 부처님들이 각기 그 세계에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실만 말씀으로 법을 설하신다.

"너희 중생들은 '불가사의한 공덕의 칭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보호함' 이라고 하는

이 법문을 믿으라".

사리불이여, 상방세계에도 범음불·수왕불·향상불·대염견불·잡색보화엄신불

·사라수왕불·보화덕불·견일체의불·여수미산불이 계신다.

이러한 수없는 부처님들이 각기 그 세계에서 삼천대책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실한 말씀으로 법을 설하신다. "너희 중생들은 '불가 사의한 공덕의 칭찬'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보호함'이라고 하는 이 법문을 믿으라".

사리불이여, 이 경을 가리켜 어째서 모든 부처님들이

한결같이 보호하는 법문이라 하는 줄 아는가?

선남자·선여인들이 이 법문을 듣고 받아 지니거나 부처님의 이름을 들으면

모든 부처님의 보호를 받아 바른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내 말 과 여러 부처님의 말씀을 잘 믿으라.

사리불이여,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의 세계에 가서 나기를 이미 발원하였거나

지금 발원하거나 혹은 장차 발원한다면 그는 바른 깨달음에서 물러나자 않고,

그 세계에 벌써 났거나 지금 나거나 혹은 장차 날 것이다.

그러므로 신심이 있는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발원해야 할 것이다.

사리불이여, 내가 지금 여러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칭찬하듯이,

저 부처님들도 또한 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칭찬하실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렵고 희유한 일을 하셨다.

시대가 흐리고, 견해가 흐리고, 번뇌가 흐리고, 중생이 흐리고,

생명이 흐린 사바세계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고

증생들을 위해 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한다".

사리불이여, 내가 이 오탁악세에서 갖은 고행 끝에 바른 깨달음을 얻고,

모든 세상을 위해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라.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해 마치니 사리불과 비구들과 모든 세간의 천인

·아수라들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 영상물은 아미타경을 아신다면

대충 추론 할수가 있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경(阿彌陀經)간절한 찬탄 속 자력-타력은 둘 아닌 하나

이 우주는 허공이 끝이 없기에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기에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작용하는 형태도 또한 끝이 없다. 이러한 경계는 한계 지을 수가 없기에 우리 중생의 분별로는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자기 견해에 빠져 갖가지 오류를 범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본의를 망각하여 또 다른 새로운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작용은 한계가 없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하여 주신다. 나아가 중생의 소질과 능력의 차이에 따라 온갖 방편을 제시해 주어야 하기에 본래의 진리의 몸을 나타내어 각각의 시공을 초월해 구제하시고자 보신과 화신으로 나투시어 응병여약(應病與藥)을 처방하여 인도하신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는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날마다 달마다 기쁨과 행복을 갈구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무지한 과욕과 허영에 찬 사리사욕과 잘못된 견해에 빠져 고집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를 치유하는 방식은 이미 부처님께서 설해 놓으신 경전을 믿고 사유하여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공부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의 첩경이다. 그리고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의 행복을 마련해 놓았다.

누구나 믿고 의지하면서 발원하기만 하면 참다운 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만족스런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 사바세계의 현상은 제한된 육체와 환경으로 늘 불안하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한계가 없는 영원하고 청정한 환경과 영원의 몸을 유지하여 지극히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행복하게 물러남이 없는 지혜의 광명을 자기화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신론』에 말하길, “이 사바세계에 머무름으로써 스스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몸소 받들고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고 하며 의식으로 물러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겠다. 여래에게는 탁월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신다. 이른바 뜻을 전일(專一)하게 하여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고 영원히 악도를 여읜다.

저 정토삼부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전일하게 염하고 수행한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왕생(往生)하기를 구한다면 곧 왕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으므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다.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의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정정취(正定聚)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똑같은 지능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균등성에 기인하여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쉬운 방편을 시설하시어 중생을 인도하신다. 불교 신행자는 수행의 기초부터 육체적인 쾌락보다는 정신적인 안정을 상위에 둔다.

이것이 아미타불께서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법장비구로 비구를 버리고 보살로, 보살을 버리고 부처를 추구한 결과이다. 어느 곳이든지 삶의 주체에 따라서 환경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지극히 즐겁고 안락한 극락세계이다.

이는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과 조재영겁의 수행에 의해서 선취되었다. 이를 믿고 그곳의 환경을 동경하면서 기억하여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곳에 나기를 바라면서 아미타부처님을 기억하여 찬탄만 하면 극락의 연못에 자기의 연꽃이 피어나 화생한다고 하였다.

이는 자기의 원력과 아미타불의 원력이 하나로 결합하여지고, 마음으로는 경전에 설해진 극락세계를 간절하게 관상하면서 입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찬탄하는 것은 수행자의 자력과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타력이 합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력과 타력은 둘이면서 하나인 불가분의 연기관계 속에 통일된다.

