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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 가짜 가이즈카향나무 사건 전말

작성자이팝나무|작성시간26.06.09|조회수32 목록 댓글 0
대구의 상징이자 시민과 영욕을 함께 한 달성공원
2006년 필자가 순종 황제와 이토히로부미가 식수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최근 아나라며 역사를 조작했다고 유튜버 박종인 기자가 보도했던 문제의 가이즈카향나무

 

1909년 순종 황제의 달성공원 방문을 환영하는 행사 장면

 

요즘은 공중파 방송을 잘 보지 않은 대신에 유튜브를 자주 본다. 정치 분야를 주로 보지만 역사물이나 다큐멘터리도 좋아한다. 박종인 기자의 “땅의 역사”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256편 “대구 달성공원 가짜 향나무의 비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가짜 향나무(?)의 주인공이 필자이고 선의(善意)로 한 연구가 조작된 사실로 방송되어 전국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

 

2006년이었다.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 권상구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1909년 순종 황제가 대구에 왔을 때 달성공원에서 기념식수를 했다는데 그 나무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재직 중 푸른 대구 가꾸기 사업을 주도해 대구의 여름철 기온이 낮아졌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는 데 관여하였고 특히, 택지개발이나 도로개설 등으로 베어 없어지는 노거수(老巨樹)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와 관련된 존경할 만한 인물의 이름을 –최제우, 서침 나무 등-붙여 나무도 보호하여 지역의 가치를 높이려 했다.

이런 일련의 일을 해 왔던 필자로서는 모른다고 답은 했으나, 대한제국의 황제(皇帝)가 심었다는 나무가 대구 달성공원에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했다.

『대구 이야기, 대구물어(大邱物語)의 손필헌 번역)』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제10장 “은사관 건립”에 관한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당일 (1909년 1월 12일 말함)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 손수 식수와 이토(이등박문) 공의 기념식수가 있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식수 장소가 달성공원임은 특정(特定)할 수 있으나 나무 이름이 없어 난감했다. 넓은 공원에는 수백 종, 수백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가이즈카향나무로 추정

 

당시 신문 기사로 확인 할 수 있을까 하여 조사해 보니 지역의 대표적인 일간지 매일신문이나 영남일보는 모두 해방 이후 창간되었고, 일본인 거류민단이 발간한 신문이 있었던 것 같으나 필자의 능력으로는 구해 볼 수 없었다.

다시, 주한(駐韓) 일본 대사관에 편지를 보냈다. 이토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거물 정치인이기에 혹시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회답이 없었다.

그즈음 “달구벌 얼 찾는 모임 이대영 회원이 달성공원 관리계장으로 있었다. 나무를 찾아봐 주기를 부탁하였더니 문제(?)의 가이즈카향나무인 것 같다고 했다.

필자, 정시식 노거수 사진작가(서울대학교 임학과 출신, 부구청장으로 퇴임), 이(李) 계장(현, 코리아 미래연구소장) 셋이 현장을 찾아 두 그루 나무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위치가 ”눈에 잘 띄는 공원의 중앙”이고, 조경수로 심는 경우 보통 3그루, 5그루 모아 심기를 하는데 “두 그루가 나란히 심겨 있고”, 당시 순종은 33세, 이등박문은 66세로 굵기가 나이와 비슷하여 “연령(年齡)에 맞춰 심는 일본 수식(手植) 문화”가 엿보이고, 더 심증이 가게 한 것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아니라, “일본산(日本産) 가이즈카향나무”라는 점이었다.

이런 네 가지 이유와 기념식수 행사를 많이 해 본 필자의 경험을 보태 순종과 이토가 심은 나무로 추정(推定)했다.

이어 2006년 개인 블로그에 올렸고, 권 대표는 『신택리지, 거리문화시민연대 2007』에, 필자는 『대구·경북의 명목을 찾아서. 2009년』에 수록함으로 이후 많은 사림이 두 그루 가이즈카향나무를 순종과 이토가 심은 나무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21년이 지난 2022년 『대구물어』의 번역본이 영남대학교 출판부에 의해 간행되고, 2025년에는 <일제강점기의 가이즈카향나무 실체, 김종원·이정아>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당초 인용했던 손필헌 번역본의 원본과 달리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라는 구절이 누락 되었음이 발견되었다.

즉 『대구물어』를 간행할 당시(1931년)에 이미 나무가 “흔적이 없다”고 했는데 2006년에 두 그루 가이즈카향나무를 순종과 이토가 심은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사실과 다르며 친일을 감추기 위해 고의로 누락시켜 역사를 조작했다고 방송했다.

 

박 기자의 주장과 필자의 반론

 

박 기자는 박식하고 역사를 평가하는 잣대가 특이해 즐겨 듣는 사람이 많다. 이번에 방송된 “대구 달성공원 가짜 향나무의 비밀”도 그럴 것이다. 반면에 번역자인 손(孫)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인 필자는 반론할 기회도 없다.

따라서 박 기자가 방송한 내용을 사안별로 정리하여 동의 또는 부동의로 반론을 개진한다.

그동안 묻혀있던 순종과 이토의 달성공원 식수 사실을 알리려고 시도한 일이 역사 조작으로까지 매도당해 짧지 않은 동안 지역 사회를 위해서 봉사한 다른 노력까지 폄훼(貶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박 기자의 정정 보도를 바라고 또한, 박 기자가 인용한 논문 저자들에게도 전후 사정을 알려 이해의 간격을 좁히려고 한다.

