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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第十 (정토를 장엄하다)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2.05.03|조회수3 목록 댓글 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第十 (정토를 장엄하다)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然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기를, 『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불(燃燈佛)1)이 계시는 곳에서 법을 얻은 적이 있느냐?』『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燃燈佛)이 계시는 곳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수보리야, 네 생각에 어떠하냐. 보살들이 불국토(佛國土)를 장엄하느냐?』『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은 장엄이 아니므로 장엄이라 이름하나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꼭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색(色)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고, 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하느니라. 아무데도 머무는 바 없으면 그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느니라.』『수보리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須彌山)2)왕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지 않겠느냐?』『엄청나게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오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님(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비신)을 큰 몸이라 이름합니다.』


해설(解說)

제 9장에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게 각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은 바 있느냐고 묻고 그 대답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얻은 바가 있다는 것은 구하는 바가 있었다는 뜻이고, 구하는 바가 있으면 법과 자기, 즉 능소(能所)가 나누어지고, 능소(能所)가 나누어지는 모습은 일상(一相)의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보리에게 여래도 얻은 바가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然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연등불(燃燈佛)은 이 석가모니불게 수기(授記)한 스승입니다. 때문에 수보리에게 묻기를 「옛적에 저 스승께서 나에게 수기(授記)를 주셨는데 스승의 처소에서 내가 법(法)을 가히 얻은 바 있느냐 없느냐」고 했습니다.

이미 성문(聲聞)의 취(取)함 없는 것을 밝혀서 마치고, 장차 보살도 또한 취(取)함 없는 것을 나타내려하여 자기의 인지(因地) 위에서 스승도 또한 말이 없고 자기도 들음이 없음을 먼저 드니 공생(空生)이 부처님께서 무득(無得)을 밝히심을 알고 능히 얻음이 없는 것으로써 답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소득(所得)이 없다 말했느냐? 자취로써 의논하면, 석가(釋迦)가 저때에 연등불(燃燈佛)의 설하신 법요(法要)를 들음으로 인해서 정각(正覺)을 이루었으니, 어찌 이 얻음이 없을 것입니까? 그러나 이는 다만 인연을 가차(假借)해 도(道)를 봄으로써 득(得)을 삼는 것입니다. 실(實)로써 말을 하면 석가(釋迦)는 본래 천상천하(天上天下)에 모든 법을 깨달으신 사람이어서 그 위(位)가 제불(諸佛)을 지나며 부(富)가 만덕(萬德)에 두었으니, 어찌 일찍 남의 점안(點眼)을 받으며 어찌 법(法)이 있어 다시 얻음을 용납할 것입니까? 때문에 말하기를 「연등(燃燈)의 기(記)를 얻었다 이를진대 어찌 이 옛 몸임을 알 것입니까」했습니다.

안으로 근신(根身)과 밖으로 기계(器界)가 다 이 청정한 지혜의 경계며 낱낱이 무위(無爲) 불토(佛土)니라. 어떠한 것이 장엄(莊嚴)입니까? 정(情)을 잊으면 소(疎)와 친(親)이 없고, 견(見)이 다하면 안과 밖이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비장엄(非莊嚴)입니까? 정(情)과 견(見)을 잊은 곳에 자취를 두지 않으면 부처를 보며 조사를 보느니라.

不也 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수보리가 곧 말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의 처소에 계실 적에 연등불께서 법(法)을 설하셨으나 그 법(法)에서 세존께서 얻으신 바는 실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의 자성(自性)이 본래 청정해서 진로(塵勞)가 본래 없으며 적적해 스스로 성불(成佛)하신 것입니다. 세존이 연등불의 곳에 있을 때 법(法)을 실제로 얻은 바가 없습니다. 「여래법자(如來法者)」는 일광(日光)의 명조(明照)에 가가 없음과 같아서 가히 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수기는 일광명조와 같아서 전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은 연등불의 시(時)에도 이미 어떠한 법에도 걸림이 없이 보고 듣고 해결할 수 있는 무유법(無有法)을 통달하시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의 위(位)에 계셨으니 연등불(燃燈佛)과도 법을 설하고 설함을 듣는 사제(師弟)의 관계가 아니고 수기를 주고 수기를 받는 능소(能所)의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둘이 아닌 사제불이(師弟不二), 행하는 자와 받는 자가 둘이 아닌 능소불이(能所不二)에 있었습니다. 이미 구하는 바가 없으니 탐착해서 생기는 소득이 없고, 구하는 바 없이 일어나는 소득이니 실로 소득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탐착해서 얻는 소득이 아니다).