 

 

 

 
 

 


  

 

 

 

 

 


『아미타경(阿彌陀經)』⑩육체는 우주와 소통케 하는 수행 도구

인간은 삶의 주체로서 무한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만약 그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면 고통을 지각하여 다른 환경을 찾아 헤맨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자기’라는 삶의 주체에 관심을 기울인다. 자기라는 실상을 객관화해서 보면 여러 인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객체화된 진여임을 자각한다. 이 무한한 우주공간 중에서 지구라는 환경에 적응하여 행복해 보려고 하지만 제한되고 제약된 현상은 언제나 부조화를 낳는다.

왜냐하면 우리 중생은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지적능력과 현실상황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체계가 있는 이지적 사고활동으로 추리하고 분석해서 종합하여 판단해 보지만 언제나 해결하지 못하는 생활상의 문제들이 산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능력이 있고 능력을 발휘한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태어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오욕(五欲)을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해탈을 성취하신 진여(眞如)를 드러낸 분이시다. 그리고 석가부처님 이전까지 인간은 제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위대한 존재가 된다할지라도 삼계(三界)에 얽매인 존재이거나 피조물에 불과했다. 그러한 인간을 우주의 주인이자 완벽한 여래가 될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인류 스스로 만들어 섬기고 받들어 모시던 존재들(신들)의 스승도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렵고 희유(稀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미타경』에서는 석가부처님께서 육방의 모든 부처님들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한 것처럼 육방의 부처님들도 석가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하신다. 즉, “전쟁이나 질병·기아 등으로 혼탁한 사회적 환경이 열악한 시대가 흐리고, 범람하는 외도들 속에 개인적 자기 견해만이 옳다는 견해가 흐림, 삼독의 불이 활활 타는 듯한 번뇌가 흐림, 중생의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고통스런 환경이 많아져 인간의 자질이 저하된 중생이 흐림, 오욕에 매몰되어 물욕에 노예가 되어버린 중생들의 수명이 흐린 사바세계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최상의 완전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체 세간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진리의 말씀을 설하셨다”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또 석가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길, “마땅히 알아야할 것은 내가 오탁악세에서 6년의 온갖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으로 최상의 평등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 일체 세간의 사람들을 위하여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믿기 어려운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 믿기 어려운 일은 당연히 인간의 고통을 해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가르침을 따라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려 한다.

우리는 환경의 제약을 받기도 하지만 만들기도 한다. 물론 환경은 우리의 육체도 포함한다. 그런데 오감과 의식을 보유한 인간의 육체는 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이다. 그것은 무한한 우주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그 소통의 수단은 오감과 의식이다. 이 가운데 먼저 눈과 의식을 수단으로 개발하여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그대로 관찰하여 파악하고 나라는 존재를 분석해 본다. 그 결과 나와 환경이란 고정 불변한 존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지금도 미래에도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의 여러 요인들의 연기작용 속에 우주적인 진여(眞如)로 늘 변화하는 무제약적인 작용임도 파악한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태로 유한을 넘어선 무한의 기능을 인식한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기능 즉 육근(六根)을 개발하여 무한의 지력과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한 무한광명과 무한생명이 가능해진다. 이는 지혜의 작용인 자비의 실현으로 사바세계의 석가부처님과 극락세계의 아미타불 등이지만 진여의 본질에선 진리의 몸인 법신(法身)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부처님을 찬탄하신 우리가 궁극적으로 합체하여 일체화해야할 의의이다.

 


☞ 출처 : 법보신문 : http://www.beopbo.com/

 

능허스님 / 불설아미타경 

 

 

 


불교의 목적이 개별적으로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의 성취라고 할 때 현세와 내세를 관통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자타(自他)와 시공(時空)·미오(迷悟)의 구별이 사라진 불이(不二)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본래 텅 빈 연기이기에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독특한 특성이 사라지고 진여(眞如)의 작용만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법신(法身)이란 인격적 지혜의 작용이 자비로 나타난 보신과 화신이다.

