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 1404~1474)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람객 1,600만 명을 돌파하면서 군위군 화본리 엄흥도 묘소와 그와 관련된 유적지가 뜨고 있다. 대구시와 답사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한 송은석 문화관광 해설사에 따르면 매회마다 지원자가 마감되어 후속 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영화가 이토록 시민의 관심을 끈 이유는 영화 자체도 수작이지만 배신과 불신이 넘치는 세태에서 목숨을 걸고 주군(主君)을 위해 헌신한 한 평범한 사람의 희생정신이 가슴 깊이 와 닿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필자도 역시 보았고 몇 장면에서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엄흥도의 묘가 영월에 있다- 는 자막이 시민들을 당혹하게 하였다.
군위군은 영화가 공연되기 이전에 이미 택민국학연구원(김광순·강영숙·배계용, 2009)이 발표한 “충의공 엄흥도의 삶과 묘소 진위(眞僞)에 관한 고찰”을 근거로 화본리 소재 엄흥도 묘소 주변을 정비하고 “충의공 엄흥도 역사 탐방도”까지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왔었기 때문이다.
충의공이 영월 사람이다 보니 응당 묘가 영월에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영월 부사 윤양래(尹陽來, 1673~1751)가 묘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실(史實)을 뒷받침하듯 묘가 영월에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김 박사 등은 충의공이 단종의 시신을 선산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묻고 그곳에 있다가는 세조 일당으로부터 어떤 화를 당할지 몰라 둘째 아들 광순(光舜)과 함께 군위(당시 의흥)에 숨어 살다가 돌아가셨으며, 따라서 군위의 묘가 진묘(眞墓)라고 주장한다.
충의공이 군위로 온 까닭은 세자로 있을 때 호위 무사 즉 경호원이었던 군위 현감 정사종(丁嗣宗)이 단종(端宗)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그만두고 영월로 가서 충의공과 함께 시신을 거두고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한 분인데 그가 추천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충의공의 충절이 세상에 처음 드러난 것은 단종 사후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이었다. 왕이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 묘를 찾게 했을 때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 노산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온 고을이 두려워하면서 허둥대었는데, 고을의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그 일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고 보고 한 데서 비롯된다. <중종실록 11년(1516)> 이어 1669년(현종 10)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자손들을 녹용(錄用, 뽑아서 쓰게 함) 하라고 허락을 받았으나 후손을 찾지 못했고, 1698년(숙종 24) 재상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처음으로 좌랑(佐郞, 정6품) 벼슬이 내려지고, 1743(영조 19)에 참의(參議, 정3품), 1758년(영조 34)에 참판(參判, 종2품)으로 승급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순절한 신하를 기리는 장릉 배식단 정단(正壇)에 이름이 올랐다.
1876년(고종 13) 마침내 공조판서(정2품)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의로운 행의(行義)가, “목숨을 걸고 윗사람을 섬겼다.(危身奉上)”는 의미의 “충(忠)”과 “굳세고 능히 결단하였다 (强而能斷)”는 의미의 “의(毅)”의 뜻이다.
이런 기록을 접하면서 묘소와 후손의 집성촌 금양 2리의 망월정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가 3월 하순이었다. 묘소 주변에는 요즘 보기 힘든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영화를 보고 왔다며 참배객들이 더러 있었다. 어떤 젊은 여자분은 어린 아들과 함께 절하며 술을 따랐다.
이어 찾은 금양 2리의 망월정(望越亭)은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당호 망월(望越)은 이름으로 보아 본향(本鄕)이자 시조가 묻힌 영월을 잊지 않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충의공이 섬긴 단종을 잊지 않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으나 둘 다를 포함한 뜻일 것으로 생각이 든다.
엄씨 집성촌 역시 여느 시골 문중 재사(齋舍)나 정자가 거의 다 그렇듯이 다소 퇴락해 있었다. 마루에 올라 맞은 편을 산을 보니 주변의 나무들은 아직 잎을 내지 않았는데 늘 푸른 떨기나무숲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가보았더니 회먕목(淮陽木) 군락지였다,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며 청령포 노산대(魯山臺)의 회양목이 떠올랐다. 노산대는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서러움과 헤어진 아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주 올라 서울을 바라보았다는 바위다, 청령포에 갔을 때 오지답게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으나, 흔하지 않은 회양목이 자생하는 것을 보고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일명 도장 나무로 불리는 회양목은 소나무, 참나무와 달리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하는 나무가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자라는 나무이다. 그런데 어쩌면 단종도 보았을 노산대의 회양목이 왜 이곳 엄흥도 후손이 사는 마을에서도 자라고 있을까. 후손 중 누군가 청령포에 가서 옮겨 와서 심은 것인가. 아니면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을사늑약을 막지 못한 죄책감으로 자결하자 그가 살던 집 마루 밑에서 돋아난 혈죽(血竹)처럼 충의공의 충절이 그런 이적(異蹟)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너무 신비롭기에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