이제 부처님께서 보살에게 소득이 있는지 수보리에게 묻는다.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보살이 불토(佛土)를 장엄하는지 않는지를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佛土)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이름을 장엄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불토(佛土)는 청정하여 상(相)도 없고 형(形)도 없으니 무슨 물건으로 능히 장엄할 것인가? 오직 정(定)과 혜(慧)의 보(寶)로써 거짓 이름으로 장엄한 것입니다.

장엄(莊嚴)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世間)의 불토(佛土)를 장엄하는 것으로 절을 짓고 경(經)을 쓰며 보시 공양하는 것이요, 둘째는 몸의 불토(佛土)를 장엄하는 것으로 일체의 사람을 보고 널리 공경을 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의 불토(佛土)를 장엄하는 것으로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토(佛土)가 청정하므로 염념(念念)이 얻는 것이 없는[무득(無得)] 마음을 항상 행하는 것입니다.

비록 연등불의 불(佛)을 이었다 말하나, 전한 것이 무엇이며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불토(佛土)를 장엄하였다 하나 장엄한 곳은(所) 무슨 땅이며 장엄한 이는(能) 어떤 사람입니까? 능(能)과 소(所)가 이미 없으니 마음은 반드시 주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이미 주함이 없으면 모든 망(妄)이 녹아 없어지고, 망(妄)이 이미 녹아 없어지면 일진(一眞)이 나타납니다. 옛적에 법화(法華)의 묘지(妙旨)를 궁구 하다가 효험을 감득해 실(實)에 계합해서 곧 심(心)과 법(法)이 모두 없고 근진(根塵)이 다 없으니 또 말해 보십시요. 장엄이 무엇인가? 한 번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법(法)이 원만하지 않음이 없으며, 한 찰나 사이에 죄가 멸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장엄 정토의 일이 이 같으니 실상(實相)으로 더불어 위배(違背)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불토장엄이므로 불토장엄이라는 것은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이라고 수보리가 대답하니, 그를 받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라고 하였습니다.

『금강경』의 바로 이 부분이 육조(六祖) 혜능선사(慧能禪師)로 하여금 발심하여 출가하게 만든 구절입니다.


혜능은 남해(南海) 신흥(新興)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님을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나뭇짐을 팔아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가 24세가 되던 어느 날 시장에서 나뭇짐을 부려놓고 있을 때 탁발 나온 한 스님의 독경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 때 젊은 나뭇꾼의 눈을 뻔적 뜨게 한 구절이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이었다. 그 젊은 나뭇꾼은 스님에게 그 구절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물었다. 스님께서 『금강경』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젊은 나뭇꾼은 그 스님에게 자기가 느낀 바를 말씀해 드리니, 그 스님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청년이라고 생각되어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 공부하라고 권하였다. 홀로 계시는 어머님 때문에 머뭇거리는 젊은이의 마음을 알아 본 스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그에게 쥐어 주며 꼭 스승을 찾아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젊은 나뭇꾼은 어머님을 친구에게 부탁해놓고 홍인대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때 홍인대사는 700명의 제자가 있었고 신수(神秀)스님이 그의 상수제자(上首弟子)이었다. 이 때가 서기 662년 경의 일이다.

드디어 젊은이는 홍인대사의 처소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를 본 홍인대사가 “젊은이는 어디에서 왔는고?”하고 물었다. 젊은이가 “영남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니, 홍인대사가 “영남사람은 불성이 없느니라”고 했다. 젊은이가 고개를 숙이고, “사람에게 남쪽 사람 북쪽 사람이 있지만 불성에 어찌 남과 북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깜짝 놀란 홍인대사는 짐짓 꾸짖는 어조로 “어허, 오랑캐가 당돌한 말을 하는 구나. 부엌에 가서 방아나 찧도록 해라”하고 행자생활을 시작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를 노행자(盧行者)라고 불었다.

그가 행자생활 한지 8개월이 지났을 무렵, 홍인대사가 자기 법을 전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대중들에게 각기 법을 증득한 게(偈)를 쓰게 하였다.

