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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자성정토와 서방정토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8.06.28|조회수23 목록 댓글 0

질문: 어느 사형이 말하길, 정토세계는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서방정토이고, 또 하나는 자성정토라고 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있습니까? 서방 아미타불과 자성미타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                       


 두 부류의 정토


  우선 이러한 주장은 있지만 표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정토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해야지 ‘두 개’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첫 번째 부류는 ‘제불정토諸佛淨土’ 혹은 ‘타방정토他方淨土’라 부를 수 있습니다.


◎ 또 다른 한 부류는 ‘자성정토自性淨土’입니다.


  자성정토는 하나하나 중생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중생을 본위로 삼는 대립 면에서 제불정토를 설한 것입니다.


  또한 자성정토는 왕생을 구하지 않습니다. 바깥에 있는 것을 타방정토라 부르기 때문에 두 가지 대립니다.


 【자성정토】


  우리는 자성정토를 제창하는 데는 두 가지 다른 주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소수 선을 닦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불법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고 단지 선의 입장에 서서 정토종을 반대하며 “자성이 곧 정토인데 구태여 서방정토의 왕생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분열이 되어 원만하지가 않습니다. 비록 선을 배우고 있지만 아직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편견이 생긴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일부 선종 또는 천태종의 대덕들로서, 그분들은 당연히 자성정토를 아십니다. 따라서 설사 선을 배우고 천태를 배우더라도 통달한 사람이라면 자성정토를 서방정토로 이끌어 들입니다.


  우익대사님과 같은 경우에도 자성이 곧 정토라면 왜 서방극락세계의 왕생을 구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에 비록 정토가 있다지만 수행을 통해 드러내지 않으면 여전히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럼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자성은 본래 모든 곳에 편만해 있기에 서방정토가 비록 십만억 불국토 밖에 있다지만 본래 자성을 여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서방정토 왕생을 구한다고 해서 결코 자성정토를 여의는 것도 아닌데 왜 왕생을 구하지 않습니까? 이 역시 매우 슬기롭게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왕생시키려는 것입니다.


 【시방정토】


  덧붙여 설명 드리자면 타방정토에는 단지 서방정토만 있는 게 아니라 시방에 모두 정토가 있습니다.


『아미타경』에서 육방에 계신 항하사 제불들이 광장설상을 보이셨는데 이 모두 정토입니다. 이런 정토들은 모두 한 부류, 제불정토에 속합니다. 제불정토는 제불이 인지因地에서 보살이였을 때 발원하고 수행하여 과상果上에서 성불하여 감득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보토도 부처님께서 인지에서 만덕을 닦아 원만하고 청정한 과보토를 감득한 것이지요.


  자성정토에는 이러한 특색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자성정토는 단지 우리의 본성·자성·불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치로부터 법신경계의 근원적인 면에서 본성이 청정하면 곧 정토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이론상으론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심오하긴 하나 실속이 없습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모두 자성정토가 있고 모두 자성미타가 있지만 반드시 진여실상의 이치를 깨닫고 법성에 수순하여 만덕장엄을 닦아서 복과 지혜를 원만히 구족해야만 제불의 과보와 같은 그런 정토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하나의 개념을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불문에는 성덕性德과 수덕修德이 있습니다.


  ‘성덕’이란 곧 당신의 본성 가운데 이러한 잠재력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지만, 이런 성덕은 반드시 수행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예컨대 이 나무의 경우, 나무의 본성에는 불의 성질이 있지만 이 나무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불이 나올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 중생에게도 불성이 있지만 육도만행과 보리심·보리행을 통해 여실하게 제법실상을 닦고 이렇게 복과 지혜를 함께 닦지 않으면 어떻게 원만한 부처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청정한 정토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론상으로 말만 해선 안 되고 반드시 구체적인 수행이 있어야 합니다.


  자성정토는 이론을 말하는 측면이 많고, 제불정토는 이론을 말하는 동시에 역겁의 수행 증득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성덕은 수덕을 통해 나타내야만 수덕이 비로소 완전하게 성덕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차이】


① 양자 사이의 차이


◇ 자성정토는 순수하게 자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순전히 이론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서방정토를 말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력과 불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또한 성덕과 수덕의 차이도 있다


◇ 자성정토는 성덕이고,


◇ 제불정토는, 특히 서방정토는 수덕입니다.


③ 또한 인지와 과지의 차이가 있다


◇ 자성정토·자성미타를 말하는 것은 단지 시작단계인 인지에 있는 것이어서, 과상으로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 제불정토는 다릅니다. 과상에서도 이미 나타났습니다.


④ 그밖에 또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다


◇ 철저하게 자성정토를 증득하기란 대단히 어려워서 아직 삼대아승지겁의 수행이 남아있습니다.


