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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사진

김교각스님 유품

작성자대공|작성시간11.12.15|조회수113 목록 댓글 0

 

 

 

 

  

 

구화산에 머물고 계신 지장왕보살 - 김교각 스님

 

김교각스님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AD 696, 신라 孝昭王4년)에 태어난 신라인으로 33대 성덕왕의 맏아들이다. 왕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김중경(金重慶)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후일 출가하여 계명(戒名)을 교각(喬覺)으로 받으면서 김교각(金喬覺)이라 불리었다. 스님은 비구계 수계 후 719년, 속납 24세에 당나라에 건너가 75년 동안 수도 교화하시다가 99세 때(794년) 입적하셨는데, 이 구화산(九華산)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내셨다. 스님은 처음부터 김지장(金地藏)이라는 호(號)로 불렸다 하니 그의 지장 신앙은 본국에서부터 깊었던 모양이다.

 

김교각 스님께서는 입적하실 때 유언하신 대로 시신을 안좌시킨 3년 후에 탑에 안치하려 석함을 열어보니 안색과 모습이 살아계시던 모습 그대로 생생하였다. 옮길 때 골절이 움직여 쇠사슬을 흔드는 소리가 울렸다. 이는 경전에서 "보살의 신체는 쇠사슬과 같아서 모든 마디에서 나오는 소리가 난다(菩薩鉤鎖 百骸嗚矣)"과 서로 부합된다. 탑을 세운 땅에 빛이 발하여 마치 불 같으니, 그 형상이 원광(圓光)과 같았다. 그러므로 승속의 대중이 힘을 합쳐 탑을 보호하였다.  사부대중이 지장보살 현신의 나투심으로 생각하고 받들어 모시어 육신탑(肉身塔․지장탑)을 세워 모신 것이 '구화산 지장도량'의 시초가 된것이다. 스님의 입적 후 1,200년 동안 역대의 왕조를 무수히 거치면서 오늘날도 전세계에서 모여드는 참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니 스님의 중생제도의 대원이 끝이없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김지장스님이 살아있을 때의 높은 덕과 입적한 후의 신이한 현상이 반영되어 보살이 응화(應化)한 당체(當體)로서 존경을 받아들여졌으니, 당시에 이미 광범위하게 민중에게 뿌리 내렸다 하겠다. 그곳의 민중 신앙으로 받들여져서 대가람으로 변하게 된 구화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도 김교각 스님을 '지장왕 보살'이라 일컫고 있으며, 어느 절에나 '유구필응(有求必膺)'이라는 글귀가 써 붙어 있다. 중생을 구하는 것도 많고, 구하는 것이 많으니 고통이 그칠 날이 없다. 김교각지장왕보살에게 와서 기도하면 구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민중의 신앙이 뿌리 깊게 배어 있다.

 

구화산의 99봉과 99세로 열반한 신라의 왕자 김지장 스님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99년 9월. 스님이 구화산에 들어 온 나이가 24세 였기에 연화좌대 높이를 24m로 또한 구화산에서 75년을 머무르다 입적하셨기에 입상의 높이를 75m로 하여 총 99m(좌대포함 - 155m)의 세계 최대 규모의 지장스님의 청동불상이 2012년 7월말에 완공목표로 건립 중에 있다.

 

구화산 불교협회가 중국 정부에 건의해 1999년 지장보살 성도일에 착공식을 가진 이래, 2007년 9월부터 공사에 들어간 김교각 지장왕보살상은 명실공히 세계 최대 규모의 불상이 될것이다.

 

 

 

 

 

중국 구화산 육신보전에 보관되어 있는 김교각스님께서 쓰시던 보관과 신발

스님께서는 7척이 넘는 장신이었다고 하는 것이 증명되듯이 엄청나게 큰 보관과 신발의 모습이었다.

 

2009년 11월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원 주관으로 '한 · 중 · 일 국제세미나'가  '지장신앙과 동아시아의 불교 교류' 주제로 열렸었다. 여기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김지장의 사적은 주로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 『송고승전(宋高僧傳)』, 『신승전(神僧傳)』 및 여러 종의 『구화산지(九華山志)』 등에 실려 있다. 당대(唐代) 비관경(費冠卿)이 원화(元和) 8년(813)에 찬술한 『구화산성사기』는 년대가 가장 빠른 까닭으로 믿을 만하다. (- 張總/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종교연구원 연구원 논문에서)

 

  그때 승려 지장(地藏)이 있었는데, 바로 신라왕자로서 김(金)씨의 근속으로, 목이 솟아 골상이 기이하고 키가 7척(尺)에 달하며 힘이 장사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육적(六籍)의 세상에서, 세 가지 깨끗한 가르침[유불도(儒佛道)]에서 제일의(第一義)만이 마음에 계합된다."라고 하고, 출가하여 바다를 건너 배를 버리고 걸었다. 구름이 쌓인 이 산을 보고서 걸어서 천리길을 부지런히 나아갔다....이로부터 산에 돌아와 세속과 단절하였다....오직 한 승려만이 머물러, 석실(石室)에서 눈을 감고 수행하였으며, 그 옆에 다리가 부러진 솥에는 흰 흙과 소량의 쌀 뿐이니, 그것을 익혀 먹고 있었다....여름에는 흑을 섞어 먹고, 겨울에는 옷으로 불을 아껴...""  스님의 수행과 행족을 존경할 만한 대목이다.

 

나무 지장왕보살마하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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