700명 대중들은 모두 당연히 교수사(敎授師)를 하고 있던 신수(神秀)스님이 홍인대사의 법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게(偈)를 쓰지 않고 있었다. 신수(神秀)스님은 자신이 홍인대사의 대를 이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복도에 내다 붙였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대와 같으니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묻지 않도록 하라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권불식(時時勸拂拭)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마음은 원래 밝은 거울과 같은 것이니 때묻지 않게 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글이다. 이를 본 홍인대사는 좋은 글이라 칭찬하시며 모든 대중들에게 암송하도록 당부하였다. 로(盧)행자가 부엌에서 일을 하다 대중들이 무엇인가 외우고 있는 것을 듣고 부엌에서 같이 일하던 스님에게 무엇을 외우고 있는가 물었다. 그는 홍인대사의 대를 이를 신수(神秀)스님의 시를 홍인대사가 외우라고 해서 외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로(盧)행자가 이 시를 듣고 자기도 글을 하나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글을 쓸 줄 몰랐다. 그는 어린 스님(張日用)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부르는 데로 글을 쓰게 하여 신수의 시와 같이 복도에 붙이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보리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명경이라는 대도 또한 아니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끼겠느냐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대중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시가 붙어 있어 이 글을 읽으려고 대중들이 많이 모였다. 그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홍인대사가 대중들이 읽고 있던 그 시를 읽었다. 홍인대사는 “아직 멀었다”고 하며 짚신을 벗어 그 글을 지워버렸다. 대중들은 깜짝 놀라 다 헤어졌다.


홍인대사는 노(盧)행자에게 다가가 “방아는 다 찧었느냐”고 물었다. 노(盧)행자가 “방아는 다 찧었으나 키질을 아직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방아는 다 찧었느냐”고 묻는 것은 공부를 다 마쳤느냐고 묻는 것이고, “방아는 다 찧었으나 키질을 아직 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공부는 다하였으나 인가를 아직 받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이 뜻을 알아차린 홍인대사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세 번 치고 말없이 가 버렸다. 삼경(三更 밤 11시에서 1시 사이)에 오라는 뜻이었다. 이 뜻을 알아차린 노(盧)행자가 삼경에 홍인대사 방에 갔다. 기다리고 있던 홍인대사가 그를 반가히 맞이하였다. 비범한 청년이라 평소에 그가 모함을 받아 다칠까 항상 염려하여 오든 중이었다. 홍인대사는 그에게 『금강경』을 한줄 한줄 해설하여 주고 노행자(盧行者)가 그 뜻을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그의 법명을 혜능(慧能)이라고 하고, 그를 인가하는 동시에, 그에게 법을 전수하는 뜻으로 그의 의발(衣鉢)을 혜능스님에게 주는 의식을 마쳤다. 많은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의 신변이 위태로울 것을 염려하여 그 길로 강남으로 떠나 법을 펼 수 있을 때까지 은신하도록 당부하였다.

이것이 『금강경』이 선종(禪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유래이다.

그 후 그는 착실히 수행과 경전 공부를 하고 39세 676년에 교화활동을 시작하고 조계산(曹溪山)에 들어가 신수(神秀)의 북점(北漸)의 종풍(宗風)에 대립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적인 남돈(南頓)의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이것이 고려 때 송광사가 있는 산 이름을 조계산(曹溪山)이라고 부른 연유이고 또 현재 조계종(曹溪宗) 조계사(曹溪寺) 등의 이름이 혜능(慧能)선사가 주거하고 선풍(禪風)을 날린 그 산 이름을 따 붙여진 것이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권불식(時時勸拂拭)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이 두 시를 한 번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수이고, 몸과 보리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유(有)입니다.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명경대와 같고, 마음과 명경대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유(有)입니다. 시시권불식(時時勸拂拭)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털고 닦는 것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유(有)입니다.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때묻지 않도록 하라,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러니 유(有)입니다. 그래서 이 신수(神秀)의 시는 형상(形相)이 있는 시입니다. 형상이 있는 것은 유한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수(神秀)스님은 아직『금강경』을 통달하지 못하였고 무주(無住) 머물음이 없이 머물고 구함이 없이 구하여야 하는 데 신수(神秀)스님은 마음의 때에 집착하고 있고 마음의 때가 없는 것을 구하고 있으니 아직 청정한 수자(修者)가 되지 못하였음을 이 시는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盧)행자의 시는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보리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 무(無)입니다.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명경이라는 대도 또한 아니니, 명경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무(無)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한 물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 무(無)입니다.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디에 때가 낄 곳이 있느냐, 때가 낄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 무(無)입니다. 그러니 노(盧)행자의 시는 형상(形相)을 부정하는 시입니다. 형상(形相)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고 하는 『금강경』의 설과 일치하고, 또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낄 곳이 있느냐”했으니 머무는 곳이 없으니 무주(無住)요 구하는 바도 없습니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는 바 없고 구하는 바 없이 하는 곳에 청정심(淸淨心)이 솟아난다고 하는 『금강경』의 설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盧)행자의 수행도는 이미 신수(神秀)스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혜능(慧能)대사를 육조(六祖) 혜능(慧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육조가 되는 지도 아는 것이 좋겠지요.

