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히 2019년 가을 무렵 낙동강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명례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언덕 위의 성당은 작고 오래된 기와집이었습니다.
성호를 긋고 꿇어앉아 이 곳으로 이끌어주신 것에 감사드렸습니다.
올려다본 성당 지붕 아래에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모상은 어린 소녀의 얼굴이고, 입술은 약간 힘을 주어 다문 듯 입술 아래 턱 부분이 조금 들어가 보이며, 왼쪽 위를 바라 보고 있는 형태입니다. 얼굴 뒷면에는 건물의 대들보에서 이어지는 짙은 색의 기둥 나무가 보입니다.
얼굴 전체와 목, 손은 붉게 칠해져 있어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머리에 가리개를 하지 않았고, 짙은 노란색의 긴 머리칼이 어깨 뒤로 넘겨져 있습니다. 옷은 아래 위가 이어져 있고 흰색으로 주름이 많이 접혀져 있으며, 그 안으로 소매를 동여맨 붉은 속옷이 보입니다. 왼쪽 어깨에는 하늘색 망토가 걸쳐져 있는데 바람에 날리는 듯이 휘감겨 있습니다.
발은 보이지 않고 발 앞에는 두 날개를 단 아이들이 파란 색, 붉은 색, 황금 색 띠를 두르고 합장하거나 꿇어앉아 가슴에 손을 얹은 형태로 위로 보고 있습니다.
성모상의 받침으로 세 아이들이 딛고 있는 부분은 사각으로 상단부분은 둥글게 마무리되어 있으며 망토보다는 약간 짙은 하늘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성모상의 뒷면에는 흰 꽃송이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 배경판은 상단 모서리를 둥글게 마무리 한 넓은 사각형태입니다.
2. 명례성지의 성모상은 스페인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 ~ 1682)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상’의 전통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는 파체코와 그의 제자들, 후안 안토니오 에스칼란테,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무리요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상’ 작품 중 하나를 보겠습니다.
'원죄 없이 태어난 성모 마리아'는‘흔히 한자어로 '성모 무염시태’(Immacolata Concezione)’라고 합니다. 17세기 무렵에는 ‘성모 무염시태’ 상이 많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특히 바로크시기에 들어서면 성모의 대관식만큼이나 자주 선호되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 무염시태(원죄없이 잉태됨)의 구체적인 도상이 성립된 것은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12월 8일을 무염시태의 축일로 공식선언 한 지 150년이 지난 후, 스페인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프란시스코 파체코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1649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회화의 기술'에서 가장 이상적인 무염시태의 도상 기준을 정립하였습니다.
파체코의 기술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햇살이 가득한 천국에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옷과 푸른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12개의 별이 빛나는 후광과 왕관을 쓰고 초승달을 딛고 서서 두 손은 가슴 위에 기도하듯이 모은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회화 기술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무염시태상입니다.
특히, 스페인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가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도시 세비야는 17세기초 당시 인구 15만명으로 수도 마드리드를 능가하는 대도시였습니다. 파리와 나폴리에 이어 유럽의 3대 도시로 손꼽혔던 세비야는 스페인의 식민지인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금과 은을 독점 수입하던 주요 항구도시로서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1649년 전염병이 창궐하여 세비야 시민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적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연이은 기근으로 인해 서민들은 가난고 굶주림에 지쳐갔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구심점으로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예술 또한 신앙심을 고양시키는 종교화가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는 세비야의 이웃들과 위기와 고난의 시대를 함께 겪어 나가면서, 무염시태 성모화를 통해 전염병의 공포와 지긋지긋한 가난에 지친 서민들을 위안해주고자 했습니다.
3.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모신심은 교회창설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서학서로부터 발원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회장 등 교회지도자의 사목방침과 지도방향으로 구체화되어, 당시 성모님의 동정을 본받고자 하는 동정녀의 모임과 동정부부의 탄생은 물론이고 정기적으로 묵주신공을 바치는 명도회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이러한 초기교회 신자들, 특히 순교자들에게서 두드러진 성모공경의 전통은 박해시대 프랑스 선교사들의 지도와 모범으로 더욱 활성화되고 심화, 발전되었습니다. 프랑스 선교사들 중에서도 엥베르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성모신심은 한국 초기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31년 한국 천주교회를 관할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성모신심, 성모공경의 전통을 한국 천주교회와 한국인 교우들에게 심어주는데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성모신심은 무염시태 성모 주보 청원, 성모성심회 창설, 교우들의 신심활동을 위한 성물 반입, 성모 축일별 사목활동 구역 배정 등으로 구현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병인박해 3월 31일 신석복 마르코가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고, 1887년 로베르 신부가 명례를 방문하고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1897년에 명례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이후 명례본당은 기와집으로 완공되고(1927년), 태풍으로 전파된 후 193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4. 명례성지의 성모상은 ‘성모 무염시태’상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제작되었고, 명례성지 설립 초기에 한국 천주교회에 영향을 미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성모신심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저는 이렇게 명례성지 성모상의 유래와 명칭, 도상적 특징들을 오랫동안 묵상하였습니다.
그 후 다시 찾은 명례성지의 작은 돌과 나무들, 계단과 언덕은 제게 앞으로도 이 곳에서 가톨릭의 전통과 한국천주교 선조들이 선물하는 내밀한 향기들을 세밀하게 알아채 가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명례성지를 다녀온 감상을 자유게시판에 올립니다. 이어서 올릴 명례성지 순례기도 몇 편 남아 있습니다. 모두 명례성지에서 제가 발견하고, 묵상하고, 그로 인해 위안과 격려를 얻은 것에 대한 감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 느낌을 적은 이 글이 혹시라도 저의 경솔함과 천박함으로 인하여 다른 분들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한 분이라도,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면, 바로 글을 접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은 분들에게 혹시라도 쓸데 없는 분심을 낳게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순례 후기와 경험담을 소개함으로써 얻는 미덕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우선 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