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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정토//(정토학)

[스크랩] 10. 정토를 장엄함은 莊嚴淨土分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2.05.03|조회수4 목록 댓글 0

10. 정토를 장엄함은 莊嚴淨土分

07/08/2011 11:07 am공개조회수 0 0

10. 정토를 장엄함은 莊嚴淨土分

佛告須菩提於意云何如來昔在然燈佛所於法有所得不世尊如來在然燈佛所於法實無所得須菩提於 意云何菩薩莊嚴佛土不不也世尊 何以故莊嚴佛土者則非莊嚴是名 莊嚴是故須菩提諸菩薩摩訶薩應 如是生淸淨心不應住色生心不應 住聲香味觸法生心應無所住而生其心須菩提譬如有人身如須彌山K0013V05P0980b16L; 王於意云何是身爲大不須菩提言 甚大世尊何以故佛說非身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옛날 연등불의 처소에 계실 적에 얻을 법이 있었겠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옛날 연등불의 처소에 계실 적에 참으로 얻을 법이 없었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부처님 나라를 장엄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 나라를 장엄하는 것이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닌 것을 장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한다. 형색에 얽매이는 마음을 내서도 안 되고, 소리. 향기. 맛. 접촉되는 것. 마음의 대상 등에 얽매인 마음을 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어디에도 얽메인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

수보리야,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몸이 산의 왕인 수미산과 같이 크다고 하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겠느냐?”

수보리 장로가 대답하였습니다. “대단히 큽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이) 몸이 아닌 것을 큰 몸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각 마음 비움의 상태로 살아라

『금강경』을 읽다 보면 같은 문장 구조가 되풀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흐름이 되풀이 되는 분별의 연속이므로 이러한 구조화된 의식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배려 때문입니다. 구조화된 의식의 흐름을 깨기 위해서 ‘즉각[卽] 마음 비움[非]의 상태로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조화된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강경』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말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라 ‘빈 마음의 반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자기 열림’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 마음은 ‘어떤 때는 이렇게, 어떤 때는 저렇게 끊임없이 일정한 모양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때로는 긍정으로, 때로는 부정으로, 때로는 긍정과 부정을 다 넘어서 우리의 구조화된 의식을 깨뜨립니다. 그러한 의식이 깨지면 우리의 삶이 온전히 열리게 됩니다. 구조화된 의식 일반이 떠오르는 순간마다 금강의 지혜로 그 구조를 깨뜨리는 것이『금강경』입니다.

이 경은 저 내면 깊은 곳, 즉 말을 떠난 곳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의식 일반인 구조화된 분별로써 『금강경』을 알려고 하면 그 순간 『금강경』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지금 여기의 삶에서 순간순간 『금강경』이 살아 있는 말로 뛰쳐나와야만 비로소 『금강경』입니다.

자기 한정을 떠나 듣다

우리는 보통 意의 자기규정으로써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지금 하는 말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於意云何]”라고 계속 물으십니다. 이것은 “너는 너의 한정을 벗어나 내 소리를 듣느냐 아니면 너의 한정으로 내 소리를 듣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四智, 곧 成所作智 . 妙觀察智 . 平等性智 . 大圓鏡智로 내 소리를 듣느냐. 아니면 자기 한정으로 너의 소리를 듣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수보리는 “부처님, 저는 자기 한정을 넘어서 사지의 맛을 본 사람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의운하於意云何에 실려 있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래께서 과거에 연등불이 계시던 곳에 있을 때[如來 昔在然燈佛所]’라는 말을 듣고 자기 한정으로 지금과 상대한 과거를 떠올리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於意云何]”라고 물으실 때에는, 중생이 이해할 수 있게끔 비교 한정어를 쓰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구조화된 한정을 떠난 사지四智에서 말씀하심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일깨우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지에서는 과거가 과거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살아납니다.’ 과거의 연등불이 지금 살아납니다. ‘과거’라는 말을 옛날 어떤 시대의 과거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成所作智 . 妙觀察智 . 平等性智 . 大圓鏡智를 통해서 연등불과 만났으며, 그 만남의 마음은 ‘과거도 미래도 떠난 열림’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자기 한계에 의해 세워진 시간의 개념을 벗어났기 때문에, 옛날에 연등불의 처소에 있을 때 근본적으로 얻을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도 얻을 바가 없으며 미래에도 얻을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얻을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어법실무소득於法實無所得]

시방 세계에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는데 연등불은 어떤 부처님이겠습니까? 『반야경』에서 말하는 ‘밝게 빛나는 마음’이란 ‘마음이 스스로 밝게 빛나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에 의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등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 ‘밝게 빛나는 마음’이 바로 연등불이 됩니다. 깨달음 자체가 ‘네 가지 지혜[四智]가 갖추어진 밝게 빛나는 마음’인 것입니다.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얻을 바도 없고 얻는 자도 없고 줄 바도 없는 깨달음 속에 늘 있다’는 말입니다. 늘 깨달음으로 있는 삶이기 때문에 과거라는 말을 썼지만, 이 ‘과거’는 바로 ‘밝게 빛나는 마음의 현제 표현’인 것입니다.