보리달마(菩提達摩)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성장하여 승려가 돼 선(禪)에 통달하여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의 법통(法統)을 이었다. 그는 130세에 중국에 와 지금의 남경인 금릉에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났다. 양무제가 그가 절을 많이 세우고 경을 간행하고 승려들에게 공양을올리고 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많으냐고 물었다. 그에 대하여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무(無)」라고 대답하였다. 양무제가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어니 또 「무(無)」라고 대답하니, 양무제가 노발대발하였다. 달마대사는 그 길로 양나라를 떠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로 가 소림산에서 9년간 면벽(面壁)의 침묵생활을 했다. 침묵생활 9년에 혜가(慧可)를 만나 그에게 선법(禪法)을 전하였다. 후대에 달마대사를 선종(禪宗)의 종조(宗祖)라고 하고 혜가(慧可 487-593)를 제2조, 제3조 승찬(僧璨 -606), 제4조 도신(道信 580-651), 제5조 홍인(弘忍 602-675)대사, 제6조 혜능(慧能 638-713)대사라고 순위를 정하였다.

양무제가 절을 짓고 경전을 간행하고 스님들에게 공양 올린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달마대사가 「무(無)」라고 대답하였는데 왜 그랬을 까요? 그 공덕을 물은 것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됩니까?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가 됩니까? 그 공덕의 대가가 얼마인지를 알고 싶어 물은 것이니 유주상보시가 되는 것이지요. 무주상보시의 복덕은 허공이 한량없듯이 한이 없지만 유주상보시 복덕은 없다는 뜻입니다. 달마대사가 아마 양무제가 너무 지나치게 상(相)을 낸다고 생각했나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물음까지도「무(無)」라고 대답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무(無)」자 대답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없다 무아(無我)라고 대답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자기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첫 물음에 「무(無)」라고 대답한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왕이 당신은 누구요 라고 묻은 것에 대한 답이 「무(無)」라고 나오면 이것은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달마대사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렇게 대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헤어져야 할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달마대사는 소림산에 들어가 9년간 면벽생활을 해야 했고 양무제는 불교를 인연으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자 했으나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달마대사와 양무제를 한번 평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던진 첫 질문입니다. 절을 짓고 경전을 간행하고 스님들에게 공양 올린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양무제는 부처님께 공양하는 공덕으로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왕으로서의 꿈이 있었고 구함이 있었고 머물음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금강경』의 설법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보면 양무제는 절을 짓고 경전을 간행하고 스님들에게 공양할 때 그의 마음에는 바램이 있었고 구함이 있었고 머물음이 있었습니다. 머물음이 있었음으로 유주상(有住相) 보시를 한 것입니다. 『금강경』에 의하면 유주상(有住相) 보시는 수미산만큼 크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보시이니 많다고 합니다만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많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많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무주상(無住相) 보시는 하늘 끝이 불가사량 하듯이 무주상(無住相) 보시 복덕이 불가사량하니 이 불가사량한 복덕에 비유하면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양무제의 이 물음에서 양무제가 무릇 보시는 많이 하였다고 하더라도 『금강경』에서 경계하는 색성향미촉법에 집착이 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시 공덕이 없다고 「무(無)」라고 대답하는 달마대사에게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라고 물은 것은 자기가 왕이라는 입장에서 상대를 보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시 『금강경』에서 경계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대단히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님들에게 공양 올림도 스님들에게 공양올림이 아니라 자기 신하들에게 대하듯 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뜻 밖에 당돌한 달마대사에게 양무제가 당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러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높고 높은 양무제를 보고 짤라 대답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 양무제는 고구려 승으로서 중국에 유학와 삼론(三論)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승랑(僧朗)스님을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양무제는 그의 신하와 신하의 아들 열명을 승랑스님에게 보내 그들로 하여금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와 자기에게 불교를 가르쳐 달라고 하며 승랑스님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열 사람 중 한 사람이 승랑(僧朗)스님의 법통을 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양무제가 설사 구하는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은 여실합니다. 그리고 달마대사의 경우 비록 유주상(有住相)보시와 무주상보시를 비교하면 유주상보시 복덕이 무주상보시 복덕에 천만억분의 일도 못된다고 하더라도 무주상보시를 전혀 알지 못하고 유주상보시밖에 모르는 양무제에게 달마대사가 너무 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냐고 물은 질문도 양무제가 아무리 왕이라도 달마대사의 눈에는 스님과 신도의 관계입니다. 양무제가 무릎을 꿇고 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화가 시작 되었어야 했지요. 그러나 스님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양무제에게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무(無)」하였으니 양무제는 왕이라는 아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수모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 역시 저는 달마대사의 법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응주색성향미촉법 중에 법이 있는데 불응주법(不應住法), 법에도 머물음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고 무유법(無有法) 명아라한(名阿羅漢) 법에 걸림이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달마대사께서 불응주(不應住) 법에 걸리시고 법에 걸리셨으니 아라한이 되지 못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아무리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옳고 무아(無我)가 옳은 법(法)이라고 하더라도 그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처님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기 때문에 무유법(無有法) 명아라한(名阿羅漢) 어떠한 법에도 걸림이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한다는 것이 통하는 것입니다.

