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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노래 들어요.

[스크랩] ♬나가거든 - 조수미 [명성황후 ost]

작성자귀여운 여인|작성시간11.04.02|조회수174 목록 댓글 0

 

 

 

 

"나는 조선의 국모다. 비록 타오르고 타올라 그저 한줌의 재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빗물에 쓸려 외롭게 떠돌지라도 이것이 어찌 내 마지막이라 하겠느냐..." 

 

 

[일본신사에 보관된 명성황후 시해칼] 

 

조선후기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복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으니 이른바 을미사변의 시작이었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전체 길이 120cm 칼날 90cm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적혀 있는 문구는 가슴에서 피가 끓어 오르게  한다.

칼주인의 자객이 시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 한다.

 

시해 칼은 히젠도라고 불리며 16세기 에도 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이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 시해용으로 만들어진

칼은 명치 41년(1908) 토오 가쯔아키란 사람이 신사에 기증했다고 한다.

 

 

 

기증 관련 서류- 좌측상단에 왕비를 이 칼로 베었다란 기록, 하단에는 기증자의 이름도 보인다.

 

 

토오 가쯔아끼(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 중에 하나이다.

일본의 저명한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쯔아끼, 나(데라사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장에 의하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 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조 난입한 3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정종미. ‘명성황후’(210×210㎝, 한지·모시·안료·염료·콩즙·금분, 2006)

 

 

☆ 나 가거든 - 조수미 ☆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볼까요 난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 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흩어진 노을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지면
그땐 웃어질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일로

 

저기 홀로선 별 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만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 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 까지도 사랑하길

부디 먼훗날 나가고 슬퍼하는 이
나 슬픔속에도 행복했다  믿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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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사과향 그녀 (2008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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