나를 비워 깨어 있는 상태에서 듣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옛날 연등불이 계신 곳에서 얻을 법이 있었겠느냐?”라고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여기서 얻는다는 것에는 반드시 意가 개입됩니다. 그러나 나의 한계를 떠난 지혜 속에서는 ‘의’가 개입되지 않아 얻을 바가 없습니다. 이것을 수보리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없었습니다.” 여래께서는 옛날 연등불이 계시던 곳에 있을 때 이미 법에 얻을 실체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여래께서는 意의 자기 한정으로부터, 구조화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깨달은 분들’은 누구라도 ‘구조화된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분들’입니다.

판단의 근거인 ‘나’를 비웠기 때문에 대상을 구조화시키지 않습니다. “참으로 얻을 바가 없습니다[실무소득實無所得]”라는 말은 “자기 한계를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대상도 사라지고 자신도 사라지기 때문에 얻을 바도 얻는 자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참다운 삶에서 나온 말’입니다. 참으로 ‘삼독의 소유가 사라진 세계’입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부처님께서 묻습니다. 이것은 ‘한 찰나라도 생각[意] 속에 빠지지 말고, 순간순간 자기 자신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어의운하於意云何]”라는 말을 한 번만 하셔도 되는데 계속 되풀이하시는 것은 의인 ‘나’를 비워 깨어 있는 상태에서 들으라는 말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자기의 한정된 이해로 부처님 말씀을 한정시켜 듣게 됩니다.

곧 장엄이 아니다

“보살이 부처님 나라를 장엄하겠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마음[意]이 열리지 않으면 불보살과 장엄이 따로 있어서 부처님 세계와 그곳을 장엄하는 갖가지가 저마다 있게 됩니다. 마음이 열려야 “곧 장엄이 아니다[즉비장엄則非莊嚴]”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가 “제가 이해한 바로는 장엄할 부처님이나 장엄이 따로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열린 마음[지혜]에서 나오는 활동[자비]에는 이미 ‘장엄할 불’이나 ’장엄할 부처님나라‘나 ’장엄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대로 전체가 동시에 불이면서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한다는 것[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에서 장엄이란 곧 장엄이 아닌 것을 장엄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장엄이 장엄이라는 모습으로 있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 속에서 함께 우주 적인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대로 척 앉아 있는 상태가 우주적인 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우주를 찬탄하는 춤이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부처님의 세계이며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잘 살게 하는 기운, 청정심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반드시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야만 한다, 형태에 한정되거나, 소리나 법 등에 한정되어 살아서는 한 된다. 반드시 한정을 떠나서 살아야 한다[須菩提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淸淨心不應住色生心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고 했습니다. 여기에 ‘청장한 마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에 淨을 말하면서 ‘성스럽고 아름답고 착함’이라고 했습니다. 청정도 그와 같이 ‘성스럽고 아름답고 착함’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 ‘성스럽고 아름답고 착함’이란 ‘구조화된 마음이 사라짐’을 의미 합니다. ‘성스러움’은‘意의 한정을 벗어난 마음’이고 ‘아름다움’은 ‘의의 한정을 벗어나서 드러난 장엄’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함께 사는 가운데 흐르는 ‘자비의 빛’이 聖입니다. 열린 마음에서 함께 나투는 모습 가운데 ‘서로를 잘 살게 하는 기운이 청정심’입니다.