이는 현세에서 근본 여리지(如理智)를 개발하여 여량지(如量智)를 체득할 때에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완성된 상태다. 이러한 완성을 위해 『금강경』에서는 일체 모든 존재는 하늘의 별, 눈병으로 생긴 허상, 바람 앞에 촛불, 마술사가 부리는 환술, 풀잎에 어린 아침이슬, 찰나적으로 기멸(起滅)하는 물거품·꿈·천둥·구름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이 현상의 실상을 올바로 관찰한 경지로 모든 장애를 벗어나 생로병사란 윤회의 바다를 벗어나 열반의 저 언덕에 휴식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내면적으로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련하게 열반에 안주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러한 기대로 최상으로 존귀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물러나지 않고 아래에서 중간으로, 중간에서 최상위로 올라가서 완전한 해탈의 열반과 최상의 깨달음을 실현한 진리의 몸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시공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이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애에 완벽한 스승과 이별하지 않고 진리의 가르침을 즐겁게 실천하고 모든 수행의 계위와 구경에 성불하는 공덕까지 완성하고서 영원히 평화로운 행복을 일체중생과 함께 누리고자 갈망한다. 이것을 『아미타경』에서는 육방의 부처님 혹은 모든 부처님께서 불가사의한 공덕을 칭찬하시고 항상 염두에 두고 보호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또 만약 훌륭한 여자나 남자가 이 가르침을 듣고 받아 지니거나 혹은 모든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들은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늘 염두에 두고 보호하시어 모두가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하신다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명호를 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가서 나기를 이미 발원하였거나 지금 발원하거나 혹은 미래에 발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위없는 최상의 완벽한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는 무공용(無功用)의 지위를 얻을 것이며, 저 극락국토에 이미 나거나 지금 나거나 혹은 장차 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돈독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저 극락국토에 가서 나기를 발원하면서 염불삼매를 실천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세에선 오탁악세(五濁惡世)란 한계적인 인간의 불안을 벗어나고, 내세엔 극락에 왕생하여 영원한 생명과 반야를 체득한 진리의 몸을 기대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신심과 수행에 대해서 『기신론』에서는, “먼저 우주 만물과 모든 수행의 근원이 되는 진여(眞如)를 믿을 뿐만 아니라 진여를 즐겨 염하고 관찰하라 하였고, 다음에 모든 부처님에겐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고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친근하고 공양하며 공경하면서 선근(善根)을 발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하고 모든 선근을 불러일으키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부처님이 체득한 진여의 공덕을 말한 가르침에 큰 이익이 있다고 믿고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훌륭한 스님은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기도 이롭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실천을 항상 믿어 즐기면서 모든 보살들을 친근하고 진여 실제의 수행을 배우길 구하라고 하였다.

즉, 우주의 본질인 진여(眞如)와 삼보(三寶)를 믿고 실천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세와 내세에 얻을 참다운 이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론 『아미타경』을 내포한 가르침이라 하겠다.

 


☞ 출처 : 법보신문 : http://www.beopbo.com/

 
  

 


 

 

 


『아미타경(阿彌陀經)』 ⑧염불은 무생법인 터득으로 가는 쉬운 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인 삶의 수레바퀴 속에 함몰되어 살아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렸을 적에는 꿈과 희망, 이상 속에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커다란 문명의 이기와 메커니즘(mechanism)의 일부로 전락하는가 하면, 참된 자아를 망각한 채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인생의 진실을 상실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무력함과 고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 삐걱거리는 인생의 여정을 굴러간다. 이러한 삶의 현실을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진단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최초 녹야원에서 설법하신 인생의 실상인 사제법과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힌 인연생기법이다. 이를 통합해서 설명해 본다.

먼저 자각이 없는 고뇌의 현실은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이고, 고통의 원인은 갈애(渴愛)와 망상의 집착(執着)인 인(因)·집(集)·생(生)·연(緣)이다. 이를 소멸한 열반의 상태가 멸(滅)·정(靜)·묘(妙)·리(離)이고, 이 열반으로 향해 가는 조화로운 도정이 도(道)·여(如)·행(行)·출(出)을 현관(現觀)하는 것이다.

또 인생의 고통스런 현실인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순역(順逆)으로 관(觀)하여 나고 죽는 윤회의 순환적인 고리를 끊는다. 이는 인생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무자성(無自性)한 연기공성(緣起空性)인 이치를 터득해서 지혜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근원은 허망한 생각에서 비롯한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인식이라는 텃밭에 씨앗을 발아하여 육체라는 존재가 자라나 육입(六入)의 주체를 구성하여 육경(六境)이라는 대상과 접촉하고 감수하는 연기에 의하여 육식(六識)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간취(看取)하여 애착하고 집착한 다른 존재의 터전을 잉태하면서 생사우비고뇌를 반복한다. 이는 일념이란 근본적인 무명의 바람이 불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따라가면 윤회의 세계요, 거슬러서 그 원인을 제거해 가면 혜해탈(慧解脫)의 열반에 도달한다. 이상은 부처님께서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실상을 진단하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신 내용이다.

이것은 불교의 수행관과 직결된 가르침이다. 즉, 부파불교에서 수행의 단계를 체계화시키면서 보다 세밀하게 연기법과 결부된 사제법을 현관(現觀)하도록 설명한 수행의 오위체계이다. 이를 약술하면 수행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단계인 자량위(資量位)에서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아 가일층 수행을 닦아가기 위해 사제(四諦)에 대한 개념적 이해의 가행위(加行位)를 현관하고, 나아가 사제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위해 무간도(無間道)와 해탈도(解脫道)의 견도위(見道位)를 닦으면서 88사(使)를 제거한다.

본격적인 경험적 사선정(四禪定)을 통해 10사(使)를 지멸(止滅)하는 수도위(修道位), 끝으로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삼계를 초월하여 완전한 열반을 구현하는 무학위(無學位)이다. 이는 또 대승의 52계위로 삼아 자력에 의한 3아승지백대겁이 걸리는 어려운 길이다.