◇ 만일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면 자신의 마음도 철저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쉽기 때문에 서방정토에 왕생만 하면 자성정토를 증득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성불을 한다면 자신의 본성에 본래 갖춰져 있던 정토도 원만히 드러날 것입니다.


  만일 단지 여기서 자성정토만 외치다간 맨 마지막에 여전히 육도윤회를 해야 하고, 당신은 자성정토를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은 자성지옥·자성삼악도를 나타낼 수 있는데, 이는 수덕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토종의 관념】


  정토종의 관념에는 자성정토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선도대사께서 『관경소』의 제8관인 상관像觀 중에서 특별히 ‘마음이 부처를 짓고, 마음이 곧 부처다(是心作佛,是心是佛)’는 이 경문에 대해 해석하셨습니다.


  만일 자력수행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의 뜻을 통달하지 못했다면 왕왕 이 구절을 가지고 자성정토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선도대사님께서 이를 반박하신 것입니다. 대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혹 어떤 수행자들이 이 단락의 뜻을 가지고 유식법신에 대한 관법, 또는 자성청정불성으로 관하는데, 그 뜻은 대단히 잘못되어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


  즉, 이 경문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를 짓고 마음이 곧 부처다’를 ‘내 자성이 곧 부처이고 자성이 곧 미타이며 자성이 곧 정토인데, 내가 왜 서방에 왕생해야 하는가?’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부처님의 뜻을 곡해한 것입니다. 


  “이미 상상想像이라며 임시방편으로 32상을 세운 이상, 진여법계신真如法界身에 어찌 상이 있어 반연할 수 있고 몸이 있어 취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자성청정불성·자성정토 등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정토의 장엄이라든가 아미타불의 상관像觀에 32상을 세워야 하는데, ‘진여법계’는 자성의 경계로서 어떻게 상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형상이 없고 취할 수 있는 몸도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그러나 법신은 색이 없어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 더욱 비유로 들 수 있는 유사한 사물이 없기 때문에 허공을 취하여 법신의 본체를 비유한 것이다” 만일 허공을 말하고 자성미타·자성정토를 말하려 했다면 이런 형상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 관문 등에서는 단지 방향을 지목하고 형상을 내세워 마음을 거기에 머물게 하여 상을 취하라는 것일 뿐, 줄곧 상이 없고 생각을 여의어야 한다고 밝히지 않았다” 정토법문에서 극락정토를 관상하는 여러 가지 장엄들은 반드시 우리가 마음을 머물게 하여 경계를 취하라는 것이지, 결코 “자성정토인데 왜 서방정토에 왕생해야 하는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경계를 취한다’는 것은 곧 서방의 경계를 취한다는 뜻이고,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별한 선택대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성정토·자성미타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자성정토·자성미타는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대상경계를 취하지 않으므로 상이 없고 생각을 여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차이를 말한다면 이것 역시 차이입니다.


◎ 서방정토는 상이 있습니다 ―― ‘상을 취함’


◎ 자성정토·자성미타를 말하는 것은 상이 없고 생각을 여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염념마다 염불을 하지만, 그것은 염하지 말라는 것이고 염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래께서 미리 오탁악세의 죄업범부들이 상을 세우고 거기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상을 떠나 이 일을 구한다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일찌감치 말법시대에 죄업이 두터운 범부들에게 설사 명확한 형상을 제시하며 “부처님의 32상이 어떻고, 부처님의 정토장엄이 어떠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더러 마음을 거기에 안주시키라고 해도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데 하물며 상을 떠나서 구하는 일이겠습니까? 당신이 “모든 게 상이 없다(一切無相)”고 말하지만 마음은 이른바 “진여실상을 마음에 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을 떠나 다시 왕생의 일·성불의 일·정토의 일을 구한다는 것은 더욱 그의 경계가 아닙니다. 


  “마치 신통이 없는 사람이 허공에 머물면서 집을 지으려는 것과 같음을 알고 계셨다”, 만일 상을 떠나 구하려 한다면 이는 무엇과 같을까요? 마치 신통력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이 공중에다 집을 한 채 지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중에다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땅에 의지해야 합니다. 땅은 유를 상징하고 허공은 공을 상징합니다. 정토의 경계는 본래 자성에 의거하므로 공성이고 적멸寂滅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입니다. 그러나 법성을 방해하지 않아 법성에 수순하여 닦아야 하므로 유를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관경소』를 배울 때 다시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로지 서방미타를 불러야 자성미타를 깨울 수 있고 오직 서방정토에 왕생해야만 자성정토를 장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큰소리쳐서 자신의 큰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이치를 모르더라도 이런 용어들을 만지작거리지 말고 노실하게 서방정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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