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문제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온전히 ‘나 자신’이 될 때 그 때 비로소
온전한 ‘전체’가 되는 것이고, 법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수행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늘 무언가로 또 누군가로 살곤 한다.
나를 규정지을 때 꼭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나 판단 분별이 개입된다.
그러다 보니 나라는 순수한 존재가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잘나고 못난, 지혜롭고 어리석은,
수행을 잘 하고 못 하는 그런 분별의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나’ 자신으로써 남았을 때 가장 평화롭다.
누군가와 비교 분별 판단하여 나 자신을 잃어버렸을 때,
누군가 보다 더 낳거나 혹은
못난 사람이 되었을 때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한다는 것은
그저 ‘나 자신’이 되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그만이지
다른 어떤 순간을 바랄 것도 없고,
다른 누군가와 견주어 질 것도 없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누구처럼’ 되는 것에 있다.
대통령처럼 훌륭한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거나,
회장처럼 훌륭한 회장이 되어 돈을 많이 벌길 바란다거나,
큰스님처럼 훌륭한 스님이 되어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거나…
그러나 그러한 바램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데서 오는
충만한 하나 됨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누구처럼 되고자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은 벌써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우리 안의 평화는 깨어지고 만다.
햇살은 햇살대로 온전한 법계의 나툼이고,
바람은 바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모든 것이 온전한 법신불의 나툼이며,
대자연의 조화로운 어우러짐이다.
나무가 꽃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꽃이 나무가 되고자 몸집을 불릴 것도 없이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들 자신으로써 온전하게 존재한다.
꽃은 꽃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저마다 자신의 모습으로써 온전한 법계의 법칙에 동참한다.
다만 사람들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누구처럼’ ‘남처럼’되고자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만이 대자연 법계의 조화로운 법칙에 따르지 못하고
수도 없이 번뇌를 일으키며 세상을 파괴하고
자신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며
평화란 다른 어떤 미래의 일이 아니며,
다른 존재처럼 되는데서 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오직 ‘나 자신’이 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으로써 그냥 좋은 것이다.
대 긍정으로 그저 큰 좋은 마음일 뿐이다.
수행을 하고 있는 순간 또한 그냥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관하고 있는 순간 이렇게 깨어있는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이다.
온전하게 깨어있을 때는 내가 나 자신이 된다.
나와 내 밖의 다른 존재의 구별이 무의미하고,
지금의 어리석은 나와 미래의
깨달은 지혜로운 나라는 구분도 없다.
그저 지금 이렇게 온전한 자각만 있을 뿐.
그러한 자각이 있을 때 평화가 온다.
그런데 보통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수행을 하면서 ‘내가 수행한다’는 ‘나는 기도를 잘 한다’는
그런 상이 생겨나는 것이 큰 병통이란 말이다.
‘나는 수행자다’ ‘나는 수행을 잘 한다’는 말 속에는
또 다른 분별이 자리하고 있고,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한다는 암시가 있다.
다시 말해 스스로 수행한다는 생각이 있을 때,
수행 안 하는 사람에 대해 나와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는 이렇게 매일 아침 기도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기도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있구나 하는
얕보는 생각도 들고, 다른 수행 안 하는 사람들에 대해
참 어리석다거나, 불쌍하다거나, 못 났다는 분별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은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견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수행하고 있는 그 자체로써 그만인 것이다.
수행한다는 생각도 없는 그저 함이 없이 하고 있는 그 자체인 것이다.
견준다는 말, 비교한다는 말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있고,
차별이 있으며 그랬을 때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나 자신’이 된다는 말은 누군가와의 차별이나 분별이
사라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속에서 나를 규정짓는 것이 아닌
그저 아무런 분별도 비교도 다 끊어진 그 속에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한 비춤, 알아차림이 있을 때
내가 진정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온전한 각성의 상태에는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다.
관(觀)이 있을 때 내가 사라지고,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지며,
나와 나의 문제가 사라지고,
내가 그대로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 일인 것이다.
내가 있고 나와 구분되는 무언가가 있을 때
그 때 모든 괴로움은 시작된다.
만약 내가 참된 수행을 하고 있다면
수행을 한다는 생각도 없을 것이고,
수행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을 탓할 일도 없으며,
나보다 수행 잘 하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도 없을 것이다.
온전한 수행 속에서는 나와 남의 분별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내가 수행할 때,
남도 똑같이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수행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행여 게으르게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수행을 하는 순간 그들도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내가 수행을 할 때 이 세상 전부가 함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아니 그 때 내가 이 세상 전부가 되는 것이다.
참된 수행이라는 것은 이렇듯
아무런 차별도 구분도 없는 것이란 말이다.
내가 수행할 때 남도 똑같이 수행하는 것이 될 수 있을 때,
남들과 비교나 판단이나 시비 분별할 것도 없이 다만
‘수행’만이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지,
수행을 하면서도 잘 한다거나 못 한다거나 시비가 붙으면
벌써 수행은 수행이 아닌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온전히 수행하는 순간은 다만 수행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수행하는 사람이 남들 수행 안 한다고 탓할 것은 없다.
나는 수행자라고 으쓱할 것도 없고,
나의 훌륭한 수행에 대한 과보를 바랄 것도 없다.
수행이라는 그 말 자체도 끊어져야 하고,
수행하는 주체인 ‘나’라는 것 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내 수행이 바로 남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내가 참된 수행을 할 때 온 세상과 내가 참된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들 수행에 대해 참견할 것도 없고,
남들 게으름을 탓할 것도 없고,
남편이나 자식들 수행 안 한다고 안타까워할 것도 없고,
나는 수행 잘 한다는 상을 가질 것도 없으며,
반대로 수행이 잘 안된다거나,
수행력이 없다거나 할 것도 없이
내가 수행할 때는 오직 수행만이 있으면 된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렇게 모든 차별이 끊어지고 내가 ‘나 자신’이 될 때,
온전한 깨어있음이 유지될 때,
그 어떤 일도 모두가 수행이 되고 기도가 되는 것이며,
나의 수행이 모든 이들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다만 내 수행만을 볼 일이지,
남들의 수행에 대해 따질 것이 없다.
남들이 수행 못 한다고 얕볼 것도 없고,
나보다 수행 잘 한다고 기가 죽을 것도 없다.
사실 수행을 잘 하고 못 한다는 것은 없다.
내 분별이 수행을 잘 하고 못 한다고 나누는 것이지,
참된 수행의 세계에서는 잘 하고 못 하고도
또 하나의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주위를 돌아보지 말고 다만 ‘나 자신’이 되시길…
다만 나 자신으로써 내 수행의 길을 걸으시길…
--- 법상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