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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짧은 생각 ⑥싯다르타의 연민…먹고 먹히는 세상

작성자나비|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짧은 생각  ⑥싯다르타의 연민…먹고 먹히는 세상

고대 인도에서는
10진법이 아니라
12진법을 썼습니다.
1에서12까지의 숫자 중
가장 큰 수는
12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수를 서로 곱한
12×12는
‘무한대의 수’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고대 인도의 문헌에는
브라만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1만4400마리(12×12)의 소를
희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 그만큼
소를 죽이진 않았지만,
브라만교의 제사에서
많은 수의 소를
잡은 것은 사실입니다.

너무 원시적이라고요?
고대 유대교에서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오랫동안
희생제를 지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낳은
건강한 첫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거든요.

농사에 꼭 필요한
소가
제사 때마다 희생되자
브라만교에 반기를 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인도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성장과
보폭을 같이 했습니다.


이즈음
인도에 ‘우파니샤드’가
등장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문자 그래도 풀면
‘스승의 발치에 가까이 앉다’는
뜻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가까이에 앉는다는
말입니다.

브라만교에서 중시하던
제사와 의례,
그리고 집단 대신
깨달음과 명상,
그리고 개인에
방점을 찍는 사조였습니다.

브라만의 주도로
씨족 공동체가
다 함께 지내는
농경제의 현장에서
벗어나
잠부 나무 아래서
홀로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의 유년기 일화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000년 동안 내려오던
브라만교 집단 의례와
제사의 전통,
그 끝에서
‘인도식 르네상스’인
우파니샤드가
꽃핀 겁니다.

싯다르타의 출가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

 

 

 

 



 ⑥싯다르타의 연민…먹고 먹히는 세상

#엄마의 동생이 싯다르타를 키웠다

인연은 참 묘했다. 

마야 왕비는 출산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를 대신해 어린 싯다르타를 키운 사람은 이모였다. 

마하파자파티 고타미. 

엄마의 동생이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출가하기 전까지 사실상 엄마 역할을 했다. 

나중에 카필라 왕국이 멸망하자 

고타미는 궁의 여자 500명을 이끌고 붓다를 찾아와 출가한다. 

불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비구니가 다름 아닌 

싯다르타를 키운 이모이자 양어머니 고타미였다. 

싯다르타가 어릴 때만 해도 삶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마야 부인을 대신해 고타미는 왕비가 됐다. 

이유가 있다. 

붓다 당시의 카필라 왕국은 씨족 공동체였다. 

당시 풍습상 왕은 한 집안의 자매들 모두와 결혼하기도 했다. 

가령 숫도다나 왕이 마야 부인과 결혼할 때, 

고타미를 비롯한 자매들 모두와 혼사가 성립됐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마야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 아래인 고타미가 왕비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떠난 뒤 왕은 싯다르타를 키워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신하들이 왕자를 키울 적임자로 이모 고타미를 추천했다는 설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어쨌든 고타미는 카필라 왕국의 왕비로서, 

또 왕자의 엄마로서 싯다르타를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폈다. 

팔리어 경전에는 

왕자를 좀처럼 시녀들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직접 돌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최고의 스승, 최고의 교육

티베트 불교는 달라이 라마가 될 아이를 일찍 점찍는다. 

전생의 인연으로 이번 생에 환생한 달라이 라마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어서다. 

아이가 정해지면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작동한다. 

종교와 철학, 언어와 과학까지도 최고의 전문가인 일대일 과외 선생이 붙어서 가르친다.

2500년 전 인도에서도 그랬다. 

싯다르타 왕자는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았다. 

숫도다나 왕이 마흔 살 넘어서 얻은 아들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왕은 500명의 사카족 자제를 뽑아서 왕자의 교육을 돕게 했다.

그뿐만 아니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와 당시에 꽃을 피우던 

우파니샤드에 정통한 브라만을 뽑아서 왕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싯다르타에게는 과목별로 선생이 있었다. 

전쟁을 위한 병법과 무예, 수학, 언어와 문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각각 따로 있었다. 

64종류의 문자를 익히고, 인도 전통의 서사시도 배웠다. 

정치와 경제를 익히고, 음악과 예술도 터득했다. 

말 타고, 창 던지고, 활 쏘는 싸움의 기술도 배웠다.

싯다르타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삶의 문제’였다. 

어린 싯다르타는 거기에 물음표를 달기 시작했다. 

싯다르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어릴 적 싯다르타의 성품과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일화가 하나 있다. 

바로 잠부나무 이야기다.

#새로운 사조, 우파니샤드

나는 룸비니 동산을 떠나 카필라바스투 성으로 갔다. 

건물은 없지만, 성터는 남아 있었다. 

