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 마음으로 칭념하면 모두 이뤄 지나니,
/ 정산 스님
불교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보살의 존재는 대승불교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대승불교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많은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 한 분밖에 안 계셨습니다만,
대승불교에 이르자 수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 많은 부처님의 존재는, 바로 수많은 중생들이
그렇게 수많은 부처님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보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수 많은 부처님이 될 존재,
그렇게 되도록 애써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살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보살은 ‘미래의 부처’를 말하는 것이며,
‘실제의 보살(實菩薩)’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일까요?
‘방편의 보살’이라고 합니다.
진짜는 부처님인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살노릇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실제,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원래
어떤 부처님이었는지를 밝혀 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석가모니불 당시의 불교, 즉 원시불교 당시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지혜의 종교’ 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펼치셨던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왜냐 하면, 무명과 갈애 때문이다.
그러한 괴로움은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법하셨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그원인의 분석이 있습니다
'지혜의 작용'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 팔정도(八正道)의 실천 역시 자력적인 수행으로서
지혜의 종교임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팔정도에 ‘신에게 기도하라,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 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원시불교의 특징을
‘지혜의 종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중생들의 근기가 옅어집니다.
이제 스스로, 지혜를 닦아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비'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교에서
자비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일반적으로 볼 때 그 특성이
자비보다는 지혜 쪽에서 찾아진다는 말일 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삼계도사 사생자부’라고 일컬어집니다.
자부(慈父), 자비로운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버지입니다.
반면, 관세음보살은 ‘대성자모(大聖慈母)’라 합니다.
큰성인이시고 자비로운 어머니이신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승불교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이 출현하신 것은
석가모니불의 완성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완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역시 중생에게
바로 그 같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대승불교는 원시불교를 완성하는 것이며,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불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아셨을 것입니다.
모든 소원 들어주시는 관세음보살,
예로부터 ‘엄부자모(嚴父慈母)’라 했습니다.
아버지는 엄하게 키우려 하지만, 어머니는 감싸줍니다.
이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입니다.
줄여서, [관음경]이라고도 하지요.
우리의 관음신앙은 이 [관음경]에 의지하는 바가 큽니다.
[관음경]에서는 말합니다.
“무슨 소원이 있든지, 말하라.
다 들어주겠노라." 원하는 바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칭념(稱念)하라는 것입니다.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의 힘,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念한다면 못 이룰 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남자를 낳고 싶으면 남자를,
여자를 얻고 싶으면 여자를 얻게 된다고 까지 말합니다.
[관음경]에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은 대단한 분입니다.
못 하실 일이 없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행이 베풀어지는 경우는
대부분 극한 상황입니다.
그럴 때, 관세음보살을 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전은 시대마다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천수경] 역시 관음신앙의 경전입니다.
[천수경]에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이라 되어 있지요? 원하는 바는
모두 그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심이 아니라 불심입니다.
부처님 마음과 같은, 우리가 갖고 있는
본심에서 우러나는 원은 다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소원성취를 하고 싶으면,
먼저 그 원이 올바른 마음에서 우러난
올바른 원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단순히
관세음보살님께만 모든 것을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念하노라면,
어느 덧 저절로 세 가지 독한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이기 때문이며,
관세음보살을 念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자비를 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 되기 운동은 [법화경]만이 아니라
[화엄경]에도 역시 관세음보살이 나옵니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찾아뵈온 53선지식 중
28번째 선지식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문답을 나누는 이야기가 [입법계품]입니다.
간략히 말하면,
“어떻게 보살행을 행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배워야 하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53선지식은 각기 하나의 법문을 설해줍니다.
그런데, 그 법문들은
대개 그들이 익히고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선재에게 설해주신 법문은
곧 ‘대비행의 법문’입니다.
큰 자비행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살행을 행하며,
어떻게 보살행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큰 자비행을 실천하라.”
이와 같은 문답이 관세음보살과 선재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과
[화엄경]의 '관세음보살'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은 우리를 구해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구함을 받는 자입니다.
반면, [화엄경]의 관세음보살은 스승입니다.
선재의 스승, 중생의 스승입니다.
스승은 물음을 받고 대답하는 자입니다.
구함을 받는 자는 구제하는 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는
스승처럼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스승의 어깨를 밟고 넘어서는 것,
스승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의 기쁨입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하지 못한 제자는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지요.
나무 관세음보살
- 정산 스님 / 감사원장스님 '관음법문'
- 그 림 / [수월관음보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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