이러한 전문적인 수행은 일반인이 닦아 완성하기엔 쉽지 않다. 그래서 수신행(隨信行)을 통한 심해탈(心解脫)의 방편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무한한 지혜의 광명과 자비의 무한생명이신 모든 부처님을 대표하는 아미타불을 의존하고 억념(憶念)하는 염불삼매를 닦게 한다. 이를 『아미타경』에서, “너희 중생들은 마땅히 불가사의한 공덕을 칭찬하시고, 모든 부처님이 보호하여 잊지 않는 이 경을 믿어라”라고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도록 진리의 말씀을 설하였다. 우리는 어려운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이 길이 원을 발한 지극한 마음으로 즐겁게 믿어 염불하면, 왕생하여 물러남이 없는 경지에 올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여 구경에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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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阿彌陀經)』 ⑦수행 바탕은 믿음…念·定으로 지혜 얻어

 

불교의 경전에 설해진 교설내용은 참으로 방대하다. 이러한 부처님의 설법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어느 경전이 우선한다는 개별적 판단을 유보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진리를 체득할 내용인 수행지침도 서로 연관되어져 있어서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면 숲 전체를 보지 못한 편협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속성과 능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전문수행자에게 설해진 수행의 요체는 자아에 대한 실상을 인지하여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온(蘊)·처(處)·계(界) 삼과(三科)를 현관(現觀)하여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를 경험적으로 체험해 나아가는 것이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념처관(四念處觀)이고 최상의 지혜를 얻는 방식이 사제관(四諦觀)과 십이연기관(十二緣起觀)이다. 이를 좀더 상세하게 전문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지침이 종합적인 수행법인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이다.

이러한 수행지침은 초기대승의 반야경에 종합되고 정토경전에도 전해졌다. 그러면 『아미타경』에 설해진 수행의 지침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아미타경』의 극락세계에서 설해지는 수행지침은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칠보리분(七菩提分)·팔정도(八正道) 등을 통해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모든 불교수행의 바탕이 되는 삼십칠보리분법의 일부이다.


이 37조도품(助道品)을 7그룹으로 종합하여 정리하면, 첫 번째, 사념처(四念處)는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하는데,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부정(不淨)·고(苦)·무상(無常)·무아(無我)라고 관하여 정(淨)·낙(樂)·상(常)·아(我)의 열반4덕을 체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정근(四正勤)은 사정단(四正斷)·사정승(四正勝)·사의단(四意斷)이라고 하는데, 이미 일어난 악을 끊으려 부지런히 노력하는 단단(斷斷),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율의단(律儀斷),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수호단(隨護斷),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증진토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수단(修斷) 등이다.

세 번째, 사신족(四神足)은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며 선정을 통해 신통을 얻기 위한 수행방법으로, 뛰어난 선정을 얻으려는 욕신족(欲神足), 끊임없이 선정을 얻으려는 정진신족(精進神足), 선정을 얻으려는 선의 마음인 심신족(心神足), 선정을 얻기 위한 마음의 관찰인 사유신족(思惟神足) 등이다.

네 번째, 오근(五根)이란 다섯 가지 능력인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 등의 힘을 배양하는 것이다. 즉 신근은 사불괴정(四不壞淨)을 닦아 깨끗한 믿음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정진근은 사정근(四正勤)을 수행정진하는 것이며, 염근은 사념처(四念處)에 전념하여 머무는 것이고, 정근은 사선(四禪)을 닦아 머무는 것이며, 혜근은 사성제(四聖諦)를 참답게 아는 것이다.

다섯 번째, 오력(五力)은 앞의 오근(五根)의 능력이 실체화된 상태를 말한다. 이상의 오근과 오력은 초학자의 기본적인 수행법이다. 여섯 번째, 칠각지(七覺支)는 칠보리분법이라고도 하는데 아라한향에서 닦는 성문 최후의 수행이다. 일곱 번째, 팔정도(八正道)는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하신 모든 불자의 수행할 내용을 종합한 수행지침이다.

이상의 일곱 그룹의 수행은 먼저 각각을 개별적으로 수행하기도 하고 오근과 오력에 결부시켜 종합적으로 수행하여 다지고 7각지로 지혜를 더욱 강화하면서 8정도를 시종일관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기본적인 수행의 바탕은 바로 믿음의 신근(信根)과 염근(念根)·정근(定根)의 수행으로 혜근(慧根)에 이른다.

이러한 내용의 수행지침이 극락세계에서 늘 항상 설해져 수행여건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극락정토에서는 물러남이 없는 수행을 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체득하여 아미타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완성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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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阿彌陀經)』 ⑥부처 본원과 중생 원 만날때 구제기연 성립

 

부처님께서 이 세계에 출현하신 것은 지혜와 자비의 나타남이다.
그 목적은 중생을 제도함에 있는데, 중생이 성불하는 근거가 중생에 있으면서 중생에 있지 않은 연유는 여기에 있다. 너무나도 널리 잘 알려진 부처님 말씀 중에,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대, 소승의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처됨의 본질이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열반경』에서 말한, “여래의 법신은 상주하며 불멸이다”라는 의미가 생생하여진다. 왜냐하면 사법인(四法印)의 현실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추구하여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본질이 진리가 될 때에 그 대립은 없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이론화된 영원한 ‘진리의 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이고, 진여(眞如)이며, 법신(法身)이고, 상주불멸하다고 여러 대승경전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상주불멸의 법신은 우리의 분별지로서는 인식될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무위(無爲)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그것은 불가득(不可得)의 무상(無相)이며, 불가설(不可說)의 무념(無念)이고 무심(無心)이다. 그러나 법신이란 방편의 모습으로써 중생에게 상주하고 불멸한 지혜의 내용을 보이고자 하는 자비의 미묘한 작용인 모습이 바로 석존이며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이시다.