양무제를 만났을 때의 달마대사와 9년간 면벽좌선을 한 후 혜가대사를 만났을 때 달마대사는 선수행의 입장에서 크게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9년간 수행은 대단한 수행 기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달마대사가 양무제의 덕을 본 셈이지요. 그로 인해서 달마대사가 9년간 수행정진할 수 있었으니까요.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권불식(時時勸拂拭)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대와 같으니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묻지 않도록 하라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보리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명경이라는 대도 또한 아니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끼겠느냐


『금강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 것이니라. 색에 주 함이 없이 마음을 낼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주 함이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다. 응당 주 하는 바 없을 때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주의하여 이해하여야 할 점은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과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은 앞의 문구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을 받는다고 읽어야합니다. 즉 색에 머물지 않음으로서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고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음으로서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니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입니다. 여기에서도 기심(其心)이 곧 청정심(淸淨心)으로 해석하여 응당 머물음이 없음으로서 청정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해석합니다.

색(色)을 봄에 색(色)에 착하고 색(色)에 주(住)해 마음을 내면 이는 곧 미(迷)한 사람이요, 색(色)을 봄에 색(色)을 여의어서 색(色)에 주 하지 않고 마음을 내면 여기에서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는 이는 곧 깨달은 사람입니다. 색(色)에 주(住)해 마음을 내는 것은 구름이 하늘을 가림과 같고, 색(色)에 주 하지 않고 마음을 냄은 허공에 구름이 없어서 일월(日月)이 길이 비침과 같습니다.

또한 색(色)에 주해 마음을 내는 것은 곧 망념(妄念)이요, 색(色)에 주 하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이 곧 진지(眞智)니, 망념(妄念)이 생(生)하면 곧 어둠이요 진지(眞智)가 비치면 곧 밝음입니다. 밝으면 곧 번뇌가 나지 않고 어두우면 곧 육진(六塵) 번뇌가 다투어 일어납니다. 청정심을 갖는 것이 불토장엄입니다. 한 사람의 청정심을 가진 자가 나오면 법계가 청정하여집니다.

처음부터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질 것이라고 착각하여 세우는 희망이 망념(妄念)입니다.

