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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네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너냐? / 청담스님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2.13|조회수44 목록 댓글 0

네가 무엇이며 어떤 것이 너냐? / 청담 스님

중생들은 모든 것을 인정해서 온갖 인정해서 온갖 것에 걸려 있고 구속돼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며, 모든 망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참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산을 인정하면 산에 구속되고, 돈을 인정할 때엔 돈에 구속되고, 사랑을 인정하면 나를 사랑에 빼앗긴다. ​ 술을 좋아하면 술에 미친 만큼 자유가 없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모두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네가 무엇이냐? 어떤 것이 너냐? 이렇게 따지면, 이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내세우는 이가 없다. 이것은 나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내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삶이라면 그 얼마나 서글픈 삶이 되겠는가? 이것이 잘못되면 인생에는 나면서부터 눈물이 있고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 농사짓고 장사하느라고 자기를 돌아볼 여가조차 없어서 자기가 무엇이냐 하는 해답을 못 얻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놓고, 그러면서 제 잘난 멋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의 뜻도 침착하게 생각해 보지 못하는 것이 사이다. 천지와 만물은 그 자체가 생겨난 그 순간부터 그것이 없어질 때까진 우리가 인내할 수 없은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흘러가고만 있다. 저 물건이 그렇고 또한 이 마음도 그렇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물을 막론하고 그대로는 다 천변만화로 변하면서 토막토막 측정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 연속선이 가상의 환영이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그러한 그것들이 또한 그렇게 흘러서 가는 이 인생의 눈앞으로 번갯불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 그것들을 산이다, 물이다. 너다, 나다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다. 나를 이름이 무엇인가? 지을 수 있거든 불러보라. 그러므로 그가 인내하고 있는 기둥이나 기둥 모양은 이 우주간에 실로 없는 존재다. 만약 무엇을 인내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가 그의 인내를 다시 인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역사는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행사하는 능동적인 인간집단에 의하여 조성될 뿐만 아니라 자연 또는 사회 등 환경의 도전에 대한 역사의 기능적 중심은 바로 개인의 창조적 인격활동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의 환경은 어떠한가? 세계는 지금 양대진영의 대립이 심각한 대로 있다. 군축을 운위하면서도 군확은 치열하게 경합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는 화염이 오르고 있다. 핵전쟁을 경계하면서도 인류는 한 찰나에 전멸될 수 있다는 위험신호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도전에 인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이런 도전에 대한 외면은 바로 역사의 사멸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 나를 찾아내야 한다. 나란 무엇인가? 나는 나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며 광명이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 뿐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 독존, 독권하며 유일무이한 실상진아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나다. 이 참 나는 발견 체득함으로써 우주의 주인공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해서 자재할 수 있다. 출처: 혼자걷는 이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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