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177

작성자김 목|작성시간26.06.19|조회수32 목록 댓글 0

요녕성 뤼순감옥 느릅나무

- 진정한 감옥은 어디일까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요하강 서쪽을 요서, 동쪽을 요동이라 했다. 환단고기의 기록은 물론 고조선, 고구려, 발해까지 우리 땅이었다. 고려 공민왕 재위 19년인 1370년 10월 제1차 요동 정벌이 있었다. 옛 고구려 오녀산성에 이르러 이성계는 종의 활 편전을 빌려 70발 모두를 적의 머리에 꽂았다. 겁에 질린 서주 동녕부 추장 고안위는 처자를 버려둔 채 밤중에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도주했고,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무기를 버렸다. 고려군이 노획한 소 2천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원 주인에게 돌려주자, 이웃하는 여러 성의 1만여 민호가 투항했다. 이 정벌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옛땅을 되찾고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와 고려군을 ‘고구려 몽둥이’라는 ‘꺼우리 빵즈’로 두려워했다. 고구려와 고려군이 얼마나 용감무쌍한 군사였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니, 지금은 흐르는 요하강을 따라 줄지어 고구려의 요동성, 백암성, 안시성, 건안성, 그리고 비사성 등의 옛터가 중국 땅에 있을 뿐이다. 요하강이 발해만과 만나는 도시 대련에 이르면 난공불락의 비사성이 있다. 또 이 대련의 바다 끝 마을 뤼순에 악명 높은 일제 감옥이 있다. 이 ‘뤼순 감옥’에서 독립투사 안중근, 신채호 이희영, 김병현, 박민학 등이 순국하였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김광추, 유상근 등이 고초를 겪었다.

이곳을 둘러보려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기에 서둘러 뤼순 감옥에 이르러 담장을 따라 걸으니, 죄를 짓고 온 것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망국의 한을 품고 고초를 겪었을 항일 지사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 뤼순 감옥은 총 275개 감방에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항일 지사를 사상범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수감하여 1906~1936년 사이에는 수감자가 연간 2만여 명에 달했고 700여 명을 처형했다. 냉난방 시설도 없는 좁은 감방에는 나무통 변기만 달랑 남아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새우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싶어 온몸이 옥죄어들었다. 사형장에서도 인권 대신 만행만 있었다. 세 사람을 나란히 세워 목에 줄을 걸어 형을 집행하고 목구멍에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꽂아 생사를 확인하면 시신을 사형장 아래 나무통에 떨어뜨려 반으로 접어 넣었다. 곧 담장 너머 야산에 묻어버렸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과 사형장도 그대로 보존되어있었다. 돌아보는 내내 소름 돋는 일제의 악랄함과 유해를 묻은 담장 밖의 야산에 아파트가 들어서 아직 유해도 찾지 못한 현실에 자괴감이 엄습했다. 또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신채호(1880~1936)는 수감 8년만인 1936년 2월 18일 옥중에서 뇌내출혈로 의식을 잃고 3일간 방치되다 21일 오후 4시 20분경 순국했다. 이때 쓴 글이 ‘조선상고사’이다. 이회영(1932~1932)은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한 경술국치에 전 재산을 급하게 처분하여 만주로 이주했다. 이후 현지의 한인 단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건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연해주, 상하이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도 참여하였으니 당시 서간도 지역 한인 단체는 이회영 일가의 재력으로 유지된 셈이다. 오늘에 그의 후손이 궁핍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은 친일파 후손은 득세하고 독립지사 후손은 빌어먹는다는 말의 전형인 셈이다. 그런 세상을 한탄하면 뭐할까? 언제쯤에야 답답한 심정은 거둘 수 있을까?

이밖에도 무기징역으로 18년을 복역한 박희광(1924~1943) 등 항일 독립지사들의 흔적을 둘러보고 ‘뤼순일아감옥구지(日俄監獄舊地)’라는 푯말에 박물관이 된 감옥을 나오며 고개를 돌려 한 그루 느릅나무를 잠시 바라본다. 옥을 나왔지만 몸과 맘이 옥에 갇힌 것처럼 무겁다.

뤼순감옥 느릅나무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하얼빈 뤼순감옥 느릅나무 – 호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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