인간은 존재라고 하는 시공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생활하면서 행동한다. 인간의 가치는 언제나 현재라고 하는 시대상을 통해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예를 들면 선악(善惡)과 미추(美醜)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다시 지금 나의 행동에서 분별되지만 나의 생활 속에서는 보수적인 의미의 가치체계가 형성된다. 이처럼 현재라는 시대상을 통해서 나의 행동은 바뀌고 경험적인 가치체계가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양태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오히려 부자유(不自由)를 초래하고 만다. 삼독번뇌를 떨쳐 버리려고 몸부림치면서 더욱 그 속에 침잠하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자유를 추구한 기연을 따라 쫓아서 가다 보면 거기에는 오히려 부자유란 올가미가 기다린다. 현재라는 시대상에 비치는 나의 생활은 무수한 가치의 엄습으로 인해 내적인 보수적 가치체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 사회 속에서 수용과 반발을 통해서 안온함을 추구하지만, 삼독번뇌 속에 안온함이란 애초에 없는 것임을 자각할 뿐이다.

거기에서 현실적인 불안과 좌절이 나타나 나의 괴로움이 엄습하여 형성되고, 그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할 때에 하나의 가치지향이 나타난다. 괴로움이 깊으면 깊을 수록 그것은 오로지 한가지만으로 응결된다. 이 때에 “구제의 기연”을 갈망한다.

부처님의 본질은 무한한 지혜와 자비에 있다. 부처님의 자비를 감수할 수 있는 기연은 현재라는 시대의 제한 속에서 삼독번뇌를 자각함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구제하겠다는 자비와 중생의 구제받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이 만남을 가질 때에 구제의 기연은 성립한다.

이 때의 자비의 근거는 원(願)으로서 표상된다. 이는 부처님께서 보살시절 인행시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발원하였으며, 그 원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불과를 이룬 것이다. 이것이 아미타불의 48원이다. 부처님의 원행(願行)은 자리이타(自利利他)와 자각각타(自覺覺他)를 원만하게 성취한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원을 본원 또는 숙원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본원과 중생의 원이 만남을 가질 때 비로소 구제의 기연은 성립한다. 이 때의 중생의 원이란 시공의 제약가운데에서 탐진치란 삼독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는 범부라는 자각이다. 중생이 스스로 자각하는 계기는 물론 부처님의 교법을 들음과 절대적인 믿음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아미타불의 본원이고 우리가 믿고 가야할 극락의 구제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구제의 기연을 갈구하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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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阿彌陀經)』 ⑤정토 믿고 실천할 때 부처와 나 차별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는 신앙(信仰)이 필요하다. 신앙이란 스승이 될만한 분의 가르침을 믿고 우러러 받들어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 스승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지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사실적이고 진실하며 진리에 부합한 것이어야만 한다. 만약 맹목적이거나 허구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하며 진리에 어긋난 것을 우리의 의식에 상정하여 믿는다면 위험천만한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진솔한 말과 진리에 상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검증으로 확인이 가능한 진실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검증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권위가 있는 선구자의 조언을 통하여 가능하다.

인류가 지구촌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자연과의 융화와 극복을 위해 소박하고 단순한 믿음으로부터 매우 차원 높은 교리체계를 갖춘 종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 원시종교에는 여러 동물이나 자연 현상을 숭배하는 토템(totem)이나 아니마(anima)·샤먼(shaman) 등의 신앙이 있다. 즉, 자기 씨족이나 부족의 혈연적 조상이 바로 동물이나 식물에 있다고 믿어 신성시하는 토테미즘(totemism),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신앙 형태인 애니미즘(animism), 이러한 종교적 힘을 이끌어 내어 유용하게 쓰는 주술적 신앙형태인 샤머니즘(shamanism)이 지금도 실현되고 있다.

또한 선민의식이 강한 부족이나 국가에서는 가장 강력한 유일신을 창안하여 민족신(民族神)으로 섬기는 천민(天民)사상이나 유일신교를 창조하여 배타적인 의식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외부적으로 때론 부족이나 국가간의 갈등과 반목을 낳아 종교의 역기능을 주저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는 통합의 기능을 가지면서도 정치에 있어서는 일치에서 분리로 대립과 융화를 인류역사에 내 놓았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이지(理智)와 욕구가 발달하여 수반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실용적인 삶의 자세에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인생의 목적에 체계성을 세워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모든 생명의 원초적 갈등과 차별은 세포막에서부터 생긴다고 한다. 이 생명은 언제나 무차별적인 혼돈과의 항거 속에 유지되는 갈등이며, 무질서 속에서 마구 일어나는 어떤 상태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인간의 바람이란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기적인 하향식 욕망과 이타적인 상향식 원력으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에 의해서 정화된 보살원력으로 승화된다. 이것이 불자의 의무이자 불교의 수행과 신앙이다. 인간이 추구해야할 참된 삶의 방식은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 즉 부처님의 자내증적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며 당신께서 이룩하신 열반의 세계인 정토이다.

