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 '예스' 라고 말하라.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옳다'
그리고 '아름답다'
당신이 과거에 행해 온 수많은 잘못들에 대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괜찮다'고 말하라.
그리고 '용서하라'
삶의 매 순간은
그것 자체로 숭고하고 경이롭고 아름답다.
당신은 결코 '잘못'을 하거나,
'죄'를 지을 수 없다.
스스로 그렇다고 여기기 전까지는.
우주법계는, 신과 붓다는,
그 누구도 심판하거나 벌하지 않는다.
심판하고 벌하는 유일한 존재는 '나'일 뿐.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남들을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술을 퍼 마심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매일같이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고 나 밖에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름답고 경이롭고 온전하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써 온전한 '진리'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당신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당신의 삶은 온전한 진리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무엇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이,
계율을 지키지 않더라도,
절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신이나 붓다를 섬기지 않더라도,
종교가 없거나,
직업이 없거나,
돈이 없거나,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그 하나 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우며,
매 순간 진리로써 피어나고 있다.
우리의 삶에 실패란 없다.
실패처럼 여기지는 삶의 공부가 있을 지언정,
실패는 없다.
이 사회에서,
종교에서,
법에서,
수없이 말해 왔던,
'이렇게 살아라'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살아야지만 착한 사람이다'
'이 계율이나 율법을 어기지 말라'
'이것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
'이런 행위를 신께서는 싫어한다'
라고 말해왔던 그 모든 것들에서
자유롭게 놓여나라.
그와 같이
나를 제한하고 억압하며,
두렵게 만들어 왔던,
모든 틀로부터 자유로와 지라.
그것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이다.
다르마의 속성이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특정한 가르침이나,
율법을 제한시켜 놓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가거나,
최악의 과보를 받는다고 이야기 해왔던
그 모든 도그마를 이제는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그러한 방편에 갇혀
자유를 억압하며 살아 온
지난 날들을 생각해 보라.
방편은 자유롭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역사를 이어오며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방편에 스스로 갇힌 채
방편 뒤에 드넓고도 광활한
자유로운 진리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야말로
참이며 진리 그 자체다.
다른 그 누구도,
다른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에도
기대거나 얽매일 필요는 없다.
배울 수는 있을 지언정,
거기에 속박되어
자신의 자유를 가두지 말라.
자유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자유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을 통제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제한하는 각종의 법칙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수업을 하며,
그 수업 속에서
자유에 대해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라.
이 학교에서만이
올바른 자유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며,
이 학교에서만이
진정한 자유를 배울 수 있다고 억압하면서,
만약 이 학교를 벗어나게 된다면,
당신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거라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이제 그런 학교에서
자유롭게 뛰쳐나와야 할 때다.
학교 밖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아니,
이미 학교에서 배울 필요도 없이,
나라는 존재 자체,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온전한 진리의 현현이었다.
당신은 그 학교에서
아무리 배운다고 할지라도,
그 학교가 가르쳐 준 도그마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진리라고 믿게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사실은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 그 자체의 진리는 없다.
다만 나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모든 것은 자기 규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규정하는 나의 진리가 있을 뿐,
그것 자체로써 온전한 객관 진리는 없다.
'이것이 진리다'
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불법의 핵심 가르침이다.
내가 진리라고 규정하는
나의 진리가 있을 따름이다.
방편의 진리가 있을 따름이다.
그동안 세상에서 이야기 해 온
진리라는 모든 말들은, 진리가 아니었다!
붓다 입멸 후 500여 년 경
나가르주나라는 제2의 석가라는 보살은,
그러한 사실을
승의제,
제일의제라고 이름함으로써,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진리라고 설했다.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며,
절에서 가르칠 수 있는 진리는
그저 세속제,
즉 방편의 진리 밖에 없음을 역설하였다.
'낙서금지'라고 벽에 씀으로써
낙서를 금지할 수 있는 방편은 될 수 있지만,
낙서금지라는 그 말 자체가 이미
낙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방편으로 받아들일지언정,
그 말을 따라
너도 나도 벽에다
'낙서금지'라고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역사가 해 온 일,
종교와 사상가와 진리라고 들어온 모든 가르침이 해 온 일이
'낙서금지'라는 말의 덧칠에 불과했다.
