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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憨山大師 淨土法門(감산대사 정토법문 )』 [서언(序言)]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8.12.12|조회수18 목록 댓글 0

    
                          [서언(序言)]
    
    
    삼장(三藏)의 모든 가르침이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애착심을 끊게 하는 방편이다. 
    공 (空)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끊도록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有)를 가르치셨고, 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에서 벗어나도록 공을 가르치셨다. 
    공과 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그 집착을 깨도록 비공비유(非空非有)를 가르치셨다. 
    끝으로 비공비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끊도록 공과 유를 가르치셨다.
    
        요컨대, 그 목적은 모든 중생들을 애착심에서 해방시키는데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제도 법문이다. 비록 다른 많은 방편들이 있지만, 이 외에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다. 우리 불자들은 이러한 방법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속에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가리는 생각이 떠오를 때, 이것이야 말로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고, 불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공법(空法)을 가르치셨을 때, 부처님이 뜻하신 바는 유(有)의 반대로서의 공이 아니라, 진실과 실제 이었다. 무엇이 진실과 실제인가? 천태(天台)지자(智者)조사의 말씀을 인용해 보자: “공 (空)이 존재할 때, 모는 것이 공이고, 공과 분리된 비공 (非空)은 없다. 공과 대비되는 비공이 없을 때, 공 또한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유(有)를 가르치셨을 때, 이는 공과 대비되는 유가 아니다. 오히려 “유가 존재할 때, 모든 것이 유이고, 유와 분리된 비유 (非有)는 없다. 유와 대비되는 비유가 없을 때, 유 또한 얻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들은 공과 유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이 공과 유에 관하여 말하는 어떠한 것도 타당하지 않다. 이러할 진데, 왜 우리가 이들에 집착해야 하는가? 위대한 스님이신 감산대사는 모든 부처님이 목적하신 바를 투철하게 이해하셨다. 조사들의 마음과 일치하여, 대사는 공도 유도 취하지 않고, 비공과 비유도 취하지 않고, 그리하여 중도(中道)의 길을 보이며 불법을 전파하셨다. 이리 함으로서, 그분은 선과 정토를 같이 닦는 것을 권장하셨고, 공과 유가 다르지 않음을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이 경이로운 깨달음 (妙覺, Wonderful Enlightenment )이다. 선수행의 시작 단계에서 공의 방편이 이용된다. 그러나 선은 공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토수행을 시작할 때 유의 방편을 이용하지만, 그러나 정토는 유도 무도 의미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공과 유를 말씀하셨을 때, 이는 근기가 다른 중생들에 다가가기 위함 이었다. 불법 그 자체로서는 공과 유를 초월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모든 법문은 약방문(藥方文)과 같다. 사람들이 각기 다른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다른 약방문이 필요한 것이다. 약이 비싸거나 싸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병만 치료하면 좋은 약인 것이다. 선이나 정토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든 불법은 평등하여 더 우월하거나 열등함이 없다,”는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불법의 깊은 뜻을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우열을 가리는 그러한 완고한 편견을 결코 가질 수 없다. 그러한 완고한 편견을 가진 사람은 불법에서 아무런 혜택도 입을 수 없다. 예로서, 선종의 스승들은 화두(話頭)를 참구하라고 가르친다. 화두는 “말 이전”, 즉 마음속에 한 생각이 떠오르기 이전을 의미한다. 한 생각이 떠오르기 전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무심(無心) 이다. 무심이야 말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고, 불성이고, 본래면목( 本來面目)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그것을 외우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화두를 외우는 것은 또한 커다란 망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본래 면목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화두의 목적이다. 정토종에서는 염불, 즉 부처님 명호를 반복해 외우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마치 앵무새가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듯이 단지 입으로만 외우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마음에 초점을 맞춘 염불이야 말로 참된 염불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셨듯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이가 없고 평등하다.”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 부처가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이다. 만일 수행자가 부처님 명호를 이와 같이 외워 나가면, 점차 주체로서의 마음과 객체로서의 부처가 사라지는 경계에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외우는 주체도 대상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경계이다. 이것이 곧 화두요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만일 수행자가 불법이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게 함을 이해한다면, 선과 정토에 어떠한 차별을 두겠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꽃을 들어 올리자 가섭 장로가 웃은 후, 선종에서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가르침[삼장(三藏)] 밖에서(不立文字 敎外別傳)”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조사에서 조사로 승계하는 전통이 되어왔었다. 보리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후로 육조 혜능까지 끊임없이 승계되었다. 그 후의 세대에서는 각 조사가 자기 고유의 방법으로 제자들과 신도들을 지도했다.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印可)하거나 화두를 참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사람들은 또한 본래면목을 찾아,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무(無)”자 한 글자나 1700 공안(公案)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참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들의 유일한 목적은 수행자로 하여금 몸부터 마음까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모든 망상들을 없애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다. 만일 수행자가 이러한 뜻을 모르고 단지 화두를 외우거나 공안을 참구한다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께서 질문을 받지 않고 설하신 정토법은 그 분의 위대한 자비심을 나타낸다. 극락세계의 장엄한 경계와 아름다움은 아미타경에 잘 설해져있다. 시방 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이 정토법을 칭찬하셨고, 많은 보살과 조사들이 이 법을 수행했다. 예로서 위대한 보살들인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두 정토법을 옹호하고 수행했다. 옛날 인도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 조사들인 아스바고사(Asvaghosa), 나가르주나(Nagarjuna) 및 바수반두(Vasubandhu )등이 모두 정토의 가르침들을 장려하였다. 불법이 중국에 전파된 이래, 수많은 선승과 위대한 조사들이 정토를 권장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신 경이로운 정토법이 얼마나 완벽하고 숭고한 법인가! 반면에 우리는 단지 미망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에 불과하다. 이러함에도, 이법을 내려 보는 거만하고 건방진 사람들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화엄경에 53 선지식들을 찾아 여행길에 오른 선재동자에 관한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선재동자가 처음 만난 덕운 비구가 이 귀중한 정토법을 소개했다. 그로부터 선재동자는 마지막으로 53번째 선지식인 위대한 보현보살을 만날 때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이 보현보살도 또한 경이로운 정토법을 가르쳤다. 따라서 이 말세의 수행자들에게 정토법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 법의 수행을 될 수록 빨리 시작해야 한다. 요컨대, 선과 정토는 서로 보완한다. 과거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 법들에 의지하고, 수행하여 성불하셨다.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도 마찬가지로 이 법들에 의지하여 수행하고 성불한다.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마찬가지다. 이 두 법은 다른 많은 경들도 있지만, 특히 화엄경, 법화경 그리고 능엄경 에서 사람들에게 공부하고 수행하도록 간곡히 설해져 있다. Master Lok To New York: May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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