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을 떠올리면 먼저 넉넉한 자연과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함께 떠오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은 단순한 살림집이 아니었습니다. 감나무와 우물, 장독대와 외양간, 사람과 가축이 한데 어우러져 숨 쉬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집 안팎 어느 곳이나 둘러봐도 삶의 흔적이 있었고, 계절마다 다른 빛깔과 냄새가 피어났습니다.
집 마당에는 감나무가 여섯 그루 있었습니다. 가을이면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마치 수백 개의 등불을 켜 놓은 듯 마당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그 감으로 곶감을 만들고 홍시를 익혀 겨울 간식을 마련하셨습니다.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은 겨울 햇살을 머금으며 익어 갔고, 우리 형제들은 홍시가 익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습니다.
울타리 밖 방천 둑에는 돌복숭아나무 두 그루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새콤달콤한 열매가 열려 우리들에게는 과자보다 더 귀한 군것질거리였습니다. 밤톨만한 그 열매 몇 알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집 울타리는 아카시아와 찔레나무가 둘러싸고 있었고, 논둑 축대 주변에는 돼지감자와 가죽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장독대에서는 된장과 간장이 천천히 익어 갔습니다. 바람이 불면 장 냄새가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스며들었는데, 그 냄새는 지금도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향기입니다.
집 옆 논의 미나리꽝은 사계절 밥상을 책임지는 작은 텃밭과 같았습니다. 또한 집 앞 우물은 아무리 가문 해에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 우물은 가족의 목을 축이고 농사일을 돕는 생명의 샘이었습니다. 마치 집안 깊숙이 흐르는 핏줄처럼 묵묵히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집은 큰채와 아랫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큰채에는 부엌과 큰방, 작은방, 대청마루가 있었고, 마루 안쪽에는 성주단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다듬이돌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노동과 정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습니다. 작은방 옆에는 방앗간 겸 창고를 따로 두었고, 부엌 앞에는 가작을 달아 외양간을 붙여 놓아서 여름이면 파리와 더불어 살았습니다.
아랫채에는 사랑방과 곶간, 쇠죽을 끓이는 부엌이 있었습니다. 헛간에는 화장실과 잿간, 농기구 보관소가 있었고 삽짝문으로 나가는 길 옆에도 화장실을 따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은 한 채의 건물이 아니라 가족의 삶을 담아낸 여러 개의 공간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작은 세상과도 같았습니다.
널찍한 마당은 집안의 중심이었습니다. 한쪽에는 달구지와 평상이 놓여 있었고, 곁에는 여물을 써는 작두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름밤이면 평상에 둘러앉아 더위를 식히고, 가을이면 벼와 콩 등을 타작하며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마당은 일터이자 쉼터였고, 가족들이 웃고 얘기하던 사랑방이기도 했습니다.
감나무 아래에는 늘 두엄더미가 쌓여 있었습니다. 아이들 눈에는 그저 커다란 흙무더기 같았지만, 농부에게 그것은 다음 해 풍년을 준비하는 창고였습니다. 겨울이면 마당 한편에 감장독을 묻고 감장움을 만들어 짠지와 물김치를 저장했습니다. 마당은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으며 가족의 삶을 품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삶의 중심에는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던 해까지도 자식들의 먹거리를 걱정하시며 살뜰히 챙겨 주셨습니다. 저는 외벌이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지만, 상주 본가와 김천 처가에서 주시는 쌀과 채소, 곡식들은 메마른 땅에 스며드는 봄비처럼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향 갈 때마다 싸주신 쌀과 제철 채소들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가족을 향한 사랑과 염려의 손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지런한 노동과 양가의 따뜻한 보살핌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우리 가족의 삶을 굴러가게 했습니다. 그 덕분에 자식 키우고 살림을 일구며 희망을 꿈꾸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말씀이 많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말보다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기보다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쉼 없이 일하시는 모습은 그 어떤 훈계보다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손재주 또한 뛰어나셨습니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이으셨고, 삼태기와 망태, 지게, 멍석도 손수 만드셨습니다. 부족한 것을 사기보다 만들어 쓰던 시절, 아버지의 손은 작은 공방이자 생활의 백과사전이었습니다. 거칠게 갈라진 손등과 굵어진 손마디마다 가족을 위해 살아오신 세월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께서는 부지런하셨습니다. 새벽닭이 울기 전 들로 나가셨고,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성실함 덕분에 춘궁기에도 가족이 굶지 않았고 여섯 남매의 학비도 거르지 않고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마치 깊은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와 같았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림 없이 가족이라는 둥지를 지켜 주셨습니다.
증조부 때부터 살아오신 인평리를 떠나 1972년 신봉리로 이사하신 뒤에도 아버지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화개들과 남보들에서는 벼농사를 지으셨고, 인통들(婦家田)에서는 가을보리와 벼를 심는 이모작을 하셨습니다. 작은 밭에는 파를 심고, 화개들 밭에는 가지와 오이, 정구지 등 다양한 작물을 가꾸셨습니다. 논과 밭은 단순한 농토가 아니라 가족의 희망을 일구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황소 한 마리는 농사의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소는 밭과 논을 갈았고, 배설물은 거름이 되어 다시 땅을 살렸습니다. 닭과 토끼, 산양과 개까지 함께 살아가던 모습은 사람과 동물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고향집은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연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따뜻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감나무도, 우물도, 넓은 마당도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 속 고향집은 여전히 푸른 미나리 향을 품고 있고, 장독대에서는 구수한 장 냄새가 풍겨 오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새벽 안개를 가르며 들로 향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많은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평생의 삶으로 가장 큰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성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가족을 향한 묵묵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재산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값어치가 커지는 삶의 유산입니다. 고향집은 사라져도 그 집을 지탱하셨던 아버지의 세월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