그것은 바로 어느 한 곳에 정신을 집중시켜 시간을 증가시킴으로써 무한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염불이다. 나아가 예배·공양·참회·기도·참선·독경 등의 수행을 통해 자기를 무차별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신행(信行)을 하기 전에 부처와 내가 차별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믿고 실천하다 보니 부처와 내가 하나되고 모든 생명과 내가 하나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 생명과 내 생명이 본래 하나임을 감득(感得)한다.

즉, 우주의 영원한 생명과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가 바로 부처님께서 개발해 놓으신 극락정토세계이다. 이 곳은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룩된 세계이며 우리 불자가 믿음을 통한 염불수행에 의해서 가야할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믿고 극락왕생을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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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阿彌陀經)』 ④염불수행으로 아미타불 본원력에 상응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서로 호응하면서 협력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실천수행도 독자적일 수 없다. 즉, 우리의 신행을 돕는 우주적인 힘이 요청된다. 결국 우리의 수행은 우주적인 도움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이 무상(無常)의 자아를 깨달아 무아(無我)를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우주적인 힘을 먼저 결집하여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하신 부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신앙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보다 앞서서 우주생명과 하나 되신 부처님의 지혜광명과 중생구제의 자비(慈悲)에 호응하는 염불수행을 통해 아

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상응하는 것이다.

『불설아미타경』에서는 말한다. 극락세계와 그곳의 대중에 대한 설법을 들은 중생들은 거기에 태어나려는 서원을 굳게 세우고 가서 나기를 발원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 가면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조그마한 선근(善根)이나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가서 태어날 수 없고, 아미타불에 대한 설법을 듣고 그 명호(名號)를 굳게 지니어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나흘·닷새·엿새·이레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부처님께서 여러 성중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칠 때에 아미타부처님을 믿고 그 마음이 뒤바뀌지 않는다면 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에 왕생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서원 굳게 세우고 극락왕생 발원

여기서 ‘선근(善根)’이란 삼보(三寶)를 굳게 믿고 예배하고 찬탄하며 극락에 태어나고자 굳은 결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그 세계를 장엄한 공덕과 대중들을 항상 염하여 관찰한다.

그리고 일체중생과 함께 그곳에 태어나길 나의 수행공덕과 복덕을 회향하는 것이다. 나아가 늘 불·보살님들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기 업을 녹이는 참회를 하면서 살아간다. 또 ‘한결같은 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 생각에 끊이지 않고 염불하는 습관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쫓기어 달아나다가 강을 건널 때에 평소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훌쩍 건널 수 있는 것처럼 염불하는 생각에 오직 아미타부처님만 생각하면서 염불하는 것이다. 즉, 염불행자는 절실하고도 간절하게 가슴에 새겨 머리로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염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으로는 오계(五戒)와 팔재계(八齋戒)·십선(十善)을 행하면서 부처님과 보살님께 예배하고 참회하는 것이요, 입으로는 부처님의 경전을 수지독송하며 찬탄염불하는 것이요, 뜻으로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고 항상 늘 부처님의 상호의 덕과 능력을 믿고 생각하여 잊지 않고 공경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종합한 실천이 바로 절하며 염불하는 수행이다. 절하며 염불하는 수행이란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하여 일어난 육식(六識)을 쉬는 것이다.

머리 아닌 가슴으로 염불해야

그리하여 무심(無心)하게 무념(無念)으로 오직 아미타부처님만을 향하면서 일행(一行)·무상(無相)·반주(般舟) 등의 삼매에 들어간다.

그렇게 1일 내지 7일을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일심전념(一心專念)하면 염불하는 가운데 아미타부처님께서 앞에 나타나시거나 혹은 꿈속에 나타나시어 광명을 비추거나 설법해 주시거나 이마를 만지시며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집착하거나 교만을 부리는 마음을 갖지 말고 끊임없이 수행에 가다보면 물러남이 없는 수행의 힘을 얻어 극락에 왕생한다. 이것이 극락에 왕생하여 속히 성불할 수 있는 지름길인 염불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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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염불 미타찬 

 


 

 

 

 

『아미타경(阿彌陀經)』 ③법성진여 몰라 무명의 부림 받는 자가 중생

본래로 모든 존재는 원래 텅 빔이기에 그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무자성(無自性)의 우주적인 존재임을 개현(開顯)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연기의 진리이다. 나아가 존재의 모든 가능성 중에 그 근저에 부처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진여(眞如)의 발현이다. 이것이 석존께서 깨달으신 내용이고, 우리의 궁극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깨달을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이나 어떠한 사물도 홀로 독존할 수 없고 여러 인연이 모여서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단독자가 될 수 없고, 모든 관계 속에 법성진여가 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발견하여 자기화 하는 자가 부처요, 밝게 알지 못하고 무명의 부림을 받는 자가 중생이라고 한다.