어떤 것을 청정심이라 말하는가? 무취(無取)∙무착(無著), 색성향미촉법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안 는 것입니다. 만일 색성향미촉법에 취착(取著)이 없고자 하면 모름지기 지혜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일체의 현성(賢聖)이 지혜의 눈을 여는 것을 쓰기 때문에 모든 근(根)의 경계(境界)를 능히 잘 분별하고, 나아가 그 가운데 취착(取著)이 없어서 자재(自在)함을 얻는 것입니다. 때문에 근(根)과 진(塵)과 식계(識界)가 활달무애하여 하나 하나가 명묘(明妙)하며, 하나 하나가 청정(淸淨)해서 허공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는 가히 하늘과 물이 서로 연(連)하여 일색(一色)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가느스름한 구름 기운이 청광(淸光)을 가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般若)의 이용이 이와 같이 깊으며 이와 같이 자재(自在)하니 모름지기 지혜의 눈을 열어 널리 근문(根門)에 능하며 염념(念念)이 청정해서 다 해탈할 지은 정 무지(無智)해서 모든 경계에 염착(染着)함은 당치 않을 것입니다.

어떤 것을 불응주(不應住)라 하는가? 모름지기 공연히 색성향미촉법의 풍파(風波)를 좇지 말고 항상 멸정(滅定)에 있어 모든 근(根)에 응할 것이니, 이것은 가히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住)한 바 없는 자는 마침내 안과 밖이 없고 가운데도 비어 물건이 없는 것이 거울이 비고 저울대가 평(平)함과 같아서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가슴 가운데 두지 아니 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을 내는 자는 무주(無住)의 마음으로 저 일에 응해도 물(物)에 누(累)함이 되지 않습니다. 일을 당해 의(義)로써 행하면 반드시 물(物)에 더럽히지 않으며, 물(物)에 더럽히지 않으면 반드시 그 마땅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하는 사람은 남의 시비(是非)를 설(說)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능하고 내가 안다」하여 마음으로 말학(末學: 배우지 못한 사람)을 경만(輕慢)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이는 청정심이 아닙니다. 자성(自性)에 항상 지혜를 내어 평등한 자비를 행해, 일체 중생에게 하심(下心)하여 공경하는 것이 이 수행인의 청정심입니다. 만일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청정한 곳에만 애착해 마음에 주(住)한 바가 있으면 곧 이는 법상(法相)에 착(着)한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청정한 것은 알지만) 목전(目前)임을 어찌할 것인가? 색(色)을 봄에 색(色)에 간(干)하지 않고 소리를 들음에 이 소리가 아니니, 색(色)과 성(聲)이 구애되지 않는 곳에 친히 법왕성(法王城)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청정심).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색신(色身)이 비록 크나 내심(內心)의 양(量)이 커서 허공계(虛空界)와 같으면 바야흐로 대신(大身: 법신)이라 이름한다. 색신(色身)은 비록 수미산 같더라도 마침내 큼이 된다 하지 않는 것이다.

정토(淨土)를 장엄 하는 일은 어떠한 것인가? 정법안(正法眼)을 얻는 것이 참 종요(宗要)입니다. 무엇을 정법안(正法眼)이라 말하는가? 법(法)의 있는 바가 없는 것을 요달(了達)한 것입니다. 법(法)이 이미 있는 바가 없으면 일체의 마음도 또한 없습니다. 마음도 없고 얻는 바도 없는 것을 열반심(涅槃心)이라 말하는데 이 참 장엄을 사람들이 알지 못해 상(相)의 신(身)과 토(土)를 취해 부질없이 장엄합니다. 때문에 대신(大身)이라 호(號)함을 비신(非身)이라 설(說)하여, 지견(知見)으로 하여금 부칠 바가 없는 것에 이르게 합니다.

근(根)과 진(塵)과 식(識)을 방하(放下)하고 청정해 남음이 없는 데 이르니 원만하고 공적(空寂)한 체(體)가 훤히 이에 나타납니다. 공생(空生)이 능히 부처님의 뜻을 알아 비신(非身)으로 답하는 것이 관연 좋은 지음(知音)입니다. 다만 저 비신(非身)의 도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일찍이 잠깐도 있지 않았지만 상(像)이 완연합니다. 상(像)이 비록 완연하나 토끼의 뿔과 같습니다.


장엄정토의 핵심은 청정심이다. 청정심은 색성향미촉법에 주하지 아니하고 응당 주하는 바 없이 마음을 쓸 때 일어나는 마음이다. 이 청정심이 불국정토 극락세계를 장엄하는 것이다. 수미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미산왕만큼 큰 몸을 가진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청정심을 가진 사람에 비교하면 적은 사람이다. 오직 청정심으로 이루는 장엄이 무한하고 영원한 장엄이다. 청정심(淸淨心)은 비록 몸이 아닌 비신(非身)이지만 큰 몸이라 대신(大身)이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몸이 아무리 수미산왕만큼 크다고 하더라도 허공과 같이 넓고 깊은 마음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다. 마음은 몸이 아니니 비신(非身)이고 이 비신(非身)이 수미산왕같은 몸 신(身)보다 말로서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니 비신(非身)이 대신(大身)이다.


