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녕성 뤼순 관동재판소 안중근 향나무
-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
하얼빈의 하얼빈역은 우리에게는 안중근역이다. 구 역사에 안중근 기념관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현장을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다. 이곳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순국한 랴오닝성의 뤼순이 있는 다롄까지는 천여km이고 시속 296~7km의 고속열차를 타면 4시간여다. 발해만의 도시 뤼순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점령 관동 주 정부와 관동군 사령부를 뒀다.
재판이 시작도 되기 전 일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안중근의 사형 언도를 지시했던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현재 뤼순 인민병원이다. 옛 건물 ‘뤼순관동법원구지’는 박물관이 되어 안중근을 재판하던 법정과 고문 도구 등을 전시하며 온갖 범죄를 증언·증거하고 있다.
‘네가 만약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는 안중근의 사형 선고 뒤 어머니 조마리아가 보낸 편지이다. ‘이등박문은 수많은 한인을 살해하였는데 안중근이 이등박문 1인을 죽인 것이 무슨 죄요, 일본 재판소가 각국 변호사를 불납(不納)한 것은 무지가 극함이다’는 1910년 3월 2일 대한매일신보의 조마리아 기사이다.
조마리아의 본명은 조성녀이며 마리아는 세례명이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이 만주로 떠날 때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했다. 둘째 안정근은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가했고 셋째 안공근은 김구와 더불어 한인애국단 활동을 했으며 안중근 순국 뒤에는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다.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일제에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일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라며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는 시신을 유기하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안중근이 처형당한 뤼순감옥은 러시아가 짓고 있던 건물을 일제가 빼앗아 큰 대자 모양으로 만들어 1898년부터 1945년까지 운영되었다. 수용 규모는 275실 2천여 명이나 2만여 명을 수감한 수색실, 동쪽 감방, 암방, 사형집행실, 고문실, 밭과 과수원, 벽돌공장 등 15개의 공장과 밭이 있었다. 현재는 뤼순 지역 정부에 의해 당시 수감생활의 유물·유적을 전시하고 항일운동의 대내외 지사를 기리는 ‘뤼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 독립지사는 안중근, 신채호 이희영, 김병현, 박민학 등이 순국하였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이 고초를 겪었으며 안중근의 독방과 교수형을 집행한 집행실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얼마 전 할아버지는 의병, 아버지가 참전했다고 주장하는 춘천지검장 이영임이 윤석열을 심판하는 헌법재판관을 ‘일제 치하 일본인 재판관보다 못하다’, ‘내가 특정업무경비가 없지 가오가 없나? 이왕 없는 거 가오만 키워야겠다’고 했다. ‘가오’는 얼굴, 체면의 일본어다. 그렇다면 여기 일제의 법원이 우리 헌재보다 더 낫다는 말인가? 재판도 시작 전 사형을 확정하고 변호사마저 불납한 일제를 찬양하는 나부랭이의 치욕적 헛소리를 역사의 기록으로 여기 남긴다.
만주와 연해주는 우리의 거대한 민족학교이자 조상과 선열이 남긴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일제 용어인 문화재가 아닌 문화유산이 가득한 그 우리 옛 땅 발해만의 도시 뤼순에서 우리가 잊고, 잊히는 역사를 결코 잊지 말자 다짐하고 새긴다.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구지를 지키는 두 그루 향나무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