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서
온갖 인정해서 온갖 것에 걸려 있고
구속돼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며,
모든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산을 인정하면 산에 구속되고,
돈을 인정할 때엔 돈에 구속되고,
사랑을 인정하면 나를 사랑에 빼앗긴다.
술을 좋아하면 술에 미친 만큼 자유가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네가 무엇이냐?
어떤 것이 너냐?
이렇게 따지면, 이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내세우는 이가 없다.
이것은 나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삶이라면
그 얼마나 서글픈 삶이 되겠는가?
이것이 잘못되면 인생에는 나면서부터
눈물이 있고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농사짓고 장사하느라고 자기를 돌아볼 여가조차 없어서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해답을 못 얻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놓고,
그러면서 제 잘난 멋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의 뜻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이 사이다.
천지와 만물은 그 자체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진 우리가
인내할 수 없은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만 있다.
저 물건이 그렇고 또한 이 마음도 그렇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을 막론하고
그대로는 다 천변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이 가상의 환영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그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불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것들을 산이다, 물이다.
너다, 나다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다.
나를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내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간에 실로 없는 존재다.
만약 무엇을 인내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내를
다시 인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행사하는
능동적인 인간집단에 의하여 조성될 뿐만 아니라
자연 또는 사회 등 환경의 도전에 대한
역사의 기능적 중심은 바로 개인의 창조적 인격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환경은 어떠한가?
세계는 지금 양대진영의 대립이 심각한 대로 있다.
군축을 운위하면서도 군확은 치열하게 경합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는 화염이 오르고 있다.
핵전쟁을 경계하면서도
인류는 한 찰나에 전멸될 수 있다는 위험신호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도전에 인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도전에 대한 외면은 바로
역사의 사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나를 찾아내야 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는 나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며 광명이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 뿐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 독존, 독권하며 유일무이한
실상진아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나다.
이 참 나는 발견 체득함으로써 우주의 주인공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해서 자재할 수 있다.
출처: 혼자걷는 이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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