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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및 불공 안내

믿음과 성취로 한 걸음 나아갈 때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1.12.03|조회수20 목록 댓글 0

청풍수련원의 꿈을 꾸며



몇 해 전 덕양강원수업 중에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미래의 어느 때 반드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떠올랐다.

마음이 약하고 여린 청소년들을 강건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으로 이끌어 주고 밀어주는 수련 장소를 하나 만들어 보리라 생각했다. 그런 미래설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이름을 지어 보았으며  "청풍수련회"라고 하였다.

맑은 바람이 부는 곳에서 수련을 하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맑은 바람은 산에서 부는 바람이며 그 때 마음 언저리레는 지리산 자락이 스쳐 지나갔다. 그곳의 환경에 잘 어울리는 집을 지어놓고 많은 청소년들이 모아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살펴보고 나와 남의 관계를 어떻게 잘 맺어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며 참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되 무겁지 않는 공간으로 만들어 보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잘 가꾸어진 공간에 환희로움이 넘치고 생기가 번지는 그 곳에서 "청풍수련원"이라는 현판식을 하는 광경까지도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이 청풍수련회를 만들어서 제대로 운영하는 모습을 꿈꾸고 있으며 조금씩 구체화 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대상 중에 한 명은 바로 나의 둘째 딸 아이이다.

 

딸의 어린 시절은 한 마디로 골목대장 같은 모습이었다.

치마는 한 번도 입지 않고 오직 바지만을 입고 돌아다녔으며, 동네 또래아이들 모두를 몰고 돌아다니면서 온동네를 쏘다녔다. 세발 자전거를 타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하면서 집을 몇 바퀴 돌아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까지도 이런 모습은 계속 이어졌고 어렴풋이 저런 선머슴같이 자라서는 안 될 터인데 하는 걱정이 스쳐갈 정도였다. 그런데 성격이 바뀐 것인지 중학교를 다니면서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더니 종국에 가서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 빠져 들고 말았다. 왜 그렇지 하는 걱정만 앞설 뿐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아토피로 인해 피부가 거칠고 흉 진 부위가 까맣다 보니 그런 것들로 인해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긴 했으나 차츰 좋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한가지 더 걱정스러운 것은 시험을 볼 때 마다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시험때만 되면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매 번 시험을 잘 치질 못하였다.

 

공부와 관련한 딸의 장점은 어학능력이다.

30분 만에 100개 정도의 단어를 외울 수 있고  한 번 외우면 오랫동안 잘 기억한다.

한 때는 일본 여가수를 좋아하더니 혼자서 일본어를 독학하여 일본어 능력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그 만큼 언어적 능력이 괜찮아서 어학 분야에 진학하기를 바랬다.

그런데 느닺없이 사진을 전공하겠다고 한다. 늦게 시작을 하니 사진에 대한 실기를 배울 시간이 부족하였고

결국 원하는 사진과를 들어 가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더 공부를 하기로 하였고 올 한해 동안 인터넷 강의를 통해 수능을 준비하였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아토피 증세가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하였고

다시 어린 시절처럼 명랑해지면서 자기의 할일을 열심히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 또 시작되었다.

수능시험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딸이 서서히 긴장을 하였다.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안정을 찾도록 잘 이야기 하고 달래 주기도 하였으며 밤낮으로 딸의 안정된 심신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또 스님과 몇몇 보살님께 메세지를 보내 아이의 상황을 알리고 수능일까지 아이에게 자비심을 보내다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수능 3일을 앞두고 아이의 상태는 최악이 되어 갔다.

스트래스로 인해 방광염을 앓기 시작했고 소변에서 피가 나왔으며  10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야 했다.

병원 치료에도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수능시험  전날은 그런 현상에 대해 불안감이 겹쳐져서 잠마져 설칠 뿐 아니라 자기의 처지가 속상한지 나를 앉고 울다가 짧은 잠을 자고 수능시험장을 가야만했다.

 

그런 아이를 수능시험을 치루는 학교 앞에 내려 주고 잘 될 것이라는 힘없는 위로를 하고서  

팔공산으로 향했다. 갓바위 약사여래부처님을 향해 산을 올라갔다.

그 높은 산을 나는 단숨에 올라갔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도 절절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각자 자식의 평정심을 기원하고 있었다.

겨우 모서리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앉아 기도에 들어갔다.

"지금 아이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 한 해 딸아이가

준비해온 그 실력만큼이라도 제대로 발휘할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다.

기도 도중 아이의 마음이 느껴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기도를 하는중  어디선가 물이 흘렀고  물에 깔고 앉은 방석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급기야는 옷이 젖어들기 시작했지만 그 자리마저 놓칠 수가 없었다.

