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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스크랩] 무비스님이 가려 뽑은 불교 명구 365 ㉻ 12월19일

작성자자비심|작성시간19.10.22|조회수30 목록 댓글 0


 




                                                               1219


                        삼승을 위해 차례대로 금 같은 말씀을 설하신 것은

                          삼세(三世)의 여래가 다 같이 말씀하신 것일세.

                 처음에는 유()와 공(空)을 말하니 사람들이 다 집착하더니

                          뒤엔 공도 유도 아니라고 하니 모두 다 버렸네.


                                  三乘次第演金言 三世如來亦共宣

                                              삼 승 차 제 연 금 언   삼 세 여 래 역 공 선

                                  初說有空人盡執 後非空有衆皆捐

                                              초 설 유 공 인 진 집   후 비 공 유 중 개 연


                                                        - 십현담 5-1, 동안 상찰


                                                          ..................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아마도 가장 많이 만나는 말 중의 하나가 일승(一乘)이니

   삼승(三乘)이니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중생을 교화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삼승은 이와 같이 각자에게 알맞은

   방법을 찾다 보니 자연히 생겨난 방편이다. 삼승이 발전하여 팔만 사천 방편문(方便門)이

   있다고도 한다. 세존의 팔만사천법문은 곧 사람들의 팔만 사천 근기에 상당하는 방편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승()이란 사람이 타고 다니는 수레와 같은 것으로, 중생을 실어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일승은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成佛)한다는 견지에서, 이들을 구제하는 교법은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삼승은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을

   말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이나 소질과 수준에 맞게 셋으로 나누어서 설한 것이다.


       삼승에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 있다. 성문승은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교법이다.

   연각승은 인연(因緣)의 도리를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는 길인데, 대개 십이인연법에 의지

   한다. 스승을 찾지 않고 스스로 십이인연법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교법이라는

   의미에서 독각승(獨覺乘)이라고도 부른다.  보살승이란 보살들이 행하는 육바라밀

   (六波羅蜜)이라는 여섯 가지의 실천 덕목으로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을 말한다.


        이러한 삼승의 가르침을 근기에 따라 차례대로 펼쳐 놓은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다 같이 설하신 것이다. 얼핏 보면 그 가르침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단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동안 상찰 선사의 「십현담」의 표현대로 보면

   '있다[]', '없다[]',  '있고 없음을 모두 버리다[皆捐]'이다.


      부처님이 맨 처음에는 "고통도 있고, 그 고통의 원인도 있고, 고통을 소멸한 경지도

   있고, 고통을 소멸하는 길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세계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앞서 말한 가르침과 그 사실들은 모두 공하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상반된 말에 다 집착하였다.  사람들은 '있음'에 집착하는 것은

   번뇌요, 망상이요, 병이라는 사실을 쉽게 안다.


      그러나 '없음'에 집착하는 것도 역시 번뇌요, 망상이요, 병인 줄을 모른다.

   그것은 '있음'에 집착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병이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는 데 특별한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금만 한입 가득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없음'은 '있음'에 대한 집착을 치료하는 데 특효약이지만 '없음'에 대한 집착 또한 '있음'에

   대한 집착  이상으로 심한 고통이 된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줄곧 '없음'에

   집착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의 실상은 '없음'도 '있음'도 아니라고 설하였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나니 '있음'과 '없음' 모두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그 둘을

   자유롭게 쓰는 중도적(中道的) 삶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사진/시월 어느 날, 오대산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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