우주의 어느 곳이든 삶의 주체가 있고, 그 주체가 의존해서 살아가는 환경인 시공이 존재한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현실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바로 무한한 생명력으로 보다 안락하고 행복하게 영원히 사는 것이다. 모든 우주 공간에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무한한 공간 가운데 극락세계는 이 사바세계의 1겁이 단 하루라고 하였다.

그래서 극락세계의 교주를 아미타불이라고 하여 무한한 지혜의 광명과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지겁의 생명력을 갖춘 부처님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저 극락세계에 사는 중생들 역시 마찬가지로 수명이 무량하다고 한다.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지는 10겁이 지났다고 하였다.


저 극락세계에는 수행을 방해하는 여인이 없고 육체의 결함도 없는 모두 아라한과를 이룬 성문과 보살대중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수한 대중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저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모두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에서 물러남이 없는 청정한 믿음을 성취하였고,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이른 수많은 보살들도 존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저 극락세계는 청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든 불·보살은 원만한 덕과 한결같은 수행력과 순수하고 청정한 덕을 갖추었고, 대중들은 물러남이 없는 결정된 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왕생게』에 말하길, 극락세계는 “일법구(一法句)란 청정구(淸淨句)이며, 청정구란 이른바 진실한 지혜와 무위의 법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구(句)란 계(界)이며 세계를 의미하고 근본무명을 타파한 대지혜광명의 진여본체에 안주한 아미타불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극락세계의 교주이신 아미타불은 진여실상의 세계에 머물러 시공을 초월해 생멸변천하는 일이 없는 영생의 덕을 갖춘 영원함,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의 안락한 덕을 갖춘 즐거움, 허망한 집착에 빠진 나라는 의식을 여의어 대자재해탈의 덕을 갖춘 참 나, 오염된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청정한 덕을 갖춘 본래청정 등의 사덕을 갖춘 분이시다.

그러므로 저 극락세계에 사는 모든 대중들은 아미타불의 지혜광명에 가피(加被)되어 무상(無相)을 깨닫고, 무한한 생명의 자비에 가지(加持)되어 무생(無生)을 성취하여 동명동호로 섭수(攝受)된다.

이와 같은 극락은 부처님과 보살 등이 정업을 닦아서 청정 그대로 된 세계의 본체이다. 그 극락에서 수용하는 장엄은 정토의 작용이다. 즉, 진여의 본체와 작용은 동일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기세간과 중생세간의 조화로운 모습이다.

다시 말해 기세간의 청정은 그 곳에 사는 아미타불의 과보로서 장엄한 복락의 작용이요, 중생세간의 청정은 그 곳의 부처님과 왕생한 보살과 여러 대중의 어우러짐이다. 또 중생세간의 청정이 형상을 이룬 본체라면 기세간의 청정은 그 중생의 본체로부터 나타난 작용이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이 청정하려면 사는 주체들이 청정해야 하듯이 극락세계는 삶의 주체들이 청정하다. 그래서 우리는 극락왕생을 발원한다.

 

 

 

 

 
 

 

 

『아미타경(阿彌陀經)』 ②부처님 청정음 들으면 無生法印 깨달아

인간은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지향해 가려는 꿈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환경을 설계한다. 인간이 지금 사는 이 사바세계는 참고 견디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세계이다. 설사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무엇을 이룬다할지라도 완전한 행복의 조건을 이룰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인간은 청정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 무상한 현실 속에서 싫은 조건이라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원하고 즐거우며 참 나이고 청정한 환경을 바란다. 하지만 오탁(五濁)의 악세(惡世)로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불안한 요소가 늘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아주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맞이하려고 준비해 둔 분이 계시다. 한 나라의 왕이자 법장비구이며 법장보살이었던 아미타부처님께서는 5겁의 사유를 통해 48대원을 설계하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조재영겁의 세월동안 온갖 바라밀의 수행을 통하여 극락세계를 완성하셨다.

『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는 여기서 10만억 국토를 지나는 곳에 있으며, 지금도 설법하고 계시며, 완벽한 행복의 조건을 완비하여 누구나 그곳에 이르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곳은 항상 중생들이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만 있기에 극락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곱 겹으로 구성된 난간과 그물과 가로수가 네 가지 보배로 장식되어 있고, 나아가 극락의 뛰어난 모습은 칠보와 팔공덕수로 이루어진 연못 바닥에는 금모래가 깔려 있고 연못 둘레의 계단은 금, 은, 유리, 파려로 장식되었으며, 그 위의 누각은 금과 은·유리·파려·자거·적진주·마노 등으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연못 속에 수레바퀴 만한 연꽃이 피어 있어서 청련에서는 푸른 광채가, 황련에서는 누런 광채가, 홍련에서는 붉은 광채가, 백련에서는 흰 광채가 나고 미묘한 향기가 풍기어 향기롭고 청결하다고 하였다.