싯다르타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벽돌로 지었던 궁이라 바닥에 벽돌 유적은 그대로 있었다. 

성안을 걷는데 유적을 관리하는 인도인이 불렀다. 

가서 봤더니 손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깊게 파지도 않았다. 

조금 지나니까 까맣게 화석화한 볍씨가 나왔다. 

수천 년 전의 흔적이다. 

이런 게 너무나 쉽게 출토되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인도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이 그럴 때마다 실감 났다.

인류는 3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싯다르타가 태어난 2500년 전도 그랬다. 

사카족은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 

고대 인도는 브라만교를 믿는 사회였다. 

한해 농사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봄이 되면 왕이 직접 성 밖 들판으로 나가서 농경제를 지냈다. 

풍작을 기원하며 브라만교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였다.

한반도도 그랬다. 

부여와 동예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다. 

봄이 오면 농업의 신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풍작을 기원하며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그걸 선농제(先農祭)라고 불렀다.

브라만교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무척 중시했다. 

제사는 브라만 계급만 독점적으로 주관할 수 있었다. 

제사 때는 어김없이 동물을 죽여서 신에게 바쳤다. 

희생제다. 

고대 인도에서는 소를 잡아서 올렸다. 

때로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소를 잡기도 했다. 

제사가 끝난 후에 죽은 소들은 모두 브라만의 차지였다. 

브라만 계급에게는 희생제가 부를 축적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소를 죽이는 제사와 소를 이용한 농경. 

결국 충돌이 생겨났다. 

벼농사가 시작되고, 농경 사회가 열리면서 소의 중요도가 커졌다. 

농사를 짓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 됐다. 

브라만 계급은 제사를 위해 소를 계속 희생했다. 

사람들의 반감은 갈수록 커졌다. 

결국 브라만교의 권위에 도전장이 날아왔다. 

제사와 의례, 주술을 가장 중시하던 브라만교에 

‘우파니샤드’라는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났다.

우파니샤드는 밖으로만 향하던 사람의 눈을 내면으로 돌리게 했다. 

제사가 아니라 깨달음과 해탈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리고 묻게 했다. 

나는 누구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자연과 사람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영원은 어디에 있는가. 

인도에 나타난 새로운 사조였다. 

마치 유럽에서 암흑기 중세의 끄트머리에 르네상스가 일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잠부나무 아래의 고요

숫도다나 왕과 왕족들, 

그리고 카필라 왕국의 백성은 농경제를 지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을 타 싯다르타 왕자는 행사장을 몰래 빠져나왔다. 

홀로 들판으로 나갔다. 

인도의 태양은 뜨거웠다. 

작열하는 햇볕 아래서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다. 

초췌한 몰골의 농부는 소의 고삐를 후려쳤다. 

멍에를 등에 진 소는 고통에 찬 울음을 쏟으며 쟁기질을 했다.

소가 지나갈 때마다 땅이 뒤집어졌다. 

뒤집힌 땅에서 벌레들이 나왔다. 

그때 어딘가에서 새들이 날아왔다. 

벌레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먹고 먹히는 풍경, 삶과 죽음의 풍경이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벌어졌다. 

그건 참혹함이었다.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삶,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삶. 

싯다르타는 그런 세상에 충격과 함께 깊은 연민을 느꼈다.

농경제 행사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왕자가 사라진 걸 뒤늦게 안 것이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왕자를 찾았다. 

싯다르타는 고요한 숲의 잠부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포개서 가부좌를 했다.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그런 왕자를 보고서 감동을 받았다. 

왕자가 일구어낸 고요함, 그 고요의 바다가 주변까지 고요하게 했다. 

그 속에서 싯다르타는 먹고 먹히는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물음을 던졌으리라. 

사실 팔리어 경전에는 붓다의 유년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이 잠부나무 일화는 중요한 포인트를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싯다르타는 어릴 적부터 명상을 했다.

잠부나무 아래서 그가 취한 자세는 인도 요가의 연꽃 자세다.

지금도 불교의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취하는 자세다.

그러니 싯다르타에게 요가와 명상, 그리고 사유는 매우 친근한 일상이었으리라.

또 하나는 싯다르타의 성정(性情)이다.

 그는 이웃의 아픔, 생명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는 인물이었다. 

인도의 델리 박물관에서 ‘잠부나무 아래의 싯다르타’ 조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조각상 앞에 서 있으면 고요가 밀려왔다. 

싯다르타가 잠겨 있는 고요의 바다, 그 물결이 나를 온전히 적셨다.

놀랍게도 팔리어 경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잠부나무 아래서 명상하는 싯다르타를 본 숫도다나 왕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낮추며 절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싯다르타가 확립한 고요의 크기가 절대 작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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