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때로 사람을 낯선 세상으로 이끄는 마법의 지도가 되곤 합니다. 경기장의 하얀 선을 지침 삼아 달리다 보면, 어느새 국경이라는 장벽은 흐려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섭니다. 저에게 카타르 도하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보낸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의 시간은 바로 그러한 마법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2014년 9월, 카타르가 지구촌을 들썩이게 한 월드컵을 개최하기 딱 8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카타르의 'Aspire Zone Foundation'은 자국의 축구 미래를 심기 위해 세계적인 명문 클럽의 유소년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내로라하는 거인들 사이에 대한민국의 포항 유소년팀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저는 인솔단장으로서 도하 땅을 밟았습니다.
도하에 도착해 마주한 풍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황금빛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거짓말처럼 짙푸른 축구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척박한 대지 위에 수놓아진 초록빛 잔디는 마치 모래 바다 위에 박힌 에메랄드 보석 같았습니다. 대여섯 개의 경기장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그곳에서, 가로수마다 숨겨진 스프링클러는 약속된 시간마다 생명의 물을 뿜어내며 푸르름을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한계를 인간의 의지와 기술로 극복해 낸 거대한 오아시스였습니다.
특히 'Aspire Dome'의 웅장함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축구장과 수영장, 양궁장과 육상트랙 같은 전문 체육시설은 물론, 학교와 쇼핑센터까지 하나의 거대한 돔 안에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거대한 미래 도시를 통째로 옮겨 놓은 축구의 방주 같았습니다. 훗날 카타르가 전 세계의 찬사 속에 월드컵을 치러내는 모습을 보며, 저는 그때 보았던 거대한 돔이 미래를 향해 쏜 치밀한 신호탄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일주일은 세계 축구의 거대한 흐름을 몸소 체험하는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우리 포항 유소년팀 선수들은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강팀들과 당당히 몸을 부딪쳤습니다. 체격과 스피드에서 앞서는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황희찬, 이광혁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은 특유의 정교한 패스 워크와 끈질긴 투지로 맞섰습니다. 골문 앞에서의 날카로운 공방전과 몸을 사리지 않는 슬라이딩 태클은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비록 거인들과의 경기에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선수들은 한 경기가 끝날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해 갔고 지도자들은 선진 시스템의 나침반을 확인했습니다. 승패의 수치보다 값진 것은 세계의 축구가 하나로 호흡한다는 감각 그 자체였습니다.
경기가 없는 날 찾아간 도하의 풍경은 이국적인 정취로 가득했습니다. 이슬람미술관의 정교한 예술품 속에서 오랜 역사의 숨결을 느꼈고, 코니시 해안가에서는 페르시아만의 푸른 바다와 신기루처럼 솟아오른 현대적 빌딩 숲의 조화를 감상했습니다. 밤이 되면 어둠을 뚫고 향신료 향을 풍겨내는 수크 와키프 야시장의 골목을 걸으며 비로소 중동의 품에 안겼음을 실감했습니다.
그 낯선 사막의 밤을 더욱 따뜻하게 밝혀준 인연도 있었습니다. 당시 포항스틸러스에서 카타르 리그로 임대되어 뛰고 있던 신진호 선수가 달려와 준 것입니다. 그가 대접해 준 고소한 양고기의 맛보다도, 이국땅에서 나눈 고향 사람의 온기가 마음의 허기를 먼저 채워주었습니다. 사막 위에서 피어난 소년들의 꿈과 따뜻한 정이 얽힌, 참으로 뜻깊은 여정이었습니다.
사막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5년 12월, 이번에는 후텁지근한 열대의 바람이 부는 말레이시아로 향했습니다. 말레이시아 축구협회 역시 맨체스터 시티, 발렌시아, 코린치안스 등 세계적 명문들과 포항스틸러스를 포함한 20여 개 팀을 초청해 유소년 축구 축제를 열었습니다. 말레이시아 축구협회장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 열흘간 머물며 선수들을 응원하고 현지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도 포항스틸러서 유소념팀은 푸른 잔디 위를 거침없이 누볐습니다. 브라질의 코린치안스나 스페인의 발렌시아 같은 남미와 유럽의 기술 축구를 상대로, 조직력 있는 강한 압박을 선보이며 밀리지 않는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푹푹 찌는 열대의 무더위 속에서도 지친 기색 없이 그라운드를 끝까지 책임지던 선수들의 땀방울은 현지 관중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먼저 경험한 카타르가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단단한 '강철의 도시'였다면, 말레이시아는 서로 다른 색과 모양의 돌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을 이루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나라'였습니다.
쿠알라룸푸르의 상징인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밤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거대한 쌍둥이 등대처럼 도시를 아득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반면 술탄 압둘 사마드 빌딩에서는 묵직한 역사의 무게가 느껴졌고, 메르데카 광장에서는 이 땅이 얻어낸 독립의 숨결이 푸른 잔디 위로 흐르는 듯했습니다. KLCC 파크의 푸른 자연과 부킷 빈탕의 화려한 네온사인은 도시의 역동적인 맥박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면 잘란 알로 야시장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이국적인 음식 연기와 그 속에 섞인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는 그 자체로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사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티안 허우 사원의 붉은 등 아래서는 화려한 중국 전통문화의 미학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화가 축구장 안의 포지션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축구공이 선물한 인생의 한 페이지
돌이켜보면 카타르와 말레이시아에서의 날들은 단순한 스탬프 찍기식의 해외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축구라는 만국 공통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배웠고, 여행이라는 거울을 통해 타인을 이해했으며, 사람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국경 없는 온정을 나눈 시간이었습니다.
규격은 같지만 전혀 다른 땅 위에 굴러갔던 축구공 하나가 저를 뜨거운 사막의 나라로, 다시 울창한 열대의 도시로 이끌어 주었던 셈입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을 감으면 초록 잔디 위를 가르던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이국적인 거리의 소음이 귓가를 스칩니다. 그것은 서랍 속에 넣어둔 낡은 사진첩 속의 추억이 아닙니다. 축구라는 위대한 경기가 저에게 선물해 준, 제 삶의 값진 인생의 한 페이지로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숨 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