이미 자기 한계를 떠났기 때문에 청정심에는 대상으로서의 色이 없습니다. 눈의 대상으로서 색이나 분별된 몸은 사라집니다. 마음과 몸을 나누어서 분별하는 분별심이 없습니다. 색에도 얽매이지 않고 소리와 법 등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이 청정심입니다. ‘반드시 어디에도 얽매인 바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란 ‘자기 한정인 의의 작용이 일시에 쉬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께서는 이 부분을 듣고 곧바로 분별의식인 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즉비의 돈오입니다. 모든 행동과 마음 씀씀이에서 그대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음과 대상을 나누지 않는 하나 됨 속에 청정심이 살아 있어서 ‘앎[깨어 있음]은 계속되나 분별을 없습니다.’ ‘앎이 나의 앎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라한 경험을 많이 하지만, 여기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의식의 특별한 능력을 깨달음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무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사고인 분별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무심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마음의 특별한 능력을 키우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분별의식인 意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얽매인 바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보편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경험되지 않는 것들이 선정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이것 역시 무심이 아닌 이상 意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예를 들어 뛰어난 것을 보고나 듣거나 맛보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마음이 특별한 상태로 고양된 것일 뿐 무심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 됨으로 사는 분이야말로 참된 도에 든 분입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서 무심으로 사는 분도 계셨지만, 능력이 있는 것이 꼭 반드시 어디에도 얽매인 바 없이 마음을 쓰는[應無所住而生其心] 무심의 삶은 아닙니다.

‘반드시 얽매인 바 없이 마음을 써야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대목에서 冶父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산 절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더니 山堂靜夜坐無言 고요 밝음 예나 지금 스스로 그러한데 寂寂寥寥本自然 석가 노인 무슨 일로 평지풍파 일으키나 何事西風動林夜

짝 잃은 기러기만 하늘에서 슬피 우네 一聲寒雁淚長天

“깊은 산 절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더니”에서 말없이[無言]란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의의 분별의식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의의 자기표현이 말’이기 때문에 ‘말을 한다’는 것은 의를 계속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무언이란 무어, 무심이 된다’는 말로서 ‘그저 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화두를 드는 것도 아니고 관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앉아서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일체의 마음을 떠나 있어 의가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빛나는 마음’이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것이 바로 ‘고요 밝음 예나 지금 스스로 그러한데’입니다.

무언의 세계는 本自然입니다. 자연이라고 할 때, 한 개체가 자기의 능력만으로 외부의 영향 없이 스스로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연은 我相. 法相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무자연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모든 개체는 다른 것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나타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意의 자기 한계로부터 벗어나 우주의 춤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석가노인 무슨 일로 평지풍파 일으키나”라고 합니다. 공연히 불법이 나타나 중생심으로 불법과 비 불법으로 가르게 되고, 이라한 편 가르기에 의해서 서로 소외되어 짝을 잃고 슬피 우는 기러기 꼴이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도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불법자 즉비불법]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불법과 비 불법을 떠나 전체로 함께 있어야 하는데, 한소리밖에 없으니 짝을 잃은 것입니다.

‘짝 잃은 기러기’이므로 ‘추운 기러기[寒雁]’라고 표현합니다. 짝 잃은 기러기가 하늘에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짝 잃은 기러기는 불법도 될 수 있고 중생법도 될 수 있습니다. 삶 속에서 나. 너로 서로 분리되면서 소외되어 짝을 잃었습니다. ‘짝을 잃었다’는 것은 본 자연의 상태가 어그러져 우주적 춤사위가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이야기 하면서 불법이 분리된 소외 속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의의 분별을 벗어난 세계

흔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意의 분별을 벗어난 세계’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몸이 수미산만하다면 이 몸은 크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예, 참으로 큽니다”하고 긍정을 합니다. ‘열린 마음, 곧 의의 분별을 벗어났을 때 드러난 낱낱의 모습이야말로 아름답고 큰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열린 마음의 자기표현이 미입니다. 이때 ‘크다’는 것은 단순한 비교의 크다가 아니라, 가장 아름답게 자기를 나타낸 ‘열린 마음의 아름다운 큼’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열린 마음에서 드러난 하나하나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습니다. 열린 마음에서 몸[身]이 긍정되고 있습니다. 몸이 아니라는 것[非身]은 몸에 의해 닫힌 마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에 근간이 되는 것은 ‘열린 마음인 지혜’입니다. “한계가 있는 마음으로 부처님 설법을 듣느냐, 또는 한계가 있는 마음을 떠나 부처님 설법을 듣느냐”에 따라서 부정과 긍정이 적절하게 나타납니다.

한계가 있는 마음으로 부처님 설법을 듣는다면, 듣는 사람은 물론 부처님조차도 설자리가 없습니다. ‘열린 마음’에서는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라도 다 살아납니다. 『금강경』은 ‘말을 떠난 말’로 자기의 전 존재가 동시에 드러나는 금강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금강경』은 우리에게 어떤 말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열려서 자기의 전 존재가 드러나는, ‘말을 떠난 말’이 『금강경』입니다. 그래서 ‘말을 떠난 말’은 말을 떠난 데서 보면 성스러움 속에 들어 있고, 말로 나타난 것으로 보면 美로 드러난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에는 저마다 나투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긍정이 말 속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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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성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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