대의(大意)

부처님께서 연등불에게서 법을 듣고 연등불의 지도를 받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고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연등불의 지도를 받은 바 있고 그 가르침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면 부처님께서 연등불로부터 얻은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얻음도 구함도 없음을 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얻은 바가 있다면 부처님은 받은 사람이고 연등불은 준 사람이 됩니다.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이 있으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연등불을 만나기 전에 이미 깨달으신 분이기 때문에 연등불과 이미 하나가 되어 능소(能所)가 없는 관계입니다. 연등불과 부처님 사이에서는 주고받음이 있다고 하여도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음과 다르기 때문에 연등불과 부처님사이에서는 주고받음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사이가 하나되어 능소(能所)가 없을 때 주고받음은 남과 주고받음과 다르기 때문에 주고받음이 있어도 주고받음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이 장엄한바 있느냐고 부처님이 물으시고 수보리는 보살이 장엄한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보살은 중생들을 교화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절을 짓고 불사를 일으키고, 경전을 간행하고,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중생을 공경하고 어려운 중생을 도와 곤경에서 구제하고 스스로 항상 수행에 전념하여 청정한 보살로 세상에 맑고 밝은 빛을 발합니다. 이는 실로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나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면 장엄을 하는 보살과 보살의 장엄을 받는 중생이 나누어짐으로 장엄을 하는 능(能)과 장엄을 받는 소(所)가 있게 됩니다. 능소(能所)가 있게 되면 내가 있고 남이 있게 됨으로 보살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게 됩니다. 능소(能所)가 없게 되면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며 안과 밖이 따로 없어 친(親)과 소(疎)가 없습니다. 친과 소가 없으면 평등하여 저울대가 평형(平衡)합니다. 보살과 중생이 둘이 아닌 이치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공경할 뿐입니다. 그 외 다른 생각이 전혀 없을 때 청정하다고 합니다.

그 외 다른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여도 장엄한다는 상, 장엄했다는 상, 장엄할 것이라는 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장엄한다는 상이 전혀 없으므로 중생으로부터 물질을 구하는 마음이 없다는 불응주색, 중생으로부터 소리나 향기나 음식 맛이나 몸에 접촉하는 느낌이나 진리라는 법을 구하는 마음도 없다는 불응주성향미촉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국민을 착취하는 것, 영어 모르는 사람들을 도와준다고 하면서 착취하는 것, 노인 복지를 위한다고 하면서 착취하는 것 등등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색성향미촉법에 머물고 구하고 탐내는 바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처음부터 머물지 않으면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탐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금강경』에서 물질에 소리에 향내에 맛에 느낌에 법에 머무는 마음을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철저하게 이 머무는 마음을 끊기 위하여 머무는 마음이 없으면 곧 청정심이 일어난다고 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 우주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수미산 중에서도 수미산왕 만큼 큰 몸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여 보아도 몸이 아닌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는 마음, 머물음이 없이 보시하는 청정한 마음이 훨씬 더 크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신다고 수보리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장대하여도 마음이 큰 것만 못하고, 또 마음의 크기에 비유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제 2장에서 장로수보리가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을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물게 하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고 묻고 제 3장에서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고 하고 항복받는 법을 지금까지 계속 설하여 왔습니다. 제 9장에 와서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서 수행하여 수다원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수다원에 마음이 머물면 수다원이 아니고, 사다함이 되었어도 사다함에 마음이 머물면 사다함이 아니고, 아나함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나함에 마음이 머물면 아나함이 아니고,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부처가 되면 선배부처님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나 얻을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이 되면 중생을 위하여 불토를 장엄하는데 중생의 물질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느낌에 마음이 머물거나 구하거나 탐냄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중생 앞에서 보살이 법을 안다는 생각에 머물거나 집착하면 곧 보살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은 물질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느낌이나 법에 머물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 머물음이 없는 마음에서 청정심이 솟아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크고 많은 물질로 세운 공덕이 크다고 하더라도 청정한 마음으로 세우는 공덕에 미치지 못함을 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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