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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작성자명징|작성시간15.05.21|조회수131 목록 댓글 9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1
오래 벼른 일, 만보(萬步)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
추억 엮기도 아닌 혼자 그냥 걷기!
오랜만에 냄새나는 집들을 벗어나니
길이 어눌해지고 이른 가을 풀들이
내 머리칼처럼 붉은 흙의 취혼(醉魂)을 반쯤 벗기고 있구나.

흙의 혼만을 골라 밟고 간다.
길이 속삭인다.
계속 가요,
길은 가고 있어요.
보이는 길은 가는 길이 멈춘 자리일 뿐
가는 것 안 보이게 길은 가고 있어요.
혼자임이 환해질 때가 있다.


2
바람 잘 통하는 한적한 곳이
하늘과 가깝다고는 얘기 않겠다.


3
등성이 오르다가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을 지나친다.
이름을 모르다니?
산수유겠지. 산수유,

저 나무의 황홀한 보석들, 저걸 어떻게 다 꿰지?
꿰서 어디 걸지? 보석 탐하며 걷다 미끄러져
사람의 삶 한 토막이 길 위에 눕는다.

삶의 토막들이 줄지어 누워 있어도
연결되지 않고 서로 부를 때가 있지.
누운 김에 다음 토막을 불러 본다.
대답이 없다.
옷의 흙을 털며 일어난다.


4
늙었다고 생각하면 길이 덜 미끄러워진다,
조심조심.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향해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방금 빨간 열매를 쪼러 온 허름한 새의 흰 꽁지에는 열매를 쪼는 기쁨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영원히 젊은 삶이라는 헛꿈이 사라지면
달리 늙음과 죽음이란 없다.
소리꾼에겐 마지막 소리가
대목(大木)에겐 마지막 집이 잡혀 있을 뿐.

사람은 길을 가거나 길 위에 넘어져
거기가 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머리 위 나뭇가지들이 레이스 친 둥근 하늘을 만들고
돌고래 구름이 헤엄쳐 가고
마음속이 아기자기 해진다.

사람 하나가 어느 샌가 뒤로 와 스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바쁜 사람,
메뚜기들이 바지에 달라붙는다.

샘이 잦아들고 있는 밭귀에서 발을 멈춘다.
물이 흐르지 못하고 땅에 잦아드는 것을 보면
주위가 온통 젖다 마는 것을 보면
누군가 가다 말고 주저앉는 모습,
가지 못하면 자지러드는 것이다.
주위를 한참 적시고 마는 것이다.


5
길 위에 멈추지 말라.
사람들의 눈을 적시지 말라.
그냥 길이 아닌
가는 길이 되라.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
임제는 이 길 만큼 좁은 호타(滹沱) 물가에서
길이 되라고 할하고
채 못 되었다고 할 하고
그만 길이 다 되었다고 할했다.

임제여임제여, 그대와, 내가 읽는 『임제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둘 다 같다는 손쉬운 답은 말라.

땅이 만드는 풀의 열기
나뭇가지의 싱싱한 냄새
살아 있는 잎들의 서로 무늬 다른 살랑거림.
시인과 그의 시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어느 것이 진품인가?
모르는 사이에 하늘 한편에 가볍게 걸려
빙그레 웃는 낮달.
공들여 빚은 것과 빚은 사람 다 진품이라.
시인은 시가 타는 심지,
허나 촛농이 없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
어느 순간 한 삶의 초가 일시에 촛농이 된다면?
할하라,
할하라, 아직 꺼지지 않은 심지를 향해.



6
무너진 사당 앞
나뭇가지에서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와
그 옆 나무 둥치 구멍에 숨어 있는
나무결 빼어 닮은 올빼미를 만난다.
올빼미는 눈을 감고 있지만
곤두세운 촉각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들에게 고개 끄덕이며 사람의 말로 인사한다.
"안녕들 하신가?"
다람쥐는 움직이던 목젖을 순간 멈추어 인사를 받고
올빼미는 몸을 조금 숙였다 편다.
다람쥐도 올빼미도
팽팽한 삶 속에 탱탱히 가고 있는 자들.

조금 걷다 뒤돌아보니
다람쥐의 목젖도 올빼미의 촉각도 다 그대로 있다.
내 삶이 어느 날 그만 손 놓고 막을 내린다 해도
탱탱히 제 길 가고 있을 촉각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7
이제 길이
다시 집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양돈장이 나타나고
버려둔 밭이 나타나고
메마른 검은 사내가 나타 나고
서로 인사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고 있는 길에 물든 눈으로
도시 상공에 한창 타고 있는 저녁놀을 본다.
잠깐, 그 무엇보다도 더 진하고 간절한,
보면 볼수록 안공(眼孔) 속이 깊어지는.
다리를 건너다 한 사내에게
무심결에 인사를 한다.
얼떨김에 그가 인사를 받는다.
모르면서 서로 주고받는 삶의 빚,
가다 보면 그 누군가 마음 슬그머니 가벼워지는 순간 있으리,
없는 빚도 탕감 받는.
길의 암전(暗轉), 한 줄기 빛!
서서히 동굴 벽이 밝아지고
그림 하나가 부활한다.
한 손엔 횃불, 또 한 손엔 붓을 든 사람 하나가
큰 대(大)자로 취해 노래, 노래 부른다.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2003)
문학과지성 시인선 268. 황동규 시집 _

ㅡ 이 시에게 감사한다. 감사합니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를 보고 보고 또 다시 보게 된다. 아직도 완전히 다 이해했는지는 모르오나. 이 정서와 이 느낌이 좋아서일까. 10번도 넘게 읽었다. 아직 시집 초반인데, 하나의 시에 끌려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삶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자꾸만 홀로 들이든 산이든 강가든 걷는 나를 그린다. 지금의 내 모습을 이 시가 비춰주는 것 같다. 무언가 말해주는 것 같다. 삶의 약간의 이정표랄까. 내가 위안을 얻으니 자꾸 보게 되는거겠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가.

그냥 살고 싶다.
뚜벅뚜벅. 좀 고요히. . . 덩그러니 걸어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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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레이 | 작성시간 15.05.21 명징 허존사^-^
  • 작성자기쁨(D.R) | 작성시간 15.05.21 무엇에 취해
    무엇을 들고
    어디를 걷고 있나요^^
  • 작성자나무행 | 작성시간 15.05.22 감사합니다
  • 작성자스마일 | 작성시간 15.05.30 하하하...
    명징의 감성을 따라가기엔 멀었나봅니다...^_^
    저는 중간에 '임제'만 눈에 들어오네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던 임제...
    그렇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라던 임제...^_^
    저만의 길을 갑니다!
  • 작성자요정 | 작성시간 15.06.09 그냥 살고싶다는 문구가 가슴에 와닿네요.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데
    그냥 생각을 버리고 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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