 오직 딸아이의 실력 발휘만을 일심으로 기원하였다.

갓바위에 불어오는 바람은 칼날같았지만 그 바람이 그렇게 매서운지 느끼겨를도 없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진언은 한없이 돌아가고 마음은 맑아 졌다 흐려졌다 반복을 한다.

문득  딸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둡다.

그럴수록 나의 기도는 절실해져 갔다.

"애민한 중생을 굽어살피소서"

산꼭데기에 바람은 불어 들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부산함 중에도 나의 기도는 이어졌고 어느 덧 해가 기우는 시간이 되었다.

 

시험이 끝났을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산을 하는 도중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 힘이 없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시험 중에 화장실을 몇 번씩 다녀 오느라 제대로 문제를 다 못 풀었다고 한다.

우려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아이는 시험을 제대로 치지 못해 성적이 좋지 못할 것이라고 울먹인다.

괜찮아 힘내. 다 잘 될 것이야하고 짧게 위로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눈 앞이 캄캄해진다.

더 이상 내려갈 힘이 없다.  산중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두려움마저 느끼질 못하였다.길 옆의 바위에 주저앉아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이 왜 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일말의 원망이 섞인 생각에 사로잡혀 한 동안 꼼작하지 않고 있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가는 길을 걱정할 겨를조차 없었다.

아이와의 통화내용이 귀전에 맴돌다 사라진다.

"엄마 10분간격으로 화장실을 가느라  전 과목 모두 시간이  모자라 나머지는 문제도 읽지 못하고 답을 기입했어."

아이의 그때의 심정이 목소리로 그대로 묻어나와 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내 마음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절망으로 물이 들기시작했다.

 

바로그때 그 고요한 산중에 조그마한 암자에서 범능스님의  "관세음의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흘러 내린다. 관세음의 노래는 어둠조차 느낄 수 없는 미진한 나에게  길을 갈 수 있게끔  방향을 제시하는 등불이었다.

참회의 눈물이흐른다. . 나의 어리석음이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들고 있구나 하는 참회가 되면서 맑은 기운이 살아났다.

괜찮아 조금 늦으면 어때, 아이에게 희망을 주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따듯한 어미의 눈길과 손길을 주는 것 뿐이다라는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는 코가 석자나 빠져 있었다.

그런 아이를 잘 안심시키고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차분히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다둑였다.

그렇게 아이를 위로해 놓고 나서 딸이 시험때마다 겪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일까 곰곰히 살펴보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딸을 임신했을 때 나의 마음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을 임신했을 때 우리는 화천군의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관사는 민통선 안에 자리잡고 있었고 읍내를 다니는 차는 하루에 세 대 뿐이었다.

초봄이었는 데 입덧을 하느라 유난히 참외가 먹고 싶었다.

아침에 읍내로 나가는 버스편에 참회를 사러가면 저녁이 되어서야 막차편으로 참외를 사와서 먹을 수 있었다.

환경이 이러하다보니 무언가 충족을 시키기 위해선 몇 배의 관심을 쏟아부어야  내손에 들어올수 있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 딸에게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형성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관사에는 나보다 나이는 적은 상관 부인이 같이 살고 있었다. 이 부인은 부인들을 모아 놓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몸이 무거운데다가 어울리는 것이 싫었던 나는 그런 자리에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빠지기 일수었다. 어려움을 핑계를 대고 피하는 그 과정들이 고스란히 딸아이에게 전도되어 저렇게 힘들고 어려움을 심정적으로 피하려 하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딸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보다는 그것을 잘 털어내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자리에

더 큰 밝음이 채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능이 있은후 아이는 너무도 평온하고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간듯 활기차게 생활을 하였다.

어려움끝에 찿은 안정을 아이도 느꼈는지 이젠 엄마의 말에 귀를 기울린다.

마음속의 잠재되어 있던 요인들을 거둬들여지면서 아이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생기를 찾아간다.

어린시절 골목대장이 다시 되어가는듯 했다.

 

오늘 수능점수 발표가 있었다.

하루종일 무열대 강의가 있어  수업을 받고 있는데 아이한테 전화가 왔다.

아주 밝은 목소리로 '엄마. 내가 풀은 문제는 거의다 맞았어"

아이의 수능점수는 예상밖으로 합격을 기대해도 될 점수가 나온것이다.

아!  관세음보살님 , 

그날의 절절한 저의 기도를 당신은 외면하지 않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잡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기쁜것은 

기뻐하는 아이를 바라볼 수 있다는게 나에겐 더 없는 큰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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