또 저 극락국토는 항상 천상의 음악이 연주되고, 대지는 황금으로 이루어졌으며, 밤낮으로 여섯 번 만다라꽃비가 내리고, 중생들은 항상 이른 아침마다 시방세계의 10만 억 국토를 다니면서 조반 전에 공양을 올리고 식사하고 산책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아름답고 기묘한 새들이 있는데 백학, 공작, 앵무새, 사리새, 가릉빈가, 공명조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화평하고 맑은 소리로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보리분(七菩提分), 팔정도(八正道) 등을 노래하는데, 대중들은 이 소리를 듣고 나서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가르침을 생각하며, 스님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러한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께서 법문을 베풀고자 화현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미풍이 불면 모든 보석으로 장식된 가로수와 그물에서 미묘한 소리가 나는데 그것은 마치 백 천 가지 악기가 합주되는 듯하며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모두 삼보(三寶)를 생각할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하였다.

극락세계는 이러한 의보(依報)의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졌기에 그곳에 왕생하는 자는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에서 물러남이 없는 지위에 올라 속히 불과(佛果)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원효성사는 『불설아미타경소』에서 이 경은 석가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대의(大意)이며, 사부대중을 불도(佛道)로 이끄는 긴요한 문이며, 정토는 원(願)할만한 곳이고, 묘덕(妙德)을 찬탄해서 돌아갈 만한 곳이며, 귀로 경의 명칭을 듣고 일승(一乘)에 들어가고, 입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서 삼계를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의 광명을 보면 무상(無相)의 경지에 들어가고, 청정한 음향을 들으면 무생(無生)의 법인(法印)을 깨닫는다고 하였다. 나아가 한 걸음도 걷지 않고서도 시방세계에 노닐 수 있고, 한 생각도 하지 않아도 끝없는 세계에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다.

 


☞ 출처 : 법보신문 : http://www.beopbo.com/


 

 


 

 

 

『아미타경(阿彌陀經)』 ①반야광명을 몸으로 해서 행복 누리는 경전

불교란 깨달음의 내용과 깨닫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깨달음이란 텅 빈 마음, 집착 없는 마음, 머물지 않는 마음, 열린 마음의 실현이다.

이는 본래의 중생심(衆生心)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진여심(眞如心)·불성(佛性)을 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텅 빈 마음의 스승을 찾아야 한다. 텅 빈 마음의 스승은 바로 우리에게 늘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경전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과의 대면이다.

『아미타경』은 갖추어 말하면 『불설아미타경』이다. 불설(佛說)이란 부처님의 금구(金口)에서 나온 말씀이며 천대 만대에도 나올 수 없는 진귀한 가르침을 뜻하고, 아미타(阿彌陀, amita)란 한량없다는 뜻으로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참다운 덕을 모두 간직한 만겁에도 소멸하지 않는 존호를 의미하고, 경(經, stra)은 진리의 말씀이란 뜻이다.

그리고 『불설아미타경』은 무문자설(無問自說)로 경전의 명칭에 설하는 주체와 설해진 내용을 포함하여 경전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이러한 『아미타경』은 세 가지 한역이 있었는데, 한 가지는 유실되고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일상으로 접하는 『아미타경』은 바로 구마라집삼장께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면 『아미타경』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본 경전은 정토삼부경 중에 신앙의 바탕이 되는 아주 짧은 경전이다. 하지만 정토신앙의 중요한 내용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먼저 극락정토의 구조와 함께 극락세계의 구성원을 설명하고, 다음에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신행(信行)의 내용을 설한다. 그리고 염불함으로써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중생을 위해서 육방의 여러 부처님께서 증명하는 것을 설하고, 아울러 염불의 이익에 대하여 설한다.

우리는 연기(緣起)의 실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연기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살아갈 수 있고, 우리는 부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부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으며, 우리는 진리 속에 살면서도 진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라는 에고의식 또는 분별의식 속에 매몰되어 모든 욕망과 분노·어리석음의 노예가 되어 안개 낀 망상과 망각의 강을 건너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욕망은 본래 나타나면서 사라져 가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분별의식을 모아 모아서 애초에 텅 빈 존재로 연기하기 때문에 텅 비었다는 진실 속에 던져 버리고 본래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으며 머묾이 없다는 반야(般若)를 실현하여 완전한 행복인 최상의 궁극적 깨달음을 완성하는 신행(信行)의 지침을 발견한다.

불교에서 믿고 실천하는 목적은 최상의 완벽한 깨달음을 성취하여 완전한 행복을 갖추는 것이다. 즉,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인연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불교를 믿고 실천하는 데도 마찬가지이다. 즉, 불교에서 말해지는 신행(信行)의 지침은 8만4천의 수많은 방편으로 성취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더구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자력으로만 금생에 완성하고자하면 어렵고 힘들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께선 말세의 오탁악세에서 만인을 위한 만인의 방편으로 부처님의 위대한 본원력(本願力)과 거룩한 위신력(威神力)에 의존하여 성취되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래서 『아미타경』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편승하여 그분의 존호(尊號)를 찬탄하면서 예

배하고 관찰하면 영원한 생명과 반야의 광명을 몸으로 한 영원생명이 되어 완전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경전이다.

법상 스님 구리 관음정사 주지


☞ 출처 : 법보신문 : 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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