이제 낙서금지라는 그 말을 분석하고,
따라 쓸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 텅 빈 벽에
어떤 낙서도 하지 말라.
그저 텅 빈 채로 있으라.
그저 매 순간에
존재하고 있을 뿐,
어떤 방편의 글씨도 쓰려고 하지 말라.
우주법계는 그저 매 순간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다.
붓다는 그저 매 순간 온전히 존재한다.
신은 매 순간의 있음이다.
아무런 판단도 없고,
그 어떤 진리라는 생각도 없으며,
그저 존재 그 자체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그저 텅 빈 본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떠들지 마!'라고 소리치지만,
사실은 그 말 자체도 소음에 불과하다.
이제 그런 말도 따라하지 말고,
그저 침묵으로 존재하라.
떠들지 않게 하기 위한
그 어떤 말도
사실은 다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말도
진리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소음일 뿐, 진리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진리는 없다.
진리가 없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없지만,
그렇기에
당신이라는 삶은
그 자체로 진리인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어떤 행위를 하든,
당신의 삶은 하나의 숭고한 진리이다.
그렇기에 진리는 없으며,
자기 규정, 자기 진리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옳다.
자기 진리에서는 언제나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다.
붓다는, 신은, 진리는,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었다.
붓다는 나를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
신은 꽃 한 송이를 통해 진리로 피어난다.
산과 들과 꽃 한 송이와
당신과 나를 빼고,
별도의 신이나 붓다가 있다고 생각지 말라.
아무리 수준이 낮거나,
돈이 없거나,
계급이 낮거나,
능력이 없거나,
성격이 나쁘거나,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라.
그는 그 어떤 높은 자리에 있는
그 어떤 고귀한 자리에 있는
성스러운 사람과 티끌 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는 그 자신의 진리를 꽃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높거나 낮다거나,
잘났거나 못났다거나,
선하거나 악하다는 등의 분별은
무명에 휩싸인 인간이 하는 차별심일 뿐,
진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
오직 진리는, 붓다는, 신은
일체 모든 존재를
완전히 동등하게 사랑하며,
존귀하여 여기며, 찬탄할 뿐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난 부분에 대해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 공부를 통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보다 높지 않고, 낮지도 않으며,
나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신의 사랑을 더 많이 받거나 적게 받지도 않으며,
더 많이 깨달았거나 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온전한
높고 낮지 않은 자기 자신의 진리의 길을
아름답게 걷고 있는 중이다.
우리 모두는 신이며,
붓다이고,
진리 자체로써 동등하다.
설사 나쁜 짓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아름답다.
가해자는 가해자의 몫을 통해 깨닫고,
피해자는 피해자의 몫을 통해 깨닫는다.
그 둘은 원한과 복수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깨닫게 해 주는 아름다운 스승이요,
사랑스런 관계다.
마음 깊은 곳에서
피해 받음을 통해, 핍박 받음을 통해
무언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었던 사람,
혹은 피해 받는 것을 스스로 원했던 사람이
이 세상이라는 연극 속에서
피해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양쪽 모두는
저마다 자신의 진리를 행하고 있을 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용서받고 있다.
물론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를 빼고.
처벌이나, 죄의 과보는
언제나 나 자신이 원했을 때만 온다.
만약 내 안에서
온전히 그 모든 것을 용서했고,
그 모든 것이 다 완전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면
당신은 과보를 받을 필요가 없다.
업보는
기계적으로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근원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저 존재하고 있는!
그러니,
더이상 자기 자신을 억압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라.
당신은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
이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말라.
우주의 근원은
자비와 사랑의 파장,
그 파장 안에 넘실거릴 뿐이다.
거기에 악, 두려움, 근심, 걱정, 죄라는 것은
붙을 자리가 없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역사에서,
종교에서.
수도 없이 많은 각종의 학교에서
가르쳐 온
모든 것을 넘어 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넘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온전한 존재함,
그저 '있음'으로 매 순간에 있는 것이다.
오로지 매 순간에
행복하게 존재하고 있으라.
완전히 안심한 채,
두려워할 것 없이,
매 순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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