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나옵니다.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은 변함이 없다.
믿었던 사람이 남들로부터 비난을 당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파계하게 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게 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의지처를 잃게 된다.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그와 같은 허물이 생긴다.
불법을 믿을 것이지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죠.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사람을 믿으면
사람이 변할 때 우리 마음도 함께 흔들리게 되겠죠.
그러나 오직 법을 믿고 부처님을 믿으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금강과도 같은 굳은 믿음이란
그 대상이 사람에 있지 않고
법과 부처님에게 있어야 하겠죠.
내가 굳게 믿고 존경했던 우리 절 주지스님이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못하다거나
실망스러운 언행을 하셨다거나
심지어 파계를 하고 큰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큰 실망을 하면서
불교를 싸잡아서 욕하기도 하죠.
그것은 불교와 스님을 동일시했기 때문이고요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람에게는 허물이 있을 수 있죠.
스님이 곧 불법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스님이라 할지라도
당연히 허물이 있을 수 있고요,
실수도 하고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이 또 당연할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통해서 배우고 깨닫고
성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믿는 사람이라고 다 완전해야 한다고 믿거나
스님이니까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분들도 결국엔 사람이고
크게 본다면 깨달아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와 똑같은 도반일 뿐입니다.
제가 보는 수행자는
스님이라는 외적인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완전한 사람이거나,
완벽하게 지혜로운 사람이거나,
계율에 철저하거나,
불법을 온전히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행자란,
중생에서 부처로,
차안의 이 언덕에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사람이니까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실수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어제보다는 오늘 더 나아지는 사람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려면
진리에, 법에,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날이 나아질 것이고요,
나날이 나아지는 과정에서 실수를 물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실수와 과정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줄 수도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기에 경전의 말씀처럼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법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스님들이 타락하고
절이 청정함을 잃더라도
내 마음공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게 되겠죠.
스님이 타락했다면
그것은 스님이 타락한 것이지
불법이 타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할 일이지
승등명(僧燈明)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법이고요,
우리는 법을 등불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스승도
그를 우상화하거나
그를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불법에서는
스승에 대한 믿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작정 스승에 대해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법이 서 있는 스승,
깨달은 스승을 믿으라는 의미겠죠.
법이 없는 스승이라면
아직 그를 승등명(僧燈明)할 단계 까지는 아닌 것이죠.
그러니 핵심은 사람에 있지 않고
법의 유무에 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법은 실수가 없죠.
우리가 법에 목말라하고
오로지 이 법만을 보고 나아간다면
법과 하나 된 스승도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등불로 삼지 말고
그러니 오로지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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