 

 

구분박 기자의 방송 내용 필자의 반론동의
여부

1가이즈카향나무 이름이 1928년 요코하마 종묘상 상품 목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19년 전인 1909년 이름도 없는 나무를 심을 수 없다.

틀린 주장이다
지구상에는 약 7만 3000천여 종의 나무가 있다. 그중에서 3,000 여종은 지금도 이름이 없다. (출처, Chat GPT)
한반도만 해도 4,000여 종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원예이론서 『양화소록』에 수록된 식물은 16종에 불과하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대다수 식물은 1937년 정태현 박사 등의 『조선식물향명집』에 의해 현재 부르는 이름으로 명명되었고 그전에는 정식 이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더 분명한 사례는 1907년 달성공원에 가이즈카향나무(貝塚息吹)와 노무라 단풍, 요시노 벚꽃 등 6만 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차경환, ’대구신사 1913‘, 2021, 3, 16)

부동의
21월 12일이면 영하(零下)의 한겨울인데 뿌리를 끊고 가이즈카향나무를 옮겨 심으면 동해(凍害)로 고사(枯死)한다. 사리에 맞지 않는 지적이다.
소나무, 향나무류는 추위에 강해 북위 50도 만주 북부, 러시아 하바롭스크까지 자란다. 겨울을 잘 버티고 동해(凍害)를 입지 않는다.


업자들이 겨울에 이식(移植)하지 않는 것은 땅이 얼어서 작업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 실익(實益)이 없기 때문이다.


지존인 황제(皇帝)의 식수 행사인 만큼 최고 조경기술자를 동원해 충분히 실행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농서(農書) 『산림경제』 종수(種樹) 편에도 ’소나무, 향나무, 잣나무‘ 등은 동지(冬至, 양력 12월 22경)부터 입춘(立春, 양력 2월 4일 정도) 사이에 언제나 옮겨 심을 수 있다고 했다.
부동의
31911년에 간행된 『대구 일반, 저자 미와 조테츠 』에 가이즈카향나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때 이미 죽었을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
특정 서적에 기록이 없다고 하여 가이즈카향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저서(著書)는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기록하는 것이다. 식물학자가 아닌 그가 구태여 가이즈카향나무 이야기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부동의
4, 『대구 물어, 가와이 아사오 1931』의 원본에 “순종과 이등방문이 심었다”는 다음 구절(句節)에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때 이미 나무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구절을 번역자가 고의로 누락시켜 사실을 조작했다.
원본을 확인하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의 잘못으로 인정한다.
만약 원본을 보았다면 두 그루 가이즈카향나무를 두고 순종과 이토가 심은 나무라고 추정하는 해프닝은 없었을 것이다.
블로그에 올려 사실을 오도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번역본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의존한 잘못이다.


다만, 번역자 손(孫)이 의도적으로 해당 구절을 누락시켜 사실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지나친 억지다.
그는 대구를 사랑하는 평범한 시민에 불과하다. 누락시켜 얻을 이익이 없다.
단순 실수로 보아야 한다.



동의

 

 

 

맺는말

 

위의 표는 박 기자의 방송 멘트 순서대로 동의, 부동의 여부의 대강을 개진한 필지의 의견이다. 4번 즉 『대구 물어』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순종과 이토가 심은 나무로 추정한 잘못은 동의했다. 굳이 변명한다면 그 구절을 누락시킨 번역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외 1, 2, 3번은 부동의 한다. 즉 필자의 반론이 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상이 방송 사고(?) 전말(顚末)이다. 이 사안을 접하면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학문은 선행연구자의 연구 결과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거듭 따져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또한 매사는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박 기자가 참고한 논문의 교신저자 이 박사의 강의 자료(?) 표지에 “이 논문을 읽으며 대구시의 한심한 공무원과 시민 활동가가 생각난다”고 한 말을 학자로서는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본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이외에도 신천숲 조성, 가로수, 녹지 관리 등 일련의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특히, 혐오 시설로 버려져 있던 쓰레기매립장을 (전국 최초로) 수목원으로 조성할 때 논문의 제1 저자인 김 교수를 비롯한 폐기물 전공 모 교수, 환경 담당 모모 기자, 환경 및 시민단체 등이 나름의 이론을 내세워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악취 나고 먼지 나던 곳이 목, 초본류는 물론,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조류, 곤충류 등 생물 다양성이 어느 곳보다 높아졌다. 환경부로부터 생태복원 우수 사례로 수상도 했다. 이런 일련의 일을 하면서 자연생태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회복력이 빠르며 그 경이로움에 겸손함을 배웠다.

또한, 가이즈카향나무 두 그루가 순종과 이토의 기념식수가 아니라는 것은 사료가 증명(?)해 더 이상 논쟁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그 흔적(痕迹)을 찾을 수 없다”는 말 즉 “(나무가) 사라지고 없다”. “죽었다”는 뜻이라고 보는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살아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저자가 책을 발간한 1931년은 순종과 이토가 나무를 심은 1909년의 22년 후가 된다. 그 사이에 달성공원은 요배전이 신사로 바뀌는 등 몇 차례 정비가 있었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처음 심은 기념식수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순종은 조선의 황제이고 이토는 일본인이 존경하는 인물이기에 그들이 심은 나무를 소홀히 관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없앨 수도 없다.

따라서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그곳이 지금 필자가 추정한 곳일 수도, 수종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공원 어디인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의 창작 무대가 수성못 둑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 후 자료가 나와 앞산 고산골로 밝혀졌듯이 『대구물어』 원본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 말이 훗날 또 어떤 자